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된 연락처가 늘어날수록, 마음은 더 비어갔다

관계에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by Roselle

예전의 나는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사람을 모았다.
연락처 목록은 천 명이 넘었고, 누구를 만나든 번호를 저장하는 건 거의 반사에 가까운 습관이었다.

마치 내가 잃어버리지 않아야 할 관계의 증거물처럼 쌓아갔다.
그땐 그게 사회성이었고, 넓은 인간관계가 나를 더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다.

누구든지 나를 부르는 자리엔 빠짐이 없었고, 수집하듯 새로운 얼굴들을 끊임없이 맞이했다.
사람이 많아야 외롭지 않다고 믿었던 때였다.
아니, 외로운지조차 모르고 살던 때였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여느 때처럼 바쁘게, 술약속 세 개를 연달아 돌다 집에 돌아가는 길,

취기가 적당히 떨어진 이유인지 혼자 걷는 걸음이 외롭게 느껴졌다.

시끌벅적한 목소리, 술잔 부딪히는 소음, 공간을 메우는 음악 메들리..

모든 소리가 일시정지된 듯 오래된 기억처럼 꺼졌다.

"내가 정말 힘들 때, 누구에게 전화를 걸 수 있을까?"

휴대폰 연락처 앱을 열어 이름들을 천천히 스크롤했지만, 정작 떠오르는 얼굴은 한두 개도 되지 않았다.
이름은 많은데, 마음은 없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사람을 모은 게 아니라, 연락처만 쌓아두고 있었던 거라고.

그 뒤로 1월 1일이 오면, 나는 조용히 작은 연례행사를 치르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날 버킷리스트를 세우고, 새로운 목표를 적는다.
나는 연락처를 정리했다.

한 해 동안 서로의 삶에 발자국 하나 남기지 못한 관계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조용히 덜어내는 훈련을 했다.
그동안 서로의 생을 단 1초도 스쳐 지나가지 않은 관계들, 의례적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문자를 보내는 데조차 손이 가지 않는 번호들, 미련만 남은 이름들을 천천히 지워 나갔다.

처음엔 100명을 지우는 것도 어려웠다.
그다음 해에는 200명,
그다음 해에는 300명.
해가 바뀔수록 지워야 하는 숫자는 늘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가벼워졌다.

사람을 잃는 것이 아니라,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과정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내가 짊어지고 있던 건 인간관계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강박이었을지도 모른다.

정리하면서 떠오른 장면이 있다.

어떤 친구는 늘 나를 불러내기만 했다.
“너는 왜 먼저 연락 안 해?”라며 시답잖은 서운함을 반복하던 사람.
나는 매번 맞춰 주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를 필요한 사람이니까 곁에 둔다’는 느낌이 깊게 자리 잡았다.
어쩌면 그 사람에게 나는 단지 구멍 난 시간을 메꾸는 용도였던 건지도 모른다.
서로를 이해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혼자 있기 싫어서 붙잡아 두는 관계.
지우는 데 오래 걸렸지만, 막상 지우고 나니 마음 한 구석이 시원했다.

또 어떤 사람은 항상 도움을 청하는 쪽이었다.
자기 힘으로 들기엔 너무 무거운 짐을 아무 말 없이 던지듯 건네는 사람들.
그 무게를 몇 번이고 대신 들어주다 보니, 정작 내 짐은 들 곳이 없어 바닥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 관계도 다시 마주하기 어려 우리 스스로 도망치듯 멀어졌다.

그리고 지금, 내 연락처에는 60명이 남아 있다.
이름 하나하나가 꽤 선명한 사람들이다.
몇 달에 한 번씩이라도 얼굴을 보고, 생일을 핑계로 문자 한 통 건네며,

경조사엔 말없이 나타나 서로를 기억해 주는 사람들.
대단한 인연은 아니지만, 사소한 정성이 쌓인 인연들.

지금의 나는 이렇게 단조로보 투명해진 인간관계가 좋다.

복잡했던 마음의 잡음을 줄이고 나니 사람의 목소리가 명확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가 좋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내 마음의 방을 북적이게 하지도, 텅 비게 하지도 않는 숫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서로를 더 잘 보기 위한 조명 같은 것이지 않을까.


인간관계는 서로의 거리를 알아차리는 감각에서 시작된다.
가까워지면 마음이 흐려지고, 멀어지면 정이 말라버린다.
적정 거리를 기민하게 감지하고, 그 거리를 부드럽게 조절하는 능력이야말로 관계의 핵심이다.

우리는 종종 가까움을 진심이라고 착각하고, 멀어지는 것을 무심함이라 오해한다.
내 시간을 쪼개고, 내 마음을 내놓아야 애정이라 믿는다.
그러다 보니 필요 이상으로 애쓰고, 불필요하게 상처받는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거리가 있어야 상대가 더 잘 보이고, 오히려 존재의 윤곽이 또렷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때 ‘넓은 인맥’이 자산이라고 여겼던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사회적으로 관계의 양은 더 이상 힘이 되지 않는다.

네트워크의 넓이는 정보의 양이 될 수는 있어도 마음의 질이 될 수는 없다.
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깊게 알고 지내는가'가 관계의 가치를 결정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는 결국 가까움이 아니라 선명함으로 이어지는 거다.

사는 동안 우리는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잃는다.
때로는 좋았던 인연도 흐릿해지고, 때로는 가까웠던 관계도 한순간에 멀어진다.
그게 자연스러운 일인데, 우리는 자꾸만 억지로 붙잡으려 한다.
잃는 걸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공백이 생기는 게 무서워서.

하지만 그 공백은 오히려 나를 살리는 공간이었다.
그 안에 숨을 들이쉴 자리가 생기고, 생각을 놓아둘 탁자가 생겼다.
내 마음의 식탁이 사람들로 넘치지 않을 때, 비로소 나를 위한 한 자리가 생겨났다.

세상을 살다 보면, 누구도 나의 빈틈을 완전히 채워주지 못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누구도 나를 온전히 구해주지 않고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관계에는 정말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가까워서 흐려지지 않게, 멀어져서 잊히지 않게.
그 거리 위에서 우리는 서로를 가장 사람답게 바라본다.

덜어낸 만큼 여백이 생기고, 그 여백에 삶의 레시피가 하나씩 놓였다.
균형, 호흡, 그리고 나를 지키는 거리.
그게 내가 배운 인간관계의 가장 단순하고도 실용적인 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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