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의 레시피와 개인의 입맛 사이에서
사회초년생 티를 벗어난 요즘, 친구들을 만나면 꼭 나오는 말이 있다.
“요즘 애들은 말이야.”
고작 서른 중반에 들어서는 때, 아직도 스스로를 젊다고 생각하면서 어느새 누군가를 ‘요즘 애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광고회사에서 선임 직함을 달았을 때, 신입사원 6명을 키운 적이 있었다. 직장 생활을 일찍 시작한 탓에 나이로 치면 고작 4~5살 차이 수준이지만, 나와는 확연하게 다른 친구들이 있었다. 정중하게 보내야 되는 메일을 작성해 본 적이 없어 ChatGPT의 도움을 받고, 기획력을 기르기 위해 브랜드 조사를 맡겼더니 AI로 30분 만에 해오는 친구. 물론 도구를 활용하는 능력도 중요하다. 문제는 편리함이 아니라, 그 시간을 줄인 자리에서 무엇을 배우지 못하게 되는가이다.
사무실 밖도 다르지 않다. 사무장이 된 승무원 친구는 말한다. 요즘은 선배보다 후배가 더 무섭다고. 실수를 지적하면 아무 말없이 감사팀에 보고가 들어간다고. 그래서 실수를 해도 혼낼 수 없는 분위기라고 한다.
그날 ‘요즘 애들’ 이야기를 꺼낸 건 대리 직급의 친구였다. 후임에게 이런저런 업무를 지시했더니, “그건 제 업무가 아닌 것 같아서요.”라는 말과 함께 퇴근했다는 것. 누가 옳은가에 대한 답은 없지만, 이런 반응에 마냥 웃을 수도 없다.
우리가 신입이었을 때는 어땠더라.
그땐 업무 범위를 따지지 않았다. 아니, 따질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편이 맞겠다. 시키면 하는 게 당연했고, 먼저 나서는 게 성실함이라 배웠다. 그것이 옳아서라기보다, 그것이 사회의 문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회사원이든, 공공기관이든, 서비스업이든, 현장직이든 비슷하다. 요즘은 일을 선 긋듯이 나눈다. 자신의 업무 범위는 명확하고, 퇴근 이후는 철저히 개인 시간이다. 회식은 선택이고, 부당하다고 느끼면 바로 문제 제기를 한다.
논리적으로 틀린 건 없다. 오히려 더 건강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묘하게 불편하다. 우리가 잘못 배운 걸까, 아니면 뭔가 놓치고 있는 걸까.
오래된 레퍼토리
“요즘 애들 버릇없다는 말은 조선시대부터 있었대.”
농담처럼 이야기하지만, 이 문장의 역사는 훨씬 길지도 모른다. 우리 부모가 우리에게, 그들의 부모도 그 자식에게 그랬을 것이다.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를 보며 혀를 차는 장면은, 아마 인류가 세대를 이어온 것만큼이나 오래된 풍경일 것이다.
그 ‘버릇없다’고 손가락질받던 세대가 결국 다음 세대의 기성세대가 된다. 그리고 어김없이 같은 말을 꺼낸다. 버릇없다고 자란 사람들이 버릇을 가르치는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세상은 세대를 거듭할수록 망해가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다.
결국 ‘요즘 애들’이라는 문장은 시대를 갈아입으며 반복되어 온 오래된 레퍼토리인 셈이다
어쩌면 이건 단순히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의 충돌 때문은 아닐까.
우리는 버티는 법을 먼저 배웠다
나는 전후 세대가 아니다. 굶주리지도 않았고, 디지털 문명 속에서 태어났다. 그럼에도 우리는 강하게 자랐다.
부모의 말은 쉽게 거스를 수 없었고, 선생님에게 말대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잘못하면 체벌이 존재했고, 어른과 아이의 위계가 분명했다. 회사에서는 상명하복을 배웠고, 부조리가 존재하기도 했지만 그것을 버티는 것도 사회성이라고 여겼다.
지금의 세대는 다르다. 체벌은 금지를 넘어 명백한 폭력이 되었고, 조직은 수평을 지향하며 직급 대신 이름을 부른다. 감정은 존중받아야 하며, 부당함은 바로 문제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의 발달심리학자 다이애나 바움린드(Diana Baumrind)는 양육 방식을 크게 세 가지로 분류했다.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권위주의형, 규칙은 있되 이유를 설명하는 권위있는형, 제한이 거의 없는 허용형. 기성세대는 첫 번째에 가까웠고, 우리 세대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이를 지나왔다. 그리고 지금은 세 번째에 더 가까워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방식이 옳은가의 문제는 아니다. 각자 다른 문법을 배웠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는 적응을 먼저 배웠고, 누군가는 질문을 먼저 배웠다.
