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다,라는 맛을 잃어버린 것 같을 때

가면의 레시피, 식탁 위로 남은 목소리

by Roselle

정영욱 시인의 #결국해내면그만이다 라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다.


어디선가 아름답다의 어원이 나답다에 있다는 내용을 읽었다.

름이라는 단어는 나를 의미하기도 한다고.

"나다움이 무엇인가요?" 누군가가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당신의 시선에서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


요즘 나는 내가 나답게 살고 있는지 생각한다.

'아름답다 = 나답다.'라는 구절을 마주한 순간,

그동안 내가 놓치고 있던 무언가를 찌르는 것 같았다.


나는 꽤 당당한 사람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에는 남들보다 신중했고, 먼저 나서기보다는 상황을 살피는 아이였다.

남의 눈치를 보고 스스로를 감추는 게 버릇처럼 몸에 배어 있었던 것 같다.

조금 달라진 건 청소년기 즈음.

양말 하나까지 정해진 교복,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규칙, 모두가 같은 걸 해야만 안전하게 넘어가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점점 반대로 움직였다.

남들이 맞춘 리듬에 발을 억지로 올리느니 차라리 혼자 걸어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사람들은 나를 두고 ‘세다, 억세다, 기가 세다’ 같은 말을 붙였다.

사실 나는 세상을 향해 쎄 보이고 싶었던 게 아니라, 그저 내가 숨 쉴 구멍을 찾고 싶었던 건데.


한때는 염세적이기도 했다.

나를 비추는 세상은 불친절했고, 사람들은 배신과 실망을 거듭했으며, 불만과 불신으로 내 안을 가득 채우던 시간들.

그 시절이 지속되면서, 내 얼굴은 미소보단 미움을 표했고 매일이 작은 감옥이었다.

분노를 표출하면서 순간적으로 통쾌함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결국 그 어둠이 나를 갉아먹는 것 같았다.

‘이렇게만 살아가면 내 청춘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겠구나.’

그래서 벗어나야겠다고, 어떻게든 달라져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그 후로 정말 피나는 노력을 했다.

행복하지 않아도 웃었고 긍정적인 말을 찾았다.

힘들어도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때로는 철없는 듯 웃어넘겼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니 나도 어느새 가면을 잘 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건 내가 원했던 변화였는지도 모른다.

어디서든 잘 웃을 수 있고, 사람들 앞에서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가끔은 묘하게 씁쓸함이 불어온다.

나를 지켜주던 ‘당당함’이나, 부조리에 맞서던 ‘고집스러움’이 점점 가려지고 있다는 걸 느낄 때가 있다.


특히 지친 날이면 그 가면조차 버겁다.

웃음을 이어갈 힘이 없을 때는 다시 까칠해지고 예민해진다.

한숨이 절로 새어 나오고, 부정적인 말이 불쑥 튀어나온다.

그러면서 나는 또 자책한다. ‘내가 이렇게 흔들리는 사람이었나?’ 하고.


일상은 언제나 만족스러울 수 없다.

직장에서는 직급과 직책과 상관없이 실망스러운 동료들을 마주하기도 하고, 좁은 우물 안에서 잘난척하는 이들을 부끄럽게 쳐다보기도 한다.

대화의 결이 맞는 친구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

언제부턴가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줄어들었고, 그러다 보니 나다운 대화를 할 수 없는 날들이 길어졌다.


게다가, 조직의 일원이 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많은 타협을 요구했다.

나는 당당하게 맞서던 목소리를 갖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세상의 불합리 앞에서 외치던 말들을 점점 속으로 삼켰다.

처음에는 "조금 더 지켜보자"였는데, 나중에는 "어차피 바뀌지 않아"라는 체념으로 바뀌어 있었다.

욕심이 있었다.

더 나은 성과, 더 빠른 성공,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분명 있었다.

그래서 한계를 뚫을 것처럼 달려들다가도 번번이 벽에 부딪히면서, 나는 조금씩 순응하는 법을 배워버렸다.


기대했던 사람들에게서 실망을 겪고, 존경했던 이들에게 상처를 받으면서, 사람에 대한 신뢰도 무뎌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크게 실망하지도 않는다.

상처가 쌓이면 굳은살이 되어 더는 아프지 않게 되는 것처럼,

기대하지 않으면서 그저 "다 그럴 수 있지" 하고 넘기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무뎌지는 대신 이해가 조금씩 자리를 차지했다.

예전 같았으면 날을 세웠을 상황에서도, 지금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넘긴다.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고. 사는 게 다 그렇지"라고.


그 이해 속에 안쓰러움이 묻어있는 걸까.

세상에 맞서던 내 목소리가 결국 세상에 길들여졌다는 사실,

내가 견뎌낸 건 어쩌면 성숙이 아니라 순응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그게 가장 아프다.


그럴 때면 식탁 앞에 앉아 나를 바라본다.

하루 동안의 기분과 사건들이 마치 오늘의 반찬처럼 차려져 있다.

어떤 날은 짠맛이 강하고, 또 어떤 날은 씁쓸한 채소가 얹혀 있고, 가끔은 달콤한 디저트도 따라온다.

나는 그날그날의 음식을 받아들이며 산다.

그리고 깨닫는다.

삶이란 결국 내가 차려내는 식탁이라는 것을.


내가 웃으며 만든 음식도, 한숨을 쉬며 던져놓은 음식도 모두 내 몫이다.

남이 대신 끓여준 게 아니다.

그러니 지금의 나 또한 ‘나답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가면을 쓰고 웃는 나도, 예민하게 부정적인 나도, 성공을 욕망하다 무기력에 잠긴 나도,

결국은 내가 요리한 맛의 한 조각일 테니까.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생각하려 한다.

‘아름답다 = 나답다’라는 말은, 언제나 빛나고 화사해야 한다는 뜻이 아닐 것이다.

때로는 순응과 체념의 맛도, 무뎌짐의 식감도 들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내 식탁에서 나온 음식이라면,

그 또한 내 삶의 레시피 속에 반드시 필요한 재료일 것이다.




뉴욕일보 칼럼니스트 작가 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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