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의 네가지 표정

꾸미지 않은 단단함

by 흑진주

뉴질랜드에서 나는 고요에도 저마다의 결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지(靜止) — 눈을 뜨게 하는 고요

거울 호수(Mirror Lake) 앞에 서면 말이 없어진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저 말이 불필요해진다.

잎사귀 사이로 호수가 보인다.

바람 한 점 없는 수면 위에 산과 하늘, 구름이 통째로 박혀 있다.

어느 쪽이 실재인지 헷갈릴 만큼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반추상 풍경화를 감상하는 기분이다.

그 멈춰버린 세계는 오히려 나의 감각을 날카롭게 깨워 눈을 뜨게 만든다.

아늑함 — 마음을 풀어주는 고요

밀포드 사운드로 향하는 길, 몽키크릭(Monkey Creek)에서 잠시 멈추어 아침해가 차오르는 풍경을 바라본다. 1800년대 피오르드랜드 지역을 측량하던 측량사 William Henry Homer의 개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지는 이 계곡은 거대한 산맥에 둘러싸여 있다.¹ 빙하 녹은 시냇물 소리만 나직하게 흐르는 이곳에서, 나는 거대함에 압도당하기보다 보호받는 아늑한 기분을 느낀다. 긴장이 풀리고 마음을 편히 내려놓게 하는 고요다.

몽환(夢幻) — 생각을 놓아주는 고요

에글린튼 밸리(Eglinton Valley)로 접어들면 풍경은 마치 흐릿한 꿈처럼 변한다. 황토빛 대지 위로 낮게 깔린 안개가 모든 소리를 삼켜버린다. 산과 하늘의 경계가 무너지고 땅과 공기가 하나로 섞이는 곳. 무엇이 정답인지 따지는 이성적인 생각들이 기분 좋게 흐려지는 고요가 그곳에 있다.

적막(寂寞) — 나를 돌아보게 하는 고요

남섬을 달리다보면 민둥산 아래 평야를 만나게 된다. 나무 한 그루 없이 단단한 바위와 흙으로만 이루어진 그 꼿꼿한 존재감.² 수만 년을 흔들림 없이 버텨온 그 무심한 풍경 앞에서 자꾸만 겸손해진다. 소란스러웠던 내면이 잠잠해지고, 오롯이 나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단단한 고요다.

이 땅의 고요는 하나가 아니다.

정지는 눈을 뜨게 하고, 아늑함은 마음을 놓게 하며, 몽환은 생각을 놓아주며, 적막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유럽의 기교도, 미국 서부의 드라마틱함도 없다.
대신 오래 버틴 것들만이 품는 깊은 고요가 있다.


주석

¹ 몽키크릭(Monkey Creek)이라는 이름은 19세기 피오르드랜드 지역을 측량하던 측량사 **William Henry Homer**의 개 ‘몽키(Monkey)’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출처: Milford Sound Tourism
https://www.milford-sound.co.nz/travel-info/milford-road-highlights/monkey-creek/

² 뉴질랜드 남섬의 산에서 일정 고도 이상 나무가 보이지 않는 이유는 ‘수목한계선(tree line)’ 때문이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기온이 낮아지고 식물이 자랄 수 있는 기간이 짧아 어린 나무가 겨울을 견디기 어렵다. Southern Alps 중부 지역에서는 보통 해발 약 1,250m 부근에서 숲이 끝나고 알파인 초원 지대가 시작된다.
출처: Te Ara – The Encyclopedia of New Zealand
https://teara.govt.nz/en/alpine-plants/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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