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어로 프로듀서 퇴사하겠습니다」
히어로를 세상으로 내보내다 보면 매번 숨이 탁 막히는 도전 과제가 생겼다. 하지만 끝장을 보고 마침내 해내고야 말 때면, 산 정상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청아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기분도 들었다. 그게 참 재미있었다. 짐작할 수 없고 안전하지 않은 게 스릴이지. 매일 같은 업무를 반복하며 정년까지 보내야 한다고 하면 조영은 아마 미쳐버렸을 것이다. 일벌레, 워커홀릭 소리를 들으며 걸어 다니는 줄자, 칼, 보살이라는 소리를 듣곤 했지만 조영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누구보다 재미가 중요한 쾌락주의자였다. 마음 한편에 재미를 추구하는 철부지 같은 생각을 품고 살아올 수 있었던 건, 회사와 히어로와 여론이 늘 손을 들어주지 않아도 조영 자기 자신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게 된다는 확신. 사람들이 내 결과물을 좋아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
히어로 프로듀서 퇴사하겠습니다, 오조
이능력자들 사이의 무능력자, 즉 이능력 미소지자로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히어로를 프로듀싱해 왔던 소설의 주인공 조영, 그 역시 어느 순간 이능력이 발현되면서 히어로다운 행동을 하게 된다.
시작은 『약한 영웅 Class 1』의 메이킹 영상이었다.
설날 연휴 『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박지훈에게 빠져 그의 필모를 정주행 하다 보게 된 메이킹 영상. 방구석에 누워 텅 빈 눈으로 핸드폰 화면만 바라보고 있던 나와는 정말이지 다른 모습.
약영 Class 1의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는 '유리창 팡팡+사자후'장면에서, 주인공 연시은을 연기한 박지훈은 머리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온몸에 거대한 힘이 가득 찬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촬영이 끝났음에도 계속되는 몰입상태에 촬영장 한쪽에 쭈그려 앉아 감정을 추스르던 그의 모습 위로 비친 내 무기력한 얼굴은 이질적이며 대조적이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몰입하게 만드는 걸까?
나는, 이렇게까지 나의 일에 몰입했던 적이 있었나?
지난날에 대한 반추는 더 큰 생각의 불씨를 만들지 못하고 금방 꺼져버린 채 다시 멈춤 없는 스크롤로 이어졌다.
며칠 후, 블로그에서 본 화려한 작품사진에 반해 방문한 공예박물관.
두꺼운 장갑을 낀 채 한 줄 한 줄 철사를 엮고 구슬을 끼워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금기숙 작가의 모습. 무엇이 작가의 창작욕구를 불타게 하는 건지, 나는 내가 만들어낸 결과물을 위해 이토록 몰입했었던 적이 있었는지, 아니 애초에 결과물이라는 걸 만들어 낸 적이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부끄럽지만 딱히 하고 싶었던 것이 없었던 학창 시절이었다. 그저 '대학만 가면 달라지겠지'라는 게으른 생각으로 공부했고, 변화를 꿈꾸며 들어간 대학에서는 그 당시 유행하던 과목을 전공으로 선택했으며, 졸업을 앞둔 시점엔 어떤 일을 내 직업으로 삼겠다는 목표 없이, 그저 '이름 있는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기계적으로 자소서를 작성했다.
사람들이 알만한 회사에 입사하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이 많은 불합격 통지서를 받고 나서야 겨우 작은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고, 그렇게 시작한 업무는 조금씩 범위를 늘려가며 몇 번의 이직을 거쳐 9년이라는 경력으로 마무리하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공무원이다. 내일 당장 내가 출근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이 바로 내 자리에서 내 일을 맡아서 할 수 있는 곳, 물론 반대로 다른 사람이 출근하지 않더라도 내가 그 사람의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그야말로 언제든지 완벽하게 교체가 가능한 부품으로 일하고 있다.
업무의 연속성이 없는 이런 완벽한 대체 가능한 조직 속에서 내 목표를 세우고, 열정을 피우기란 쉽지 않다. 원래 그 자리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티도 나지 않는 작은 부품 하나에 불과한데, 대체 얼마나 대단한 목표를 가지고 온몸의 힘을 쥐어짜 몰두할 수 있단 것인가?
일을 이상하게 배웠다는, 나의 지난 9년을 송두리째 부정하며 불량 부품쯤으로 폄하하는 그 말을 듣고서도 어찌 몰입할 수 있을까?
나라는 사람이 녹아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적어도 나의 시간과 고민이 나의 것으로 새겨지는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이곳에는 내가 몰입할 만한, 몰입할 수 있는, 몰입하고 싶은 일이 없다. 일을 이상하게 배워먹은 나로서는 언제든지 교체 가능한 이 거대한 톱니바퀴 안에서 더 이상 힘을 쥐어짜 낼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누구나 별을 품을 수 있다고 책은 말하지만, 내게도 해당되는 말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