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본능에 대한 실존적 질문
유럽의 눈부신 자연과 고풍스러운 건축물 앞에서 찍은 엽서 같은 사진들, 그 이면에는 처절한 유럽공중화장실 이용후기가 숨어 있기 마련이다.
화장실을 찾는 것부터가 고난의 시작이다. 어렵사리 찾아내도 동전이 없으면 들어갈 수 없고 아무리 급하다 해도 봐주는 법이 없다. 동전을 바꾸려 인근 가게에 들어가면, 여행객들이 계산대 앞에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카페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해 크루아상이라도 사야 하기에 생리적 현상에 지불하는 금액이 계속 올라간다.
그나마 관광버스에 오르면 가이드가 화장실 사용 계획을 설명해 준다.
"앞으로 두 시간 동안은 중간에 기회가 없습니다"
"도착하면 화장실에 갈 시간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방광은 자신의 생체리듬을 포기하고 잔뜩 긴장한다.
뇌에서는 순식간에 전신으로 지령이 전달된다.
'수분 섭취 금지, 활동에너지 관리'
대장까지 작동하기 시작하면 상황은 더 난처해질 것이라고 겁을 준다.
'대장 활동 최소화'
여행자는 물병 뚜껑을 열다가 다시 닫아버리고, 점심식탁에 앉아서 식욕을 억누른다.
자유시간에는 지금 당장 신호가 없더라도 '만약'을 위해 화장실을 들러야 한다는 강박이 여행자를 짓누른다. 다음 목적지에서 화장실 갈 시간이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터질 듯한 방광을 달래며 화장실 입구를 찾아 헤매는 순간, 유럽 여행의 품격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아드리아해의 푸른 바다 위에 떠 있는 인공섬 성당 옆에는 풍경의 일부처럼 녹아 있는 조그마한 중세 양식의 건물이 하나 있다. 세월의 때가 묻은 돌벽과 주홍빛 지붕 덕에 언뜻 보면 성당의 부속 시설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곳은 섬을 찾은 여행객들의 절박한 본능을 해결해 주는 공용화장실로 사용 중이다.
그곳에서 마주한 장면은 상당히 기묘했다.
화장실 게이트맨은 여행객 한 사람이 들어갈 때마다 건물 옆 수도로 달려가 펌프질을 시작한다. 양동이에 물 한가득 받아온 그는 고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화장실에 들어가서 물을 쏟아붓고 나서 다음 고객을 들여보내고, 다시 물을 받아온다.
이 낯선 의식을 지켜보며 처음엔 어리둥절했고, 다음엔 '설마'하는 의구심을 품었으며, 마지막엔 줄 서 있는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살폈다. 우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서로의 눈 속에 담긴 당황함을 확인하고 있었다.
어쩌면 중세 시대 화장실의 전경을 재현하는 기묘한 퍼포먼스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상상마저 하게 된다.
건물 내부는 어두컴컴했다. 창가로 가늘게 새어 들어온 빛줄기 하나가 무대 조명처럼 바닥의 한 점을 비추고 있었다. 사각형의 텅 빈 공간, 그 우측 모퉁이에는 양변기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바닥면에 비스듬하게 고정된 그 자태가, 현대 미술의 혁명을 알렸던 마르셀 뒤샹의 작품 <샘(Fountain)>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그 레디메이드(Ready-made) 예술품이, 현실의 거친 공간 속에서 패러디된 듯한 기묘한 느낌마저 들었다.
변기와 주변 바닥이 물기로 흥건하게 젖어 있다.
이 부조리한 공간에서 어떻게 본연의 목적을 달성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옷자락에 물이 묻을까 봐 까치발을 들고 위태롭게 오락가락했다. 마치 물에 젖은 강아지가 본능적으로 몸을 털어내듯,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온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 서늘한 전율 때문이었을까. 방광은 침묵했고 생리적 반응이 잠잠해졌다. 결국 그냥 나왔다.
