좁은 골목과 계단, 틈으로 보는 세상

불편함을 누리는 삶의 지혜

by 흑진주

지난 제5화에서는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주민이 일상 속에서 기꺼이 감수하는 불편함의 가치를 이야기했다. 그런데 불폄함을 단순히 감수해야 할 희생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끌어안고 살아온 세월 덕분에 그 불편함 자체가 마을의 정체성이 되고 풍경이 된 곳들도 있다.


물론 '불편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주관적일 수 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좁음, 낡음, 오래됨, 복잡함'이란 단어에서 '불편함'의 키워드를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효율성과 편의성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불편함은 개선되어야 하는 장애물이다.

그러나 제3장에서 소개했던 절벽 위의 마을들로 다시 가보면, 이러한 불편함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관점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바로 그 불편함 때문에 독특한 기억을 간직하게 되는 마을이 되었다.


버스와 지붕이 인사하는 마을


에메랄드 빛 바다를 끼고 있는 그리스의 코르푸 섬 절벽 위에 13세기 건축양식의 팔레오카스트리차 수도원이 있다. 그 역사 만큼이나 유명한 지중해 경관을 내려다보기 위해서 수도원으로 향했다. 수도원에 도달하려면 해안선을 따라 구불구불한 도로를 올라야 하고 그 해안도로에 진입하려면 경사진 언덕 마을의 오르막길을 거쳐야 했다.


우리를 태운 버스가 오르막길에서 왼쪽으로 틀었다가 조금 가서 다시 우측으로 몸을 기울이는 과정을 여러 차례 반복했다. 놀라운 것은 그 길은 외길이었고 매운 좁은 도로였다.

좁은 것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버스 한 대가 딱 들어갈 수 있는 폭이다. 버스의 우측 창가로 10cm도 안 되는 거리에서 주택가 지붕이 지나가고 있고, 바로 눈앞에서 주택의 돌벽이 스쳐간다. 창문에서 손을 뻗으면 지붕에 닿을 것 같고, 이러다가 돌벽에 버스 몸체가 쓸리는 게 아닐까 싶게 가깝다.

맞은편에서 차가 오면 멈추고 운전자들이 서로 그리스어로 뭐라고 얘기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다시 유유히 도로를 올라간다.


가이드가 설명해 준 바에 의하면 운전자들 사이에서는 도로 위의 양보를 위한 나름의 '규칙'이 있다고 한다. 인적 없는 시골길도 아니고, 관광지여서 통행량이 꽤 있는 도로인데 외길 위에서 마주친 차들이 서로 타협하고 손짓하며 '지나가세요'라고 한다.


그들만의 도로의 규칙을 알 리 없는 렌트카 여행객들은 도로에서 적잖게 당황하게 되는 상황을 자주 만나게 된다고 한다.

버스 창가에서 바라본 풍경
버스가 지나가는 벽면과 주택

이 마을 주민은 '좁음'이 야기한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절벽을 깎아서 도로확장공사를 하는 대신 그 불편함을 수용하고 흔쾌히 불편함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기술을 터득했다.

느리더라도 양보하고, 유연하게 순서를 조절하는 삶이 습관이 된 좁은 도로 위의 풍경 그대로가 이 마을을 말해준다. 경사진 언덕 가에 서 있는 집들을 부딪히지 않고 지나가는 운전의 기술은 이웃들끼리 서로 부딪히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가르치며, 멈춰 서서 서로 대화할 수 밖에 없는 도로 위 환경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친밀하게 만들어 정서적인 거리를 좁혀준다.


우리는 버스가 한 번씩 좁은 도로 통과하기에 성공할 때마다 기사님에게 환호성하며 박수를 쳤고, 기사님은 이에 기쁨으로 호응해주셨다.

그들이 사는 마을의 규모와 삶의 속도 그리고 유산의 무게로 인해 마음대로 개발할 수 없는 현실의 불편함을 삶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지혜를 발휘하여 새로운 관계와 풍경을 만들었다.


