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 내려다보면 모든 게 꽤나 아름답거든요

Sign of the Times_ Harry Styles

by 검은토끼

영화를 보러 가기 전 독서 어플을 켰다. 2022년 2월부터 3월까지였다. 「프로젝트 헤일메리」와 함께한 시간.

처음엔 쉽게 진도를 빼기 어려웠다. 700페이지 가까이 되는 분량, 이해가 가지 않는 과학 용어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요동쳤다. 몰입을 방해하는 나의 무지를 이겨내기 어려웠다. 이 프로젝트의 끝, 책의 마지막까지 오는 데에는 한 달 남짓 걸렸다.

스크린에 펼쳐진 광활한 우주의 모습은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이후 계속 마음에 맴도는 건 영화 속 노래, Sign of the Times였다.




Just stop your crying, it's a sign of the times
Welcome to the final show
Hope you're wearing your best clothes
You can't bribe the door on your way to the sky
You look pretty good down here
But you ain't really good

이제 그만 울어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에요
이 마지막 무대에 온 걸 환영해요
당신이 가장 멋진 옷을 입고 왔길 바라요
하늘로 가는 문 앞에선 어떤 뇌물도 통하지 않아요
여기에 있는 당신의 모습은 꽤 멋져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죠



자신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 채 눈을 뜬 그레이스. 머리카락은 어느새 길어져 있고, 함께 우주선에 탄 파일럿과 엔지니어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이다. 동면의 시간 동안 아무렇게나 자라난 머리카락과 수염을 정리하고, 동료의 장례를 치러주고, 외로이 기억의 조각을 맞춰나가는 그레이스.


대세와 반대되는 주장으로 비웃음을 산 아웃사이더 과학자에서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과학을 가르치는 학교 선생님. 그리고 인류의 생존을 위해 아스트로파지 전문가라는 과학자의 옷을 입고 편도행 헤일메리호에 탑승한 그레이스. 조각조각 맞춰지는 그의 기억의 파편을 따라 나 역시 헤일메리호에 함께 올라탄다.


지구 멸망이라는 악몽 속에 내던져질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사명감으로 프로젝트에 자원했다 생각하는 그레이스는 사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헤일메리호의 탑승을 거부한 겁쟁이였다. 어느 누가 끝이 뻔히 보이는 결말에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던질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레이스는 이미 이렇게 된 이상 지구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한다.




We never learn, we been here before
Why are we always stuck and running from
The bullets? The bullets?

우린 깨닫지 못하고, 항상 같은 자리에 있죠
우린 왜 늘 과거에 갇혀 도망치기만 하는 걸까요
우리에게 쏟아지는 저 총알들, 상처로부터 말이에요




언제부턴가 나는 지난 상처에 매몰되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같은 오늘만 맴돈다.


오늘과 다른 내일을 꿈꾸면서도, 막상 내일이 되면 오늘과 다를 바 없는 생각과 행동으로 하루를 보낸다. 달라진 게 없기에 지난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마음에 새겨진 흉터를 끊임없이 바라보며 그때의 그 감정으로 다시 들어가 나를 그렇게 만든 상대를, 상황을 미워한다. 무기력한 한숨과 무력한 마음이 만든 좁고 짙은 나이테에 나를 가두고 점점 더 안으로 숨어버린다.




Just stop your crying, it's a sign of the times
We gotta get away from here, we gotta get away from here
Just stop your crying, it'll be alright
They told me that the end is near
We gotta get away from here

이제 그만 울어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에요
우리는 이곳을 벗어나야 해요, 우리는 이곳에서 벗어나야만 해요
그만 울어도 돼요, 다 괜찮아질 테니까요
사람들은 이제 끝이 다가왔다고 말해요
우리는 이곳에서 멀리 벗어나야만 해요




왜 나는 쉽게 털어내지 못하고 부정적인 감정에 오랫동안 가라앉아 매번 같은 오늘을 사는 걸까?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팽이처럼 어지럽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은 비겁하다. 언젠가는 잊힐 일이니 그때까지는 마음껏 괴로워하라는 말 같아서.

영원한 것은 없으니 나의 이 괴로움도 끝이 오긴 할 것이다. 그 끝에 온전한 내가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Just stop your crying, have the time of your life
Breaking through the atmosphere
And things are pretty good from here
Remember everything will be alright
We can meet again somewhere, somewhere far away from here

이제 그만 슬퍼하고, 인생의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요
대기권을 뚫고 날아오르는 거예요
이 위에서 내려다보면 모든 게 꽤나 아름답거든요
기억해요. 모든 건 결국 다 괜찮아질 거라는 걸
우린 언젠가, 이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어디에선가 만나게 될 거예요




'혼자 살아남은 우주 탐험가'에서 '괴상한 룸메이트와 함께 사는 남성'이 된 그레이스는 로키에게 지구의 다양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바다와 파도, 숲과 나무, 폭죽과 도시의 야경. 갇혀 있는 헤일메리호 안에서는 영상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모습들. 서로에게 기대어 지구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레이스와 로키의 뒷모습. 거대한 우주 한복판에서 의지할 데라고는 서로뿐인 그들의 우정이 별처럼 반짝인다.


각자의 행성을 지키기 위해 먼 여행을 떠나온 그레이스와 로키, 함께 온 동료들이 모두 사라져 홀로 남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겨운 시간을 보냈을지 상상도 못 하겠다. 그런 외로운 시간을 견디고 만난 둘이라서, 로키와 그레이스는 서로가 서로의 행성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했던 것일까?




헤일메리 프로젝트의 총책임자가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책에는 없었다. 원래 대본에도 없는 장면이었으나 현장에서 추가되었다고 한다. 계획에 없었던 노래라고 하기엔 가사가 마치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노래 같았다. 정해져 있는 끝과 벗어날 수 없는 지금의 자리와 그럼에도 괜찮아질 내일.





흔히들 이런 말을 한다. 우주에서 보는 지구 안의 나는 너무나 작은 먼지 같은 존재여서, 내가 가진 상처와 번뇌와 고민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지나간 상처가 다시금 할퀴고 지나갈 때면 광활한 우주를 유영하는 그레이스와 로키를 떠올려야겠다.


위에서 내려다본 내 흉터는 별처럼 반짝일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