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후의 기본 덕목, 줄 서기

by 검은토끼

눈꺼풀 위로 밝은 빛이 스며든다. 타닥타닥 강아지의 발소리가 방 안을 돈다. 밤새 틀어놓은 전기장판 때문에 등짝이 뜨끈하다. 눈도 뜨지 못한 채 머리맡에 놓아둔, 어제 마시고 남은 물을 들이켠다. 목이 아직 따끔따끔하다. 코는 꽉 막혀있다. 독감 기운이 아직 몸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이불 안으로 다시 들어갈 순 없다. 오늘 아침, 메가박스의 특정 지점 1회 차 상영부터 <왕과 사는 남자>의 오리지널 티켓 -그것도 쭈그려 앉아 손으로 물장난하는 단종오빠 박지훈의 모습이 담긴- 을 한정 수량 배포하기 때문이다.



목적 달성을 앞둔 내 앞에는 어떠한 방해물도 있을 수 없다. 컨디션 난조? 이건 간절한 사람이 댈 수 있는 핑곗거리가 되지 못한다. 토요일 아침, 평소 출근 시간보다 일찍 일어난 나는 빠른 준비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옆 동네로 향한다.



오리지널 티켓을 손에 넣겠다는 목적 하나로, 예매해 둔 1회 차 상영시간보다 무려 한 시간 십오 분이나 일찍 와 영화관 앞 버스정류장에 내렸다.



사람이 없다. 설마 내가 처음은 아니겠지. 조용하지만 빠른 걸음으로 영화관 앞으로 이동한다. 역시나, 세상에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참 많다. 굳게 닫힌 영화관 문 앞에는 이미 스무 명 정도가 줄을 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정도면 양호하다. 1인 최대 2매, 1회 차 상영관 최대 인원이 100명인데 설마 100장은 들어왔겠지. 그럼 내 앞사람들이 두 장씩만 가져가도, 안전빵이다.'라는 생각으로 자연스레 줄에 합류하여, 오리지널 티켓 굿즈 소진 현황을 검색한다.



아직 아홉 시도 되지 않았는데, 목동은 벌써 소진이다. 지독한 사람들.



아홉 시가 넘어가자,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다. 나의 뒤로 줄이 길게 이어지는 그 시점,

이때부터다. 내가 줄 서기를 즐기기 시작하는 시점.



사실 줄 서기가 마냥 쉬운 건 아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뻘쭘하게 받아내야 하고, '이 작은 하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줄을 서야 하나'라는 자조적인 생각을 이겨내야 한다. 이렇게 어렵게 얻어낸 그것은, 그것이 만약 물건일 경우, 시간이 지나면 대체 어디에 처박혀있는지조차 모르게 사라져있다. 들어간 시간과 노력을 생각하면 가성비는 제로, 아니 마이너스에 가깝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줄 서기를 즐기는 이유 중 하나는, 내 뒤로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하고, 그렇게 시작된 사람들의 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것을 볼 때, 그때 느끼는 묘한 벅참 때문이다. 나의 뒤로 한 명씩 사람이 늘어나는 걸 보면서 나의 행동이 쓸데없지 않다는 걸, 나와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이 많다는 걸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되면서, 나의 줄 서기가 헛되지 않다는 확신을 느끼게 된다. 이는 지리멸렬한 기다림을 버텨낼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사실 이 불공평한 세상 속에서, 별다른 재능이 없는 내가, 몸을 움직이고 시간을 쏟는 것만으로도 내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너무 공평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이렇게 줄을 선다.


생각해 보면 줄 서기를 즐기는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오픈런을 하거나, 혹은 줄을 서서 오랜 시간 기다린다는 것에 대해 큰 불편함이 없었던 것 같다. 유명한 맛집에 가려고 한두 시간 일찍 출발하고, 일찍 출발한 만큼 줄을 서서 기다려서까지 무엇을 먹는다는 것에 대해 불만이 딱히 없었다. 막연히 그냥 먹는 걸 좋아해서 그런 거겠지 생각해 왔던 것들이, 이제야 설명이 되는 것 같다.

그렇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무언가의 지독한 덕후였고, 덕후의 수많은 덕목 중 가장 기본인 ‘줄 서기’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독하게 단련시켜 왔던 것이었다.



중학교 시절, 반 학생 모두가 HOT에 미쳐있을 때, 나는 구석에서 혼자 젝키를 좋아했다. 그냥 단순히 좋아하기만 한 건 아니었고, 그 나이 때 학생이 가진 열정과 힘과 시간과 돈을 다해 진심으로 좋아했었다. 콘서트에 갈 거라고 은행 앞에서 밤을 새워 줄을 서고(이때만 하더라도 제일은행에서 콘서트 티켓을 구매할 수 있었다!), 사인받을 거라고 수업을 째고 팬 사인회 장으로 이동해서 또 줄을 서고, 공개방송이 있는 날엔 무대 가까이서 보겠다고 어디서든 줄을 섰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줄 서기와 기다림은 그 뒤로도 빵집, 맛집, 콘서트 굿즈 구입, 놀이기구, 길거리 주전부리 등등 대상만 다를 뿐 계속되었다.



나 혼자만 줄을 서야 했었다면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앞과 뒤에서 나와 함께 해 준 수많은 덕후들이 함께 있었기에 나의 줄 서기도 가능했다. 같은 목표를 바라보고, 그 목표를 향해 기다리는 순수한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진 덕후들과 말없이 느끼는 연대감과 덕심. 그것이 바로 나를 지금까지 줄 서게 한 동력이 아닐까?



혼자 서서 한참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다 보니 시간은 빨리 간다. 오십 분 정도 흘렀을까, 드디어 내 차례가 다가왔다. 어플을 열고 예매 바코드를 화면에 띄우고 조심스레 이름을 말한다. 직원 손에 들린 내 오리지널 티켓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비닐 포장에 반사된 빛이 잠깐 내 눈을 찌른 것 같기도 하다. 강가에 앉아 손을 뻗어 강물을 흘려보내는 단종오빠의 처연한 모습이, 드디어 내 손 안에 들어왔다.



두 장 예매할 걸 하는 잠깐의 후회와 내 앞에서 티켓이 소진되지 않은 것에 감사하며 얕은 웃음을 띠고 왕사남 3차 관람을 위해 이동한다. 티켓을 향한 줄은 아직도 길게 늘어져 있다. 여기 있는 모두의 손에 티켓이 쥐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미소를 보낸다. 마스크에 가려 전해지진 않지만.



인생의 반 이상을 덕후로 살아왔다. 대가 없이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갖춰야 하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순수한 마음이 아닐까?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마음을 이어가고 싶다.

그리고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서로의 앞뒤에서 말없이 같은 자리에 서 있는 무언가의 덕후로 오래오래 남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