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탁은 어느새 우리의 작은 철학관이 되었갔다

밥상에 남은 말들, 삶에 스며든 흔적들

by Roselle

태어나 보니 이미 21개월 된 오빠가 있었다.

그는 제주도의 겨울, 신혼여행에서 생겨난 아이였고 추석을 열흘 앞둔 가을날에 태어났다.

유교적 전통이 깊었던 30년대생 할아버지의 환갑에 장손으로 태어난 그는, 존재만으로 평생의 효도를 다했다.

90년대 흔하디 흔한 두 살 터울의 동생으로 내가 세상에 왔을 때, 노부모는 딸이라는 이유로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까맣고 못생긴 아기를 품에 안은 젊은 부모는, 그 사실만으로도 다시 행복했을 것이다.


고작 두 살도 안 된 나이에 동생이라는 존재를 맞이한 오빠는 질투라곤 몰랐다고 한다.

기억에는 없지만 먹을 수도 없는 애기한테 본인 과자를 나눠줬단다.

애기가 갓난 애기를 팔베개를 해주는 사진을 보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조그만 아이가 나름 남자라고 여자 아이를 무척이나 챙겼고, 수학여행이라도 가는 날엔 언제 돌아오냐며 펑펑 울었다더라.


그렇게 우리는 늘 같은 밥상을 마주했다.

같은 학교를 다니며 공부도 운동도 함께한 친구였고, 부모님께 혼날 때는 같은 편에서 작당모의하는 공범이었고, 대학생 때는 같이 알바도 하며 출퇴근을 함께 한 동료였다.

그리고 지금, 독립한 어른이 되어 공유하는 것은

부모님의 식탁 대신 작은 하우스메이트의 저녁상이다.

거실 테이블 위에 안주거리를 놓고,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보호자이자 동맹이다.


요즘 우리의 대화 주제는 꽤 다양하다.

오빠는 역사와 경제를 이야기하고, 나는 심리학 수업에서 들은 이야기를 보탠다.

"이런 일이 있었어"로 시작한 대화는 언제나 "결국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저녁 밥상은 그렇게 우리의 작은 철학관이 된다.

술잔 부딪히는 소리 사이로 오가는 대화는, 뉴스보다 생생하고 책 보다 현실적이다.


3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안팎으로 결혼 공격을 받고 있지만,

이때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아쉬운 선택을 할까 싶어 연애가 신중해지는 요즘이다.

많은 사람들이 연인이 없으면 외로울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왜 연애를 안 하냐"며 내가 틀린 것처럼 질문하기도 하지만,

내가 나를 생각한 것보다 더 나는 외롭지 않았던 듯하다.


아마도 친한 친구가 있어서일까.

많은 이들이 말한다. 오빠랑 그렇게 지내면 연애 못한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나는 찾지 못했다.

잘 보이려 노력하지 않고, 남을 욕해도 뒤탈이 없으며, 싫은 것을 좋아하는 척 맞춰주거나

나와 다를 환경이나 배경을 유추하려 살피지 않아도 되는 친구를 대신할 존재.

취향도, 가치관도, 살아가는 방식도 참 다르지만, 그 어떤 친구와도 가질 수 없는 유대를 나누는 사람.


나의 호적메이트는 그렇게 내 곁에서 늘 버팀목이 되어왔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어디론가 흩어져 사라지지 않았다.

때로는 내 안에 남아 오래 발효되었고, 때로는 조미료처럼 나라는 사람의 맛을 바꾸어놓는다.

그렇게 내 삶의 레시피를 만들어간다.


여전히 저녁 식탁은 거창하지 않지만,

그 평범한 식탁에서 우리는 늘 다른 세상을 꺼내놓곤 한다.

우리의 성장기를 기록한 앨범이고, 서로의 생각이 부딪히는 실험실이며, 매번 다른 답을 내놓는 철학관이다.

어쩌면 우리는 밥을 먹으면서 서로를 자라게 한 걸지도 모른다.


덕분에 나는 여전히, 누군가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일을 좋아한다.

그 어디든, 대화가 있는 식탁

언제나 삶을 조금 더 깊게, 조금 더 맛있게 해 준다.



뉴욕일보 칼럼니스트 작가 송지

https://m.newyorkilbo.com/44771


#호적메이트 #소울메이트 #친구 #가족

#일상에세이 #공감에세이 #감성에세이 #인문학

#브런치작가 #칼럼니스트 #작가송지

#생각의식탁 #삶의레시피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