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음의 궤도

민서이야기: 통제의 귀환

by 흑진주

항암치료를 하는 동안 민서에게는 '지금의 삶'이 유예된 것 같았다.

그래서 오늘 하루 이 순간만큼은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통제 습관이 한 번 발동하면, '지금'은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가족여행.

제주에 도착했다.


남편이 운전대를 잡는 순간, 민서는 속으로 다짐했다.

'남편에게 맡기자'

하지만 5분도 안 돼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이 길 맞아?"

"맞아."

"네비만 믿지 마. 헷갈리면 주유소 가서 물어봐."

"그래그래. 나를 좀 믿어봐"


남편은 혼잣말을 한다.

'또.. 시작이다.'


민서도 자신이 또 그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식당에 들어서면서 민서는 다시 다짐했다.

'오늘은 가만히 있자. 가족들이 알아서 하게 하자.'

하지만 테이블에 앉자마자.

"수저 한 번 더 헹궈서 사용해."

"준호야, 핸드폰 좀 내려놔. 핸드폰에 세균이 제일 많데."

"수진아, 그 옷 너무 몸에 붙어. 헐렁한 거 입어라"


아들이 말한다

"지금 티켓 검색 중이잖아"


딸이 한숨을 쉬었다.

"엄마는 항상 그래."


"엄마도 알아."

민서는 변명처럼 말했다.

"안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어."


정말이었다.

민서는 정말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안된다.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 때.

민서는 딸의 가방을 슬쩍 보고는 속으로 말했다.

'관여하지 말자. 수진이가 알아서 잘 챙겼을 거야.'


하지만 검은 티셔츠, 슬림 팬츠, 가죽 재킷을 보는 순간,

입이 먼저 움직였다.

"그것만 가져왔어? 치마는?"

수진이 대답했다.

"엄마, 짐 쌀 때 말했잖아. 나 치마 잘 안 입어."


민서는 속으로 말했다.

'그래, 수진이 스타일이 있지. 내버려 두자.'


하지만 말은 계속 나왔다.

"좀 밝은 옷 입지. 검은 옷만 가져왔네."

"나 내 스타일 있어."

"스타일도 좋지만, 여자애가 좀 챙겨 입고 꾸미기도 하고 그래야지?"


수진은 대답하지 않고 짐을 정리했다.

민서는 자책했다.

'왜 또 그랬지? 참으려고 했는데...'

여행 3일째 아침.

민서는 일찍 일어나 바다를 보며 커피를 마셨다.

'여유를 갖자'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하지만 가족들이 테이블에 앉자마자 있었다.

"뮤지엄 티켓 예약했지?"

"응, 어제 했어."

'그래, 준호가 했다고 했지. 또 물어보지 마.'

"확인 문자 왔어?"

"왔어."

'그만해. 아들을 믿어.'

"몇 시더라?"

"11시."

'이제 그만...'

"차 기름은?"

"넣었어."

"충분해?"

준호가 한숨을 쉬었다.

"충분해."


차에 타자마자 민서는 입을 다물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내 생각이 꼬리를 문다.

‘주유 게이지 반밖에 안 남았으면 바로 주유해야 하는데…’


"기름 게이지 봐봐. 정말 충분한 거 맞지?"

가족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서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을 잘 살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도,

그 시도를 번번이 가로막는 것이 통제라는 오래된 관성이라는 것도.

그런데도 멈추지 못했다.


아침마다 민서는 '오늘은 아무 말하지 말자.' 다짐해 보지만, 어느새 통제하고 있었다.

딸의 취향, 아들의 식성, 남편의 선택.

저녁에는 후회했다.

'오늘도... 그랬네...'

다음 날 아침, 또 다짐했다.

'오늘은 진짜 간섭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반복되었다.

남편은 이제는 익숙한 듯 민서의 불안을 다독이며 말했지만

자녀들은 점점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여행 5일째 저녁.

준호가 예약한 유명한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또 갈등이 터졌다.

"랍스터 먹을래"

"랍스터는 콜레스테롤 높아. 그냥 갈치 먹자. 제주도잖아. 담백한 게 좋아."


준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엄마!"

수진도 거들었다.

"여행 오자마자 내 옷부터 시작이었어. 사사건건 간섭하고 확인하고. 언제까지 할 거야"


민서는 답답한 마음에 말했다.

"너희들을 위해서 하는 얘기잖아"


"우릴 위해서라고 말하지 마. 그건 엄마 불안을 우리한테 떠넘기는 거야."

"그거 알아? 엄마랑 있으면 내가 한심한 사람 같아. 엄마가 우릴 그렇게 만들어."


수진의 눈빛이 차가웠다.

"엄마 아프고 나서 더 심해졌어. 엄마가 아프니까 가능하면 엄마한테 맞춰주려고 우리도 노력해. 근데 숨이 막혀."


식당을 나와 차로 돌아오는 내내 조용했다.

차창 너머로 제주의 푸른 바다가 일렁였지만, 민서는 그 풍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4년 전, 민서의 시간은 불가항력적으로 멈췄었다. 독한 약물에 전신이 노출된 채 고통을 견디던 그녀에게서 인간의 존엄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미약한지. 분노도, 미움도, 조바심도 모두 부질없었다.

수술 후 회복하며 정지되었던 삶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살아있는 존재 자체로 감사했다. 가족들이 소중했지만, 그들의 인생을 자신과 분리시킬 수 있었다.

생존율이 높지 않았던 암이 민서에게는 인생의 정지가 아니라 다시 흐르기 위한 재정비였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건 기적이었다. 민서는 힘든 상황 속에서 처음으로 '누림'을 맛보았다.


하지만 암을 관리하며 4년이 지난 지금, 통제의 관성이 다시 살아났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민서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다시 유예되었다. 내일을 통제하느라, 오늘을 살지 못했다.

이제 통제는 자신을 지켜주는 방패가 아니라 사람들을 밀어내는 칼날이 되어 있었다.

고치고 싶지만, 민서는 통제 말고는 시간을 통과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오늘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보자.'

그 다짐이 내일도 지켜질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은,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당신은 언제 살아있음을 느끼는가?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은 메시지 전달을 위해 재구성된 가상의 페르소나입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