떠나오는 배 안에서 섬을 돌아보며 내 시선은 성당이 아니라 섬 끝자락에서 침묵하며 서 있는 조그마한 중세식 건물에 머물렀다.
인공섬의 특수한 지리적 환경이 빚어낸 풍경이었을까? 섬은 청결을 유지하는 최선의 생존방식을 선택했고, 게이트 맨의 정직한 노동을 통해서 그 방식을 실현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당혹감을 넘어서서 숙연해졌다.
인간의 노동과 원초적 절박함이 묘하게 결합된 이 풍경은 성당의 성화보다 더 진실한 삶의 단면이 되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햇살과 푸른 바다 위에 떠있는 섬은 펌프질 하는 게이트맨과 함께 그렇게 내 기억에 새겨졌다.
고집스러운 아날로그가 유럽 화장실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중세의 흔적이 짙은 요새 도시에도 현대적인 시스템이 도입된 화장실이 있었다.
프랑스의 요새마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마을 입구에 자리한 심플한 건물 내부에는 네 칸의 공간이 있는데, 각각의 문은 차가운 금속제로 된 자동개폐식이었다. 이곳에선 게이트맨 대신 기계가 움직인다. 한 사람이 나오면 자동으로 세척 시스템이 가동되고, 빨간 불이 켜진 동안 문은 굳게 잠긴다. 세척이 완료되어 다음 손님을 맞을 준비가 끝나야만 비로소 녹색 불이 들어오며 잠금이 풀린다.
사람들은 기계의 신호를 기다렸다가 녹색 불이 켜진 공간으로 순서대로 움직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런 ‘셀프 클리닝’ 화장실은 이미 유동인구가 많은 유럽 관광지나 거리에 흔하게 보급된 시스템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기계에 입력된 알고리즘의 지시에 전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화장실이 비어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해도 소용없다. 아무리 급박한 신호가 와도 기계가 정한 ‘세척 시간’이라는 절대적 절차를 견뎌내야만 한다.
사람이 직접 물을 퍼 나르던 비효율보다는 이 자동세척 시스템이 훨씬 위생적이고 합리적일 거라 기대하며 말이다.
안으로 들어선 순간, ‘찰카닥’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그와 동시에 낯선 감정이 밀려왔다. 갑작스러운 존재론적 두려움이다.
"이 기계가 오작동해서 문이 안 열리면 어떻게 하지?"
소리를 질러도 밖으로 새 나가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한 금속 벽 속에 갇힌 느낌이다.
"나가기도 전에 세척물이 머리 위로 쏟아지지는 않을까" 하는 황당한 상상까지 보태지면 불안은 극에 달한다.
마침내 다시 문이 열릴 때쯤이면, 안도감에 마음을 쓸어내리며 도망치듯 뛰어나오기 바쁘다.
유럽의 화장실은 이토록 내게 평안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여행자는 매 순간 선택을 해야 한다.
"지금 화장실을 갈까? 말까?"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관광의 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관광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는데 여전히 공간은 두 개뿐인 화장실에서 시간을 소모하는 동안 나를 기다려야 하는 일행을 생각하면 미안함과 조바심이 생긴다.
특히 유럽의 박물관들은 건축 구조상 화장실이 미로처럼 숨겨져 있거나, 한 번 지나가면 되돌아오기 힘든 복도 끝에 위치한 경우가 많다. 그곳을 다녀오기 위해서는 방대한 전시 공간 중 일부를 포기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화장실에 머무는 30분이 가져올 '경제적, 심리적 손실'과 '방광의 평안' 사이에서 치열하게 손익계산을 튕기는 동안, 어느새 바티칸의 유적과 르네상스의 걸작들은 그저 안중에도 없는 '거대한 돌덩이'가 되어버린다.
이쯤 되면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왜 유럽은 이토록 화장실에 인색한 것일까?
