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에는 딱히 죽음이라는 것을 떠올리진 않는다. 다만 생각지 못한 사망사고가 일어났을 때, 유명인의 부고 기사를 읽거나 나와 관련된 사람, 혹은 반려동물의 죽음을 맞이할 때. 이럴 때에는 평소보다 죽음에 대해 더 생각하곤 한다.
내가 처음 죽음이라는 것을 인식했던 때는 7살, 유치원 소풍날 아침이었다. 그때 우리 집에는 '큐티'라는 이름의 요크셔테리어가 한 마리 있었는데, 소풍 때문에 들뜬 내가 집을 나서면서 급하게 닫아버린 현관문에 머리를 다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사실 그때에도 죽음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었다. 다만 내가 키우던 강아지가 나 때문에 다치게 되었고, 그로 인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 슬펐다.
'유치원 버스 창문을 통해 본 울고 있던 엄마와 엄마품에 안겨있던 큐티'가 내가 감당해야 할 첫 번째 죽음의 장면이었으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나는 그 이후로도 몇 번의 죽음의 장면을 견뎌내야 했다.
훌쩍 나이 들어버린 지금, 많으면 하루에도 두세 건씩 사내 경조게시판에 부고 글이 올라온다. 직원의 조부모 혹은 부모인 경우가 대다수인데, 가끔은 직원 본인의 부고가 올라오기도 한다. 물론 예전에 이 조직에 몸담고 계셨던, 이미 퇴직하신 분의 부고가 대부분이지만, 아주 가끔은 어제까지도 함께 일하던 직원의 이름이 '본인상'이라는 이질적인 단어와 함께 쓰여있기도 한다.
당연한 죽음은 없고 모든 죽음은 슬픔이 함께 하기 마련이지만, 특히 '본인상'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그 허무함은 나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것뿐 아니라 내 주변인, 특히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가까운 주변인의 죽음의 장면을 마주하고 인정할 수 있을지, 죽음으로 가는 마지막 문을 앞에 두고 지나온 삶을 후회하게 될지, 나의 죽음의 장면은 어떨지, 나의 죽음으로 인해 감정의 동요를 겪게 될 사람은 누구일지, 그때쯤이면 내 곁에 누가 남아있을지, 나의 기일마다 나라는 존재를 기억하며 떠올릴 그 누군가가 존재할지.
그 언젠가 직면하게 될 나의 죽음의 장면에 '여한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