한 사람만 오를 수 있는 한 폭의 돌계단


유럽 도시를 걷다 보면 미로 같은 길들을 만나게 되고, 더 가다 보면 광장이 나오고 광장을 지나다 보면 좁은 골목이 나오고 골목 옆에 좁은 계단이 있고 계단을 오르면 또 좁은 길이 나온다.

이 골목을 따라가면 대체 무엇이 나올까, 저 계단 아래로 내려가면 어느 길로 연결이 될까, 끊임없이 호기심을 자극하여 발걸음을 옮기게 만드는 것이 유럽 골목의 매력이다.

이오니아 해를 끼고 있는 절벽 위의 도시, 타르오미나의 코르소 움베르토 거리는 그런 매력이 넘치는 곳이다.


길 옆의 계단으로 이어지며, 계단 위에 길이 있고, 그 미로같은 길들은 코르소 움베르토 메인 거리로 연결된다. 그렇게 가다 보면 발견되는 장소가 있고, 발견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거리다.


이 거리에는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폭의 좁은 계단이 있다. 계단 입구에 레스토랑 간판과 메뉴판이 놓여있다. 이 계단은 레스토랑 입구이다. 이 레스토랑은 계단을 발견하고 의지적으로 계단을 오르기로 결정한 사람들에게 열려있는 공간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레스토랑이 있는지도 모르는 숨겨진 공간이다


도시의 정체성을 보전하기 위해서 숨겨져 있던 공간을 발견하는 희열. 이것은 좁은 골목과 계단을 통해서만 누릴 수 있는 여정이다.




이와 비슷한 재미가 있는 또 하나의 도시가 레 보 드 프로방스(Les Baux de Provence)였다. 일종의 '발견의 재미'다. 마을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좁고 가파른 길, 사이사이로 연결되는 골목과 계단을 거쳐 요새 꼭대기에 올랐을 때 눈앞에서 프로방스 평야의 끝없는 초록 물결과 만나게 된다.


'정말 여기로 가도 될까'싶은 의심으로 시작되는 좁고 낡은 공간에서 끝이 어딘지 모를 불확실성과 단절감을 극복하며 도달한 세상이기에 더 큰 감동과 해방감마저 생긴다.

그것이 좁은 길의 효과이며 고난이 주는 선물이다. 이것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때 얻을 수 있다.

레 보 드 프로방스 요새 끝 전망 1
레 보 드 프로방스 요새 끝 전망 2


문 밖의 당신에게; 낡은 문의 침묵과 미소


좁은 길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걸어가는 이유는 다양하다. 눈앞의 기대감, 도달해야 하는 목표의식, 오늘을 기록하는 SNS 인증샷, 새로운 경험에 대한 호기심 등이 있다. 그런데 그 여정을 걸어가는 게 외롭지 않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하는 재미가 하나 더 있다.


그것이 유럽의 문들이다. 문들은 낡았고 좁고 낮으며 항상 굳게 닫혀있고 철제 문고리를 지녔다. 오랜 세월에 검게 바랬고 틈이 생겼으며 수많은 마찰로 생긴 스크레치가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 낡음과 투박함도 문을 감싸 안고 있는 담쟁이덩굴 덕분에 따뜻하고 정감있는 시선으로 다가온다.


문은 분명히 경계의 상징이며, 그 집안의 삶을 외부로부터 보호하며 침묵한다. 그러면서도 문이 길과 바로 맞닿아 있어서 그 길 위에 있는 나를 환대하고 맞이하는 기분이 든다.

문 앞에 서서 잠시나마 저 문 너머의 아늑한 공간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지중해 풍경을 상상해본다. 돌길을 오래 걸어서 발바닥이 시큰거리는 지금 가는 길을 멈추고 저 문 안으로 들어가서 쉬고 싶어진다. 그러나 문은 절대 열리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가던 길을 계속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나는 이 문들의 표정을 '무뚝뚝한 미소'라고 부른다.


이 문들은 좁은 공간의 '불편함' 속에서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만들어냈으며, 그것이 모여 마을의 풍경이 되고 그림의 소재가 되며 여행객의 추억이 되었다.




누림은 소확행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수용하고 그 안에서 최선의 '좋음'을 발견하고 살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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