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림의 역설, 불편함

자아의 확장

by 흑진주

다시 피트니스 센터.

도연과 민서와 하진은 서로 다른 시간, 같은 공간에서 근육에 힘을 준다.


녀들은 각자의 삶의 궤도에서 '누림'이라는 새로운 태도로 몸을 틀었다.

이제 삶은 조금 더 편해지고, 시야는 환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그 발을 뗐을 때,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예상치 못한 지독한 불편함이었다.

도연은 뻔한 일자리 제안을 뒤로하고 막막함이라는 파도 앞에 섰다. 정지된 듯한 시간이 여전히 버거웠다. 텅 빈 시간을 무력하지 않게 보내려 애써보지만, 조급함이 시시때때로 밀려든다.

하진은 재현과 부딪히며 피곤한 조율을 반복했다. 속도가 맞지 않는 논의자리는 수시로 이어졌다. 예전처럼 정색을 하고 돌직구를 날려서 감정이 상하는 일도 빈번히 발생했다.

민서는 가족에게 개입하고 싶은 통제의 본능을 누르며 침묵했다. 기어이 튀어나온 잔소리에 자책하고 다시 입을 닫기도 했다.


이러한 시도로 현실이 단번에 변화되지 않는다.

누림은 삶을 가볍게 만드는 약속이 아니라, 지나가는 시간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통과하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림의 현실은 왜 여전히 힘든 것일까?

거기에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누림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편함의 본질을 이해해야 한다.


첫째,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해 온 해석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일이 없는 공백은 곧 무능이었고, 관계의 갈등은 곧 실패였다.

도연에게 일자리가 없는 시간은 '뒤처진 시간'이고, 하진에게 재현과의 불일치가 반복되는 동업은 '잘못된 선택'이며, 민서에게 통제하지 않는 것은 '무책임한 방관'이다.

하지만 누림은 그 규정을 서두르지 않는다.

이 시간이 정말 무능인지, 이 갈등이 정말 실패인지, 이 침묵이 정말 방관인지, 잠시 멈춰 다시 보게 만든다.

익숙한 의미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 부딪히면, 의문이 생긴다.

도연은 묻는다. “나는 왜, 증명하지 못하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걸까?”

하진은 묻는다. “나는 왜, 타인과 섞이는 일이 그토록 성가신 걸까?”

민서는 묻는다. “나는 왜, 내 손아귀를 벗어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걸까?”

이 질문들은 평생 쌓아온 해석의 틀을 사정없이 뒤흔든다.

확실했던 것이 불확실해지고, 당연했던 것을 의심하기 시작하는 그 찰나의 진동.

그래서 그 흔들림이 불편하다.


둘째, 왜곡된 정체성이 재조정되기 때문이다.

누림의 태도는 왜곡된 틀 안에서 나라고 믿었던 숨겨진 나의 한계와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든다.

도연은 자신을 ‘증명 가능한 책임’을 추구했고 일하지않는 나를 무가치한 자아로 규정해버렸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진은 스스로 그어둔 ‘경계’ 안에서만 안전해지려 했던 고립된 자아를 본다.

민서는 ‘통제’라는 방식으로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려 했던 강박적인 자아를 인정하게 된다.

그러나 누림이 개입하는 순간, 이전의 왜곡된 틀 안으로 다시 숨어들기는 어려워진다.

증명되지 않아도 가치있게 존재할 수 있는 현실을 자각하게 되며,

견고한 경계 대신 관계를 다시 설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움튼다.

통제를 내려놓는 자리에 신뢰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자아의 확장은 결코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왜곡된 나의 한계를 기꺼이 깨 보려는 의지가 생길 때 비로소 시작된다.

하지만 평생 붙들어온 가치가 통째로 흔들리는 이 작업은 결코 녹록지 않다.

익숙한 방식이 처절하게 저항하며 나를 다시 예전의 틀로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불편함은 나를 가두고 있던 왜곡된 틀이 깨지는 소리다. 그리고 그 깨어진 틈 사이로, 이전과는 다른 선택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그 틈에서 비로소 '진짜 나'가 숨을 쉬기 시작한다.


셋째, 서로 다른 버팀 속에 있는 사람들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각자의 버팀 속에서 살고 있다.

재현은 하진과 다른 속도로, 다른 우선순위로 일한다.

딸은 민서와 다른 불안과 강박의 지도를 가지고 있다.

도연이 원하는 '의미 있는 책임'을 세상은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정체성, 서로 다른 기준, 서로 다른 리듬이 한 공간에서 섞일 때 충돌은 불가피하다.

재현은 "일단 해보자"라고 말하고, 하진은 "사전에 준비해야 한다"라고 믿는다.

딸은 "괜찮아"라고 말하고, 민서는 "걱정된다"라고 느낀다.

타인의 기준은 사정없이 내 기준을 건드린다.

내가 옳다고 믿어온 자리, 내가 당연하다고 여겨온 방식이 속절없이 흔들린다.

버티는 과정에서 나와 타인의 서로 다른 태도가 맞닥뜨리면 불편함이 발생한다.

다만 그 불편함을 온전히 자기 삶으로 받아낼 때 자아는 확장된다.

익숙한 해석이 흔들리고, 정체성이 재조정되고, 타자와 교차하는 동안 나는 조금씩 넓어진다.

시간을 통과한 자리에는 이전보다 훨씬 넓어진 내가 남는다.


세 사람은 이제 안다.

이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 또한 스스로의 선택이어야 한다는 것을.

익숙한 해석의 흔들림, 정체성의 재조정, 타자와의 교차. 이는 필연적인 진통의 과정이다.

물론 그 불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도연의 공백은 여전히 막막하고, 하진의 갈등은 여전히 팽팽하며, 민서의 불안은 여전히 몸을 파고든다.

그러나 이제 그것들은 그들을 멈추게 하는 장애물이 아니라, 다르게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된다.

공백은 도연이 스스로 삶의 판을 짜는 시간이 되고,

갈등은 하진이 관계를 새롭게 설계하는 재료가 되며,

불안은 민서가 자신과 타인을 신뢰하는 길로 들어서는 통로가 된다.

누림은 익숙한 습관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기 방식으로 시간을 통과하겠다고 선택하는 태도이다.

이제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대신, 그 불편한 시간의 한복판에서 방향 전환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그 걸음은 비록 느리고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았더라도 더 이상 이전의 궤도로 회귀하지 않는다.

불편함을 회피의 대상이 아닌 확장의 동력으로 삼았을 때, 삶은 비로소 이전과는 다른 풍경을 만들 준비를 한다.


당신은 지금 어떤 불편함을 통과하고 있으며, 그 너머 어디로 움직이려 하는가.


*본 글에 등장하는 인물은 메시지 전달을 위해 재구성된 가상의 페르소나입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
이전 09화맞물리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