버티는 사회의 배경
그래도 우리가 왜 그렇게 버텼는지는 알아야 한다.
한국은 남북전쟁 이후 세계 최빈국 중 하나가 되었다. 1960년대 초 한국의 GDP는 100달러 안팎에 불과했고, 쌀이 부족해서 밀가루를 보급하던 시절이었다.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새마을운동 등을 거치며 대기업이 생겨났고, 도시가 개발되었고, 산업의 성장 속도를 끌어올리는 만큼 노동 강도는 높아졌다.
개인의 희생은 국가 발전의 당연한 전제였고, 집단의 성장이 곧 생존과 직결되었다. 그 결과 전쟁의 폐허에서 반세기 만에 선진 경제권에 진입한,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냈다.
사회학에서는 이를 ‘압축적 근대화’라고 설명한다. 서구가 수 세기에 걸쳐 경험한 산업화·도시화·민주화를 한국은 수십 년 안에 연속적으로 겪었다. 놀라운 속도였지만, 그만큼 소화되지 못한 영역이 남았다. 개인의 권리, 감정의 언어, 삶의 질 같은 것들은 뒤로 미뤄졌다.
그 공기가 부모 세대의 몸에 새겨졌고, 우리는 그 안에서 자랐다. 굶주림은 사라졌지만 ‘열심히 하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압박은 여전했고, 밥상 위의 침묵으로 전해진 감각이었다.
도덕적 언어를 입은 말들
질문은 여기서 시작된다.
집단을 위해 달려온 사회에서 개인이 강조되는 사회로의 이동.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을까.
요즘은 ‘개인주의’라는 말이 많이 쓰인다.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개인의 자율성·선택권·독립성을 중시하는 가치관이다. 개인의 선택과 책임을 존중하며, 각자의 삶은 각자가 책임진다는 전제.
이는 이기주의(egoism)와 혼용되기도 하는데, 모두 개인의 이익에 중점을 둔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이기주의는 타인의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비도덕적인 태도로 나타날 수 있다는 차이가 있다.
정의대로라면, 개인주의는 민주주의를 토대로 긍정적인 가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은근히 삭제하기 시작할 때, 문제는 시작된다.
이기주의는 노골적이어서 경계하기 쉽다. 하지만 개인주의는 도덕적 언어를 입고 있다. 자유, 존중, 경계. 그 언어 앞에서 우리는 입을 다물게 된다. 틀린 말이 없는데,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드는 것처럼.
그 허전함이 오래가면, 이런 질문을 낳는다. 각자가 자기 몫만 챙기는 사회에서, 아무도 챙기지 않는 빈자리는 누가 메울 수 있을까.
흔히들 ‘각자도생’이라는 말을 쓰고는 한다. 글자 그대로 ‘각자 스스로 살 길을 도모한다’는 뜻이다. 본래는 전쟁이나 흉년 같은 극단적 상황에서 쓰이던 말이다. 공동체가 기능하지 못할 때 등장하는 표현이다.
조직은 나를 책임지지 않는다. 국가는 내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러니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판단은 현실적이다.
하지만 이 인식이 기본값이 될 때, 사회의 온도는 조금씩 달라진다. 먼저 손 내미는 일이 계산의 대상이 되고, 관계는 손익을 따지게 된다. 각자도생이 당연해질수록,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서로에게 기대지 않으려 한다.
균형을 찾는 식탁
우리는 더 성숙해진 걸까, 아니면 단지 덜 책임지게 된 걸까.
‘요즘 애들’을 탓하기 전에, 우리 세대가 물려받은 집단주의의 상처와, 그 반작용으로 꺼낸 개인주의의 방향을 함께 봐야 하지 않을까.
그 반복되는 레퍼토리를 알면서도, 우리는 오늘도 그 문장을 꺼낸다. 어쩌면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방식이 흔들리는 것 같아서 생기는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버티는 게 미덕이라고 배운 사람에게, 버티지 않는 사람의 모습은 낯설고 불편하다. 그래서 ‘요즘 애들’이라는 말로 편하게 정리해 버린다.
삶의 레시피는 극단적일 필요가 없다.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할 필요도, 개인을 위해 집단을 해체할 필요도 없다. 단지 균형이 필요할 뿐이다.
그 균형에는 완성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그 균형을 찾는 중이고, 그 과정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오래된 문장을 꺼내 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생각의 식탁은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맛에 길들여져 왔는지, 앞으로는 어떤 맛을 선택할 것인지 천천히 음미해 보는 자리다.
뉴욕일보 칼럼니스트 작가 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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