문화유산을 함부로 개조할 수 없는 엄격한 법적 제약, 개조 시 발생하는 천문학적인 재정적 부담, 그리고 범죄의 위험에 대한 사회적 인식 등 사회구조적인 복잡한 문제가 얽혀있을 것이다.
화장실을 개선하지 않아도 관광객은 여전히 넘쳐나니, 이 '불편한 전통'을 고칠 절박한 이유가 없어 보일지도 모른다
유럽이 지켜온 변하지 않는 고전적 가치와 유산에 감탄하면서도 그 유산의 목록 안에 '화장실'이라는 부속시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화장실 역시 거대한 문화유산의 일부로서, 그 불편함조차 유럽이 고집스럽게 보존해 온 삶의 일부이며 여행객들이 나누어 가져야 하는 부담이란 것을 잊고 있었다.
더욱이 위생의 문제는 단순히 낡은 시스템의 문제가 아니라 사용자의 인식과 태도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하며, 수요가 공급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감당할 수 있는 관광객의 수요도 이미 한계치에 다다른 듯하다.
이런 역설적인 구조 속에서, 계속 신호를 보내는 방광을 끌어안고 웅장한 천장화를 올려다보며 다시금 자문한다.
'화장실이 먼저냐, 관광이 먼저냐?'
이 실존적인 질문은 여행을 마칠 때까지 우리를 따라다닌다.
그리스 코르푸섬에서 보트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길, 눈부신 지중해의 태양 빛이 스며드는 레스토랑 앞에 긴 줄이 늘어서 있다. 남녀 분리된 화장실 앞이다.
남자 화장실의 회전율은 여자 화장실보다 두 배는 빨랐고, 가벼운 몸으로 빠져나오는 남성들을 바라보는 여성들의 눈에는 사뭇 부러움이 섞여 있었다.
먼저 일을 마친 남자들은 남아있는 이들에게 "생각보다 깨끗하다"는 응원 섞인 한마디를 던지며 사라졌다. 한 중년 여성의 남편 역시 해변 쪽에서 기다리겠다는 손짓과 함께 시야에서 멀어졌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어색하기 짝이 없는 곳이 화장실인지라, 줄 사이에는 지루하고 묵직한 침묵만이 흘렀다. 그때, 한참을 서 있던 그 중년 여성이 심호흡을 하더니 정적을 깨며 질문을 던졌다.
"왜 여자 화장실이 항상 오른쪽에 있는지 아시나요?"
누군가 이 무거운 분위기를 깨주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글쎄요, 왜죠?"
누군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큰소리로 대답했다.
"It is because Woman is always Right" (여자는 언제나 '옳기' 때문이죠.)
여기저기서 참았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른쪽(Right)'과 '옳다(Right)'는 중의적인 뜻을 담은 이 명쾌한 언어유희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의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그게 진리예요!"
"남편한테 말해줘야겠어요! 당신은 왼쪽(left)으로 가고 나는 옳은(right) 길로 간다고요!"
그러고 보니 우리가 거쳐온 수많은 화장실에서 여자 화장실은 신기하게도 대부분 우측에 위치해 있었다. 그것이 통계적 사실인지 우연의 일치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바탕 웃고 나니 긴 줄의 피로함은 눈 녹듯 사라졌고, 냉랭했던 공기는 순식간에 화기애애한 공감으로 채워졌다. 그 순간만큼은 낯선 이방인들이 아닌, 유럽의 척박한 화장실 환경을 함께 견뎌내고 있는 '동지'라는 끈끈한 연대감만이 그곳에 존재했다.
터질 듯한 방광을 달래며 화장실 입구를 찾아 헤매는 동안 무너졌던 유럽 여행의 품격은, 역설적이게도 그 짧은 농담한 줄로 다시금 회복되고 있었다.
공동체는 예기치 못한 불편과 시련을 함께 버티어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