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위의 만찬

크루즈 미식항해

by 흑진주

나를 위한 정중한 초대


크루즈가 주는 가장 큰 해방감 중 하나는 매일 "오늘 저녁은 어디 가서 먹을까" 하는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발걸음 닿는대로 가면 어디든 근사한 식탁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프린세스 호는 음식의 질과 맛에 있어서 매우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특히 레귤러 정찬과 세프 협업 특선 메뉴는 그 자체로 쉐프의 자존심과 품격이 배어있다.

그 중 기억에 남았던 것은 한 스페셜티 레스토랑에서 먹은 해산물이었다.

테이블로 배달된 것은 음식이 아니라 동그랗게 눈을 뜬 빨간 게 한 마리였다. 귀엽게 웃고 있는 그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온다.

게 모양으로 만들어진 도자기 뚜껑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리자 진한 해산물의 향이 뜨거운 김과 함께 확 퍼져 올라왔다. 정갈하게 구원진 생선살과 신선한 조개들이 담겨있다. 지중해 바다 위에서 건져올린 싱싱하고 진지한 맛의 풍미는 바다 냄새와 함께 나의 오감을 자극한다.


그렇게 이어지는 특별한 정찬은 일상에 지쳤던 나를 위해 준비된 선물과 같다.


움직이는 만찬의 위로


프린세스 호의 뷔페는 커다란 접시에 담긴 음식을 손님들이 직접 퍼가는 방식이 아니라, 음식이 1인분 그릇에 담겨 진열되어 있고 원하는 메뉴를 직원이 직접 접시에 놓아주는 방식이다.

누군가 사용했을지 모를 집게를 공유하지 않아도 되는 위생 상의 안심을 보장하고, 음식이 섞이거나 흐트러지지 않은 '첫 서빙'의 비주얼을 끝까지 유지한다.


처음에는 끝없이 펼쳐진 다양한 푸드코너를 한 바퀴 다 돌아보고도 선택하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가 없다. 크루즈에 머무는 긴 시간 동안, 이 모든 맛을 하나씩 음미해 볼 기회는 충분했다.

낯선 맛에 대해 망설일 필요도 없다. 한 입 분량으로 담겨 있어서 '시식'에도 전혀 부담이 없다.


그렇게 나의 취향을 탐색하다 입에 꼭 맞는 메뉴를 발견하면, 얼마든지 다시 담을 수 있는 것도 크루즈 음식의 편리함 중 하나이다.

단골처럼 드나들던 코너의 직원은 어느새 내 얼굴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낸다

"오늘도 Vine Tomatos와 Mexican Beans Salad 맞죠?"


익숙한 솜씨로 음식을 내어주는 그 배려 덕분에 나는 먹고싶은 음식을 마음껏 골라담는다.

전채 요리에서 디저트까지 직원의 정중한 손길로 완성된 '움직이는 만찬'을 들고 식당을 벗어나 탁 트인 갑판으로 향한다.


눈 앞에 펼쳐진 끝없는 수평선과 기분 좋게 뺨을 스치는 바닷바람 속에서 만찬은 지나온 날들에 대한 따뜻한 보상이 된다.


디저트의 반란


크루즈 식탁의 진짜 복병은 단연 디저트였다. 분명 메인 요리까지 기분 좋게 배를 채웠건만, 뒤이어 등장하는 후식은 메인메뉴의 스테이크보다 더 양이 많다.

디저트는 더 이상 소량의 케잌, 과일, 아이스크림 그리고 장식들이라는 공식에 얌전히 머물기를 거부한다.

"이게 정말 후식인가요?"라고 묻고 싶을 만큼 접시 한가득 나온다.


우리는 더 이상을 못먹을 것처럼 손사래를 친다.

그러나 이내 조금씩 맛보기로 하고 나누어 먹으면 금새 접시가 깨끗해진다.


과하게 먹은게 아닌가 싶지만, 오늘의 관광으로 이미 충분히 에너지를 소모했고, 남은 내일 다 소모하면 될 일이라고 위안삼으며 입 안의 즐거움을 음미한다.



울렁거림을 잠재운 국수


여행이 길어지고 다양한 크루즈 음식에 입맛이 무뎌질 즈음, 관광을 마치고 돌아오는 날이면 연일 아시안 푸드코너에 눈도장을 찍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배가 유난히 크게 흔들거렸다. 그때부터 배멀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래 속이 뒤집힌 적은 없었다.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느라 음식에 거의 손도 대지 못했다.

저녁이 되어 정신을 차리고 나니 간절하게 떠오르는 것은 오직 하나. 라면의 컬컬한 국물이었다.

짐을 줄이느라 미처 챙겨오지 못한 라면이 못내 아쉬웠다.

혹시나 해서 아시아 푸드 코너를 둘러봤지만 라면은 없었다.

포기하고 돌아서려는데 진열된 음식 중에서 그동안 눈여겨 보지 않았던 음식이 눈에 들어왔다.


국수다.

얼큰한 라면국물은 아니지만, 담백하고 따뜻한 국수국물을 마시고 나니 울렁거림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럴때는 화려한 식탁보다는 몸이 아는 익숙한 맛으로 돌아가게 된다.


역설적이지만 이번 여행 최고의 맛을 꼽으라면 그리스의 지중해식 로컬 음식이었다.

크루즈 쉐프의 화려한 기교도 없고 품격있는 정찬도 아닌 소박한 식탁이지만, 토마토와 채소에 배어있는 올리브오일과 눈처럼 수북이 쌓인 차지키 소스에는 자연의 정직한 맛이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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