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과 시작 사이

감정의 끝에서 만나는 질문

by 흑진주

감정은 버티는 과정에서 남겨진 흔적에 가깝다.

불안은 과거의 경험이 미래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신호이고, 분노는 경계가 침해되었다는 표시다.
수치심과 후회 역시 손에 쥐고 있던 것을 쉽게 놓지 못했다는 흔적이다.


감정들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감정이 흘러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고여버릴 때이다.

지나가야 할 감정을 붙들게 되면, 불안은 통제의 방식으로, 분노는 공격의 방식으로 작동된다.


딸이 했던 말이 계속 울렸다.

“우릴 위해서라고 말하지 마. 그건 엄마 불안을 우리한테 떠넘기는 거야.”

민서는 통제 뒤에 숨겨진 자신의 불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호엄마 소식 들었죠? 완치한 지 10년 만에 재발했대요. 그리고 몇 달 못 사셨다네요.”

오랜만에 나간 동호회 모임에서 들은 부고 소식.

이런 소식을 접할 때면 설명할 수 없는 패배감과 불안을 느꼈다.

어둠의 터널을 하나 통과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끝에는 평생 보이지 않는 두려움과 함께 걸어야 하는 끝없는 레일이 놓여 있는 기분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었던 그 무력감의 기억은, 다시 그 상태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 그녀의 통제 기질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민서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두려움을 말했다.

“엄마는 재발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 죽음자체 보다도 내가 아파서 너희에게 짐이 될까 봐. 그리고 너희는 건강했으면 해서... ”

"엄마 힘든 거 아니까.. 그런데 솔직히 우리도 무서웠어. "


가족들은 각자 두려움과 미안함 속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때 민서는 알았다.
이 불안을 없앨 수는 없다.

모든 것을 관리할 수도, 가족의 삶을 자기 불안에서 분리시킬 수도 없다.

다만 불안에 통제로 반응하지 않으려는 선택을 의지적으로 해야 한다.


도연은 지난 프로젝트를 떠올렸다.
일 하는 과정에서 책임을 내려놓았을 때, 확실히 홀가분했던 순간이 있었다.

관성이 되어 스스로를 압박하고 있던 책임에서 잠시 벗어날 기회를 맛본 것이다.

그러나 도연은 그 자리가 흥미롭지가 않았다.

오히려 의미 있는 책임을 원했다. 조직과 자신 모두에게 가치가 있는 자리를 바랐다.

하지만 그들이 원한 것은 정해진 틀 안에서 순응하고 소모되는 역할이었다.

이러한 현실과 자신에 대한 기대 사이의 간극을 마주하면서, 이전에 임원 자리를 놓쳤을 때 느꼈던 그 감정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난 아직 충분하지 않아…’로 시작되는 수치심.

수치심은 현재를 부정하는 감정이다.


오랜만에 하진에게 연락이 왔다.

예전에 클라이언트와 대행사 직원으로 일했던 인연이 있었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잘 지내요.”

"일은 찾으셨어요?"

"최근에 계약으로 잠깐 일 했었어요"

도연은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프리랜서로 자유롭게 일하는 하진 앞에서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진은 업계 소식을 꽤 많이 알고 있었다.

임원이 된 후배, 대표가 된 동료, 완전히 다른 길을 택한 지인의 이야기.

도연의 수치심은 더 커졌다. '나만 뒤처져 있구나'


도연은 지금 이 텅 빈 시간을 버티기 위해서 취해야 할 누림의 태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어도 지금의 시간을 자기 몫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속도를 찾아가는 것.

하지만 잘 나가는 사람들 소식을 들을 때는 마음이 여전히 흔들렸다.

'결실이 없는 삶이어도 정말 괜찮은가'의 질문에 괜찮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과연 진정한 누림은 자신에 대한 기대치를 버려야만 가능한 것인지, 포기하지 않고 솔직하게 나아가야 하는 것인지 사뭇 혼란스러웠다.


도연은 질문을 바꿔보았다.

“나는 남은 시간, 무슨 일을 하며 살고 싶은가?”

도연은 아직 답을 찾지 못했지만, 조급하지도 도망치지도 않기로 했다.

비교를 멈추고, 남의 기준으로 자신을 묶어두지 않으며, 지금의 결핍을 대면한다.

"하진 씨는 사업 잘 되고 있죠?"

"쉬운 일이 없어요. 세상이 많이 변했잖아요."

"그래도 유능하시고 그동안 다방면으로 발로 뛰면서 네트워크도 많이 쌓으셨잖아요."

"관계는 늘 변하더라고요. 돌아보면 제가 조직을 너무 일찍 떠났던 것 같아요. 후회되는 일도 많아요"


하진은 말을 더 잇지 않았다.

후회는 과거를 부정하는 감정이며, '그때 그렇게 할걸'이라는 말속에 스스로를 가둔다.

하지만 과거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때의 자신도, 지금의 자신도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걸 받아들이면 후회는 조금 힘을 잃는다.

도연은 하진이 아직 어떤 후회 속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수치심과 후회, 불안에 머물면 그 시간을 통과하기 어렵다.

이제 세 사람은 누림의 전환을 위해 각자의 도전 앞에 서 있다.


불안을 통제로 바꾸지 않기로 선택하고,
남의 기준에서 벗어나 진짜 자신이 원하는 일을 묻고,
과거를 인정하고 마음의 문을 여는 용기를 갖는 것.


이것은 '어떤 사람으로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으로 모아진다.


수치심, 불안, 후회, 분노, 상실감, 두려움, 슬픔 같은 감정 중 어떤 것이 지금 나를 붙잡고 있는가?


그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떤 태도를 선택할 수 있을까?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은 메시지 전달을 위해 재구성된 가상의 페르소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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