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진 무대에 서 있는 사람들
화산 폭발로 굳어버린 시신, 적나라한 환락가와 목욕탕의 흔적, 그리고 난잡한 벽화들. 90년대 초 처음 마주했던 폼페이는 내게 '충격' 그 자체였다.
정보가 귀했던 시절 유럽의 문명을 처음 대했던 내 눈에 비친 그 비극적이고 선정적인 장면들로 인해 폼페이는 다시는 찾고 싶지 않은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여행이 처음인 가족들을 위해,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다시 그 잿빛 도시를 찾았다.
그런데 다시 찾은 폼페이는 예전의 기억과 사뭇 달랐다. 가이드의 영어 설명을 다 알아듣지 못했음에도, 오히려 사람 사는 풍경은 이전보다 훨씬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한 돌길 위로 덜컹거리며 굴러가는 마차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좁은 골목에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번진다. 우물가에 모여 수다를 떨며 물을 긷는 이웃들과 화덕 주변에 둘러앉아 고기를 굽는 가족들은 깊어가는 저녁의 장면을 풍성하게 채워준다.
거리의 식당에서 주인은 손님이 주문한 음식을 요리하느라 여념이 없고, 비스트로(Bistro)에선 일을 마친 노동자들이 피로를 달래기 위해 술잔을 기울인다. 광장에서는 상인들이 흥정을 하고, 주민들은 베수비오 산을 바라보고 한가로이 산책을 즐긴다.
앞으로 닥쳐올 비국의 운명은 상상도 못한 채 말이다.
예전의 폼페이가 비극과 죽음, 향락의 도시로 기억되었다면, 지금의 폼페이는 집과 가게, 부엌과 골목이라는 '삶의 동선'으로 연결된다.
과거의 관광이 충격적인 볼거리에 집중했다면, 오늘의 우리는 죽음 이전으로 돌아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쫓는다.
이러한 변화는 관광 트렌드의 변화일까? 혹은 유물을 바라보는 고고학적 해석의 변화일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과거의 파편화된 기억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 현재의 시선으로 재구성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발을 내딛는 순간, 폐허 된 삶의 터전은 생기를 얻고 색이 입혀진다. 주택마다 따스한 불이 켜지고 거리의 식당들이 간판을 내걸고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죽음의 도시는 비로소 삶의 공간으로 살아난다.
어느 도시나 그렇듯 폼페이에도 가정의 포근함과 거리의 애환, 그리고 은밀한 뒷골목의 욕망이 공존하며 하루가 저물었을 것이다.
다시 발길을 돌리는 순간, 시간은 멈추고 살아났던 공간은 다시 잿빛으로 돌아가버린다.
멈춰버린 도시이지만, 죽음을 넘어서 흐르던 일상의 온기가 있었다.
폼페이는 지금도 그 온기를 찾고 있는 중이다.
폼페이의 거리에서 평범한 일상의 온기를 만났다면, 로마의 상징 포로 로마노에서는 전혀 다른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깎여 내려간 대리석 기둥 하나하나에는 로마라는 거대 제국의 힘과 권위가 스며있다. 광장에서는 정치가의 연설이 울려 퍼지고, 거리로 모여드는 시민들의 함성이 공간을 가득 채우는 듯하다. 회당에서는 철학과 사상 논쟁이 일어나고, 신전의 예배당에서는 기도소리가 들리며, 화려한 황궁의 연회장에서는 은밀한 사교 정치가 오갔을 풍경을 상상해 본다.
90년 초 이곳을 찾았을 때는 무너진 제국의 흔적만 눈에 들어왔다면, 이제는 과거 로마 권력의 정점에서 세상을 움직였던 거대한 사상과 정치적 무대라는 서사를 읽는다.
파르테논 신전과 필로파포스 언덕을 마주한 아레오파고스 언덕에서 철학과 신화, 종교가 서로 팽팽하게 맞선 것을 보았다면, 포로 로마노에서는 시간의 층위 위로 겹겹이 쌓인 권력과 욕망, 종교와 법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굴러가고 있었다.
언덕 끝에 서서 로마 시내를 내려다본다.
포로 로마노는 더 이상 사라진 도시가 아니다. 과거의 영광과 상처가 층층이 쌓여있는 토대 위에서 현재의 로마와 맞닿아있는 '살아있는 도시'의 일부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유럽 거대제국의 영광과 몰락, 삶과 죽음, 그 안에 깃든 영성과 예술혼, 이 모든 것이 인간이 쌓아 올리고 보전해 온 유산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역사의 굽이마다 인간의 의지를 넘어선 '주관자의 손길'이 작용했음을 느끼게 된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늘을 겸허하게 걷는 것뿐이다.
낡은 고대유적들 사이를 오가며 파손된 대리석 기둥에 살포시 내려앉은 갈매기처럼, 여행자는 오늘의 시간을 기록하는 참여자가 된다.
우리의 육지의 여정은 이렇게 로마에서 완성되었고, 포로 로마노 언덕 위의 갈매기는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