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즈 스케치
바다의 새벽, 정적이 흐른다.
칠흑 같은 어둠이 걷히고 희미한 불빛들이 바다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배는 기항지 도착을 앞두고 항구의 불빛을 향해서 서서히 속도를 늦추어 간다.
24시간 운영하는 인터내셔널 카페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커피를 든 채 창가에 앉아서 배가 항구에 닻을 내리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전날 밤, 로마에서 하선하는 승객들을 위해서 송별댄스파티가 밤 11시까지 이어졌다.
긴장이 풀어져서 그런지 피곤이 몰려와서 음악소리를 뒤로 하고 객실로 돌아왔다.
어느새 정든 크루즈 생활을 정리하고 짐을 챙긴다.
데일리 뉴스레터를 차곡차곡 포개어 놓고 보니 선상에서의 풍경들이 스쳐 지나간다.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은 댄스파티가 한창 진행 중인 크루즈 중심부에 있는 광장이다. 무대를 중심으로 나선형을 그리며 층층이 올라가는 구조로 크루즈 선체를 하나의 소통으로 모으는 곳이다. 무대에서는 라이브 공연, 승선축하와 하선 송별파티, 각종 댄스포퍼먼스가 매일 진행된다. 광장을 에워싼 의자에는 사람들이 모여 앉아 음료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위층의 승객들은 난간에 기대어 라이브 쇼를 내려다본다.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를 하고, 노천카페에서는 손님들이 차를 마시며, 여행자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활기찬 유럽광장의 한 장면을 배안으로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다.
특별 공연은 매일 진행되었지만 난 딱 한 번 보았다. 바다를 배경으로 역경을 극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이었다. 영어로 진행되는 탓에 세세한 줄거리보다는 무대 세팅과 의상 등 볼거리에 집중했다. 인기 있는 공연은 늘 만석이라 저녁을 간단히 먹고 일찍 줄을 서야 했지만, 관광의 여독 때문이었는지 무색하게도 무거운 눈꺼풀은 자꾸만 내려앉았다.
건강한 활기로 늘 붐비던 수영장에서는 대규모 환영 파티가 열렸다. 갑판 전체를 둘러싼 음악과 춤, 그리고 끊이지 않는 먹거리들은 축제의 시작을 알리기에 충분했다. 크루즈 댄스팀의 퍼포먼스가 무르익어갈 즈음이면 구경하던 사람들도 어느덧 음악에 몸을 맡기고 하나둘 댄스팀과 어우러졌다. 마치 처음부터 한 팀이었던 것처럼 수영장 곳곳에서 춤추는 열기는 바다 한가운데서 느낄 수 있는 가장 뜨거운 해방감이었다.
낮에 비키니와 티셔츠 차림으로 수영장을 오가던 승객들이 밤이 되면 턱시도와 이브닝드레스를 차려입고 나타난다. Formal Day의 풍경이다. 이 날은 크루즈 선상이 거대한 런웨이로 변한다.
여자들은 강렬한 원색 실크의 슬립드레스부터 보석같이 반짝거리는 화려한 드레스와 등 라인이 깊이 파인 과감한 블랙드레스를 입고 마음껏 뽐낸다. 턱시도 차림에 보타이를 한 신사들, 네이비와 블랙 슈트를 입은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장면은 영화 위대한 개츠비의 파티장을 방불케 한다.
평소 입지 않는 이브닝드레스 한벌 정도 준비해서, 일상 속의 내가 아닌 '나답지 않은' 내가 되어보는 것도 크루즈가 선사하는 기분 좋은 일탈이다. 그날만큼은 누구나 다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 된다.
크루즈 내부를 구경하는 것도 하나의 커다란 볼거리이다.
갑판의 천정에는 전등과 열선이 동시에 작동하게끔 설계되어 바닷바람의 한기를 따뜻함으로 채워준다,
내부 인테리어부터 구석구석 세심하게 마련된 휴식처들의 데코레이션을 감상하다 보면, 크루즈라는 화려하지만 고립된 공간이 주는 안락함을 느낄 수 있다.
뉴스레터 한 장 한 장에 묻어있는 이 기록들은 이제 '정보'가 아니라 '추억'이 되어 가방 속에 담긴다.
다시 창밖을 본다.
어느새 날이 밝았다.
배가 물살을 하얗게 가르며 나가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위대한 개츠비의 명대사 중 이런 구절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 새 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같은 장소를 걷고 있던 젊은 날의 시간을 지나 30년이 흐른 지금, 중년의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과거 속에 매몰되기도 하고 파도에 밀려 뒤로 물러날 때도 있었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걷고 있었다는 것을.
앞으로 다가올 파도 역시 담대하게 타고 나아가 보겠노라고 다짐한다.
이제 이 바다에서 내려야 할 시간이다.
여행 이야기로 브런치스토리를 시작하며 가방 속에 뭉쳐두었던 기억을 재구성하는 시간은, 제게 다시 한번 지중해를 여행하고 돌아온 듯한 기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이 여정을 마무리하고, 다음 여행을 꿈꾸며 마음속에 남은 몇 가지 단상들을 기록해두려 합니다.
기간의 황금비율 찾기: 선상 위의 14일은 제게는 다소 길게 느껴졌습니다. 다음에는 7일에서 10일의 일정으로 가보려고 합니다.
여백의 미: 여행의 목적이 여유와 쉼에 있다면 기항지 투어 역시 하루를 꽉 채우기보다 반나절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도 배웠습니다.
드레스코드: 크루즈의 정찬을 위해 멋진 정장이나 개성 있는 드레스 한 벌을 준비하면 좋습니다. 그러나 내 몸에 가장 편한 옷이 가장 자유로운 여행을 만들어줍니다.
뉴스레터 읽기: 매일 아침 배달되는 뉴스레터를 꼼꼼히 읽으며 선상의 이벤트와 오늘의 날씨, 도착지의 정보를 살펴보면 도움이 됩니다.
크루즈 선택: 선호하는 취향에 맞춰 크루즈를 신중히 선택하는 일도 여행의 즐거운 과정이 됩니다.
선내 인터넷: 선상에서의 인터넷이 필수는 아닙니다. 그러나 연결되면 바다와 육지는 놀랍도록 가까워집니다.
최고의 휴식: 선상 프로그램을 모두 다 해 볼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물멍'하는 시간이 가장 좋은 휴식이었습니다.
'지중해 빛에 머물다' 시리즈를 끝까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