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윳빛깔을 머금은 땅

파스텔보다 진하고 원색보다 부드러운

by 흑진주

나는 뉴질랜드에서 이곳만의 특별한 색조를 보았다.

분명 원색인데 우리가 아는 원색은 아니다.

파스텔보다 진하고, 원색보다 부드럽고, 맑은데 투명하지 않고, 선명한데 자극적이지 않다.

처음엔 그저 '뭔가 다르다'는 느낌뿐이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이 땅의 색채 아래에는 우유빛깔이 섞여 있다는 것을.


테카포 호수가 그랬다.

청록이라 하기엔 너무 깊고, 바다색이라 하기엔 너무도 잔잔했다.

피콕 그린(Peacock Green)에 가까운, 묵직하게 가라앉은 색.

화려하지 않은데도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수면 위로 빛이 부서질 때면 그 깊은 심연 속에서 낯선 빛들이 반짝였다.

자연의 팔레트 어디에도 없을 법한, 경이로운 색의 농도였다.

푸카키 호수는 또 달랐다.

테카포보다 훨씬 밝고 연했다.

하늘빛이 물속으로 녹아든 것 같은, 말 그대로 '밀크 블루'였다.

물 자체가 스스로 빛을 발산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운트쿡으로 향하던 길, 오전의 푸카키는 연한 물색이었으나 오후가 되자 색의 층위가 변했다.

같은 호수인데도 빛의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나중에야 그 신비로운 빛깔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수천 년 동안 빙하가 암석을 깎아내며 만든 아주 고운 입자, 이른바 '빙하 암석 가루(Glacial flour)'**가 물에 섞여 빛을 굴절시킨 덕분이었다.

입자가 너무 미세해 가라앉지 못하고 물속에 머물며 그런 마법을 부린 것이다.

같은 원리인데 테카포는 깊고 짙었으며, 푸카키는 밝고 화사했다.

그 빙하는 산 위에서 또 다른 흰색을 보여주었다.

마운트쿡의 설경은 결코 차가운 순백이 아니었다.

구름빛이 스며든 듯 부드럽게 희뿌연, 밀키 한 화이트였다.

그러한 뉴질랜드의 흰색은 또 있다.

하늘의 희고 긴 구름이 그것이다.

곳곳이 날카롭지 않게 번지는 부드러운 흰빛을 머금고 있었다.

평야의 색채도 따뜻했다.

옐로 오커(Yellow Ochre)에 우유를 섞은 듯한, 따스한 주황빛이 도는 노란색이었다.

버스 창밖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그 색을 보며,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땅이 가진 기품을 느꼈다.

황량해 보일 법도 한데 이상하리만큼 우아했다.

유럽의 초록도, 미국 서부의 붉은 사막도 아닌, 오직 뉴질랜드만이 품은 따뜻한 '밀크 옐로'였다.

리마커블스 산맥도 예외는 아니었다.

퀸즈타운 와카티푸 호수에서 바라보면 병풍처럼 펼쳐지는 거대한 회백색 암석들.

분명 거친 바위산인데도 차갑거나 날카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세월에 바랜 듯 부드럽게 내려앉은 회백색.

그 거대한 산맥조차 이 땅 특유의 색을 고스란히 입고 있었다.

호수의 피콕 그린과 밀크 블루, 설경의 밀키 화이트, 평야의 밀크 옐로, 그리고 산맥의 밀키 그레이까지.

차갑고 깊은 색과 따뜻하고 연한 색들이 거대한 팔레트 위에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색은 카메라 렌즈로는 나오지 않았다. 오직 눈으로만 담아 올 수 있었다.

그 색들을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를 찾기도 어려웠다.

그저 밀키 하다고 말할 뿐이다.



** 빙하암석가루

https://seethesouthisland.com/lake-pukaki-bluest-lake-new-zealand/

https://www.lawa.org.nz/learn/glossary/g/glacial-flour?utm_source=chatgp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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