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에서 시작되는 파노라마

첫 항해의 변주곡

by 흑진주

아찔했던 순간, '난 당신을 책임지지 않아요!'


크루즈에서 자고 일어나면 우리의 Sun Princess호는 새벽 즈음 다음 기항지에 도착한다. 그리고 하루 종일 항구에 정박해 있다가 당일 저녁에 다음 기항지를 향해 출항하는 루틴으로 운행이 된다.

나는 기항지마다 전투적으로 그룹투어일정을 다녔다.

항구에는 Sun Princess 뿐 아니라 Norwegian 같은 다른 회사 크루즈들도 비슷한 시간에 도착을 한다. 그래서 오전이 되면 관광객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온다.


관광은 각 도시마다 현지인 영어가이드가 인솔한다. 가이드는 크루즈 승객들이 자기 그룹을 구분할 수 있도록 깃발을 들고 다닌다. 그런데 깃발색조차 너무 비슷해서 조금만 발걸음을 늦추면 다른 크루즈 투어 그룹에 휩쓸려 따라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인파 때문에 가이드가 안 보일 때도 있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자유시간을 주고 만날 장소를 알려줘도 마음 편하게 돌아다니기가 쉽지 않다.

도착하는 장소와 다시 만나는 장소가 달라서 만나는 장소를 반드시 확인해두어야 한다.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할 때는 버스 번호판 사진을 찍어두는 게 좋다. 도착할 때는 주차장이 한산해도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순간 어느새 즐비하게 늘어선 관광버스들을 보고 당황하게 된다. 다 비슷비슷해서 구분이 안 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제노아(Genoa) 항구에 도착한 날이었다.

기항지 제노아에서 제공되는 관광옵션이 매우 다양하고 가족들은 각각 하고 싶은 것이 모두 달랐다. 그래서 이 날만은 각자 소망하는 것을 하기로 약속했었다. 테마관광 중 하나인 푸드투어(일종의 지역맛집투어프로그램)를 하거나, 제노아 시내에 가서 쇼핑을 하거나, 근교 마을들을 방문하는 등, 원하는 대로 각각 흩어졌다. 나는 포르토베네레와 친퀘테레를 향해 버스에 올랐다. 제노아에서 포르토베네레까지 2시간 30분이 걸렸다.

포르토베네레를 잠시 구경한 뒤 친퀘테레로 향하는 배를 탔을 때였다.

푸른 리구리아 해의 해안선을 따라 절벽바위가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풍경에 완전히 정신을 뺏긴 채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바다를 가로지르며,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은 친퀘테레의 한 마을로 배가 서서히 다가섰다.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일어나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고, 몇 분 후 배가 부두에 닿았다.

정박 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고, 나도 자연스럽게 일행을 따라 발을 내디뎠다.

그 순간 뒤에서 매우 격앙된 목소리가 들렸다.


"아 거기 당신!!! 내리면 안 돼요. 지금 내리는 거 아니에요. 다시 오세요. 다시 올라와요"


뱃고동 소리, 바람 소리, 파도가 절벽에 부딪치는 소리, 수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 모든 소음 때문에 정확히 무슨 말인지는 분간할 수 없었지만, 고개를 들어보니 2층 갑판에서 나를 향해 손짓하며 다시 배 위로 올라오라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었다. 우리 그룹의 다혈질 이탈리안 가이드였다.

그제야 뭔가 잘못된 것을 알았다. 내가 다른 일행을 따라간 것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이 배가 친퀘테레 다섯 마을에 모두 정차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리의 목적지는 몬테로소였기에 당연히 여행객들을 위해 임시로 준비한 운송수단이라고만 생각했다. 승객들이 모두 관광객이었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만약 여기서 일행을 놓쳤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아찔했다. 여권까지 모두 룸에 두고 나왔던 상황이었고, 심지어 기항지까지 차로 몇 시간 달려야 한다.

배 위로 다시 엉거주춤 올라선 나를 보며 다혈질인 현지 가이드가 난리를 쳤다.


"도대체 내가 마지막 정거장에 내려야 한다고 몇 번을 말했습니까?"

"꼭 말 안 듣는 사람들이 있어요. 꼭!"


그의 목소리는 분명히 야단치는 것 같은데 묘하게도 화난 표정이 아니라 실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더니 씩 웃으며

"나를 놓치면 당신이 알아서 기차 타고 와야 됩니다. 난 당신을 책임지지 않아요!"


나는 그저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짧은 영어 탓인지, 아름다운 풍경에 정신을 뺏긴 탓인지 그런 일은 정말 한 순간에 벌어진다.


그날의 아찔한 순간을 포함하여 몇 번의 '가이드 놓치기' 경험을 하고 나서, 관광할 때 같은 일정으로 자주 만나는 승객이나, 눈에 띄는 특징을 가진 사람들을 눈여겨보기 시작하는 습관이 생겼다. 형광빛 나는 빨간 등산복을 입은 남자, 강렬한 노랑원피스를 입은 여자, 아이 둘을 데리고 다니는 가족, 친구 4명이 같이 다니는 아시안 그룹 등 나만의 시그널을 정했다.

이 '시그널 피플'들은 내가 방향을 헷갈리거나, 가이드가 내 시야에서 안 보일 때 우리 일행을 구분하여 따라갈 수 있는 일종의 '나만의 비밀스러운 안전장치'였다.


제노아 항구로 돌아와 작별인사를 나누는데 이탈리안 현지 가이드가 나에게 그 묘한 미소를 다시 지어 보였다. 나도 감사인사로 화답하며 소정의 팁을 건넸다. 내가 국제미아가 될 뻔 한 위기에서 건져준, 위트 있고 거침없고 가장 프로페셔널했던 가이드였다.

제노아 항과 시내 전경

항구와 도시가 이어지는 순간


매일 항구에서 도시로, 다시 도시에서 항구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 창밖으로 보는 전경은 일반 관광에서는 볼 수 없는 또 다른 볼거리다. 예상하지 못했던 흥미로운 장소가 나타나는가 하면, 그림 같은 농가의 풍경이나 장엄한 자연경관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가이드의 설명은 오가는 버스 안에서도 계속 이어진다.

그래서 버스에 승차할 때마다 잠시 고민에 빠진다.

'오늘은 어느 쪽에 앉아야 최고의 풍경을 눈에 담을 수 있을까?'

항구와 도시를 잇는 도로 위에 어떤 파노라마가 어떻게 펼쳐질지 예상할 수가 없다. 어느 쪽이 되었든 최고의 전망을 보장하는 자리는 꼭 있다. 다만 미리 예측할 수는 없고 관광이 끝날 즈음되면 파악이 된다. 그런데 그 자리가 목적지별로 매일 바뀌기 때문에 어제의 경험으로 오늘을 적용할 수가 없다. 그야말로 기회의 평등이고 끊임없는 변수의 연속이다.

긴 투어를 마치고 항구 가까이에 다다르면, 저 멀리 선착장에 우뚝 서 있는 Sun Princess호가 시야에 들어온다. 어느새 익숙해진 그 거대한 선상의 몸체가 너무 든든하고 정겹기까지 하다. 마치 고된 일 나갔다가 하루 일과를 무사히 마치고 따뜻한 집에 돌아오는 듯한 기분이 든다.

크루즈에서는 관광을 마친 승객들이 입장을 시작하면 입구에서 직원들이 서서 반갑게 맞이하고 준비한 수건과 음료를 제공한다.

룸으로 돌아와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다시 시작되는 저녁일정을 위해 드레스코드를 정한다. 그리고 다시 바다를 보기 위해서 갑판으로 모인다. 배에서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 다가온다.


뱃고동 울리는 출항의 순간


그것은 바로 기항지를 출발하는 순간이다.

출항시간이 되면, Sun Princess호는 그 거대한 존재감을 알리듯 뱃고동 소리를 몇 차례 크게 울린다.

둥-둥-둥-둥-둥-둥!


그 웅장한 소리가 항구 전체를 휘감으면, 육지에 서 있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배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준다. 그들의 환송에 화답하듯, 나도 배 위에서 손을 힘껏 흔든다. 때로는 맞은편에 정박했던 Norwegian 크루즈 승객들까지 함께 손을 흔들어 주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그 순간만큼은 전투적인 관광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온 전사가 된 듯한 벅찬 감격이 있다. 동시에 이제는 안전하다는 안도감이 생긴다. 그리고 다시 망망대해로 나아가는 크루즈에 몸을 기대고, '이 항해를 끝까지 완수하리라'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게 된다. 크루즈 여행의 하루를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새로운 모험을 기대하는 순간이다.

뱃고동 소리의 여운을 안고, 일몰과 함께 붉게 물드는 바다와 점점 멀어져 가는 기항지의 모습을 눈에 담는 시간은 하루 일과 중에 빼놓을 수 없는 평안한 순간이다.

피레우스 항(좌)과 나폴리 항(우)
라 스페치아 항과 마르세이유 항

난관에 부딪히는 순간


그렇게 웅장한 뱃고동 소리와 함께 의지를 다지며 다음 기항지를 향해 나가더라도 크루즈는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기도 한다.

Sun Princess 신조 크루즈의 첫 항해는 시작부터 뜻밖의 시련을 맞이했다.

아테네에서 첫 출항한 크루즈가 첫 기항지 코토르 항에 가까이 갔을 때 진입허가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크루즈의 경우 해당 도시에서 진입을 불허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기상이변이나, 행정지원인력부족, 여러 크루즈를 모두 수용하기 어려운 지형적인 특성과 기술적인 문제, 정치적인 상황, 환경오염으로 인한 거부 등 다양한 이유가 있다.


선장은 '기술적인 문제(technical problem)'로 인해 경로를 우회해야 한다고 방송을 했고 기항지를 바르(Bar)항으로 변경한다고 알려주었다. 첫 기항지 여행에 잔뜩 기대했었는데 예정보다 두어 시간은 늦어질 것이라는 말에 첫 여행이 어그러지는 것은 아닌가 노파심이 생겼다. 그러나 크루즈 운영팀의 가이드를 따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드디어 바르 항구 도착해서 버스를 타고나서야 안심을 했다. 시간 조정을 해주어서 충분히 여행을 할 수 있었고, 이동시간이 길었지만 크루즈 아니면 갈 수 없을 바르 시내와 전망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우연하게 몬테네그로 입국의 첫 관문이 된 바르 시는 옛 유적지 같지만 현대적이고 조용한 시골마을이었다.

그렇게 항구에서 모든 여정이 시작되었고, 그 도착과 출발을 연결하는 여행 이야기들이 전개되었다.

Stevi Stefan섬 별장 (바르 항에서 코토르 만으로 가는 길)
바르 항(좌)과 시내(우)



모든 일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때로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힘을 빼면 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힘을 빼면 버티기 훨씬 수월해지고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는 지점은 누림의 시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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