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판이 너무 많은 시대

멈춰 있는 청춘에 대하여

by Roselle

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친구를 만났다. 사회생활에 지쳐 퇴사한 지 2년째 접어든 친구. 어떻게 지내냐는 물음에 “아무것도 안 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말에 나는 왜 그렇게 많은 말을 쏟아냈을까.

유년기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낸 친구였다. 영어가 한국어보다 편했고, 그림을 잘 그렸고, 노래도 곧잘 했고, 수공예가 취미였다. 그러나 대부분이 취미로 그쳤을 뿐, 특기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노력하지 않아도 출발선이 다른 재능이 있다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친구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모티콘 작가는 어떤지, 영어 자격증은 어떤지, 대학원 진학은 어떤지, 환경을 바꿔보는 건 어떤지. 뭐라도 시작해 보라고. 적지도 많지도 않은 30대의 시간이 아깝지 않으냐고.

돌아오는 답은 늘 비슷했다. 그 정도로 잘하는 건 아니라는 말, 네이티브에 비해 애매하다는 말, 부모님께 손 벌리기엔 부담스럽다는 말. 모두 현실적인 이유였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점점 목이 쉬어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깨달았다. 나는 그에게 조언한 게 아니라, ‘멈춰 있는 상태’를 공격하고 있었다는 걸. 그리고 더 불편한 사실 하나. 나는 잠깐, 내가 잘하고 있다는 착각을 했다.

적어도 나는 움직이고 있으니까. 퇴사를 했지만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고, 취미를 직업으로 발전시켰고, 캘린더가 꽉 차도록 시간을 쪼개 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남의 정체 위에 세운 자신감은 얄팍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멈춰 있다는 상태


이 장면은 개인적인 에피소드만은 아니다.

요즘 한국 청년들의 풍경을 보면 ‘일하지도, 배우지도, 구직하지도 않는 상태’, 이른바 NEET(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족의 수가 상당하다. 한국직업능력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일을 하지도 구직을 하지도 않고 “그냥 쉬었다”라고 답한 청년이 7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이 풍경은 묘하게 아이러니하다. 뉴스에서는 대기업 구조조정 기사가 쏟아지는데, 동시에 자영업자들은 “사람을 구할 수가 없다”라고 말한다. 일할 청년이 부족하다는데, 청년 실업률은 여전히 높다. 일할 자리는 있다는데, 정작 원하는 자리는 없고. 직업이 없는 청년은 많은데, 인력이 부족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찾는 아이러니.

이 아이러니는 단순히 ‘일자리가 없다’로 설명되지 않는다. 부족한 것은 ‘일자리의 수’라기보다, 서로가 원하는 자리의 조건인지도 모른다. 기업은 경력직을 선호하고, 공채는 줄어들고, 문턱은 높아졌다. 대학 진학률은 76%가 넘고, 스펙은 과잉이며, 경쟁은 포화 상태이다. 한편 청년들 역시 계산한다. 힘들고 위험하고 오래 버텨야 하는 일은 피하고, 경력으로 ‘예쁘게’ 남는 일을 원한다. 3D 업종은 기피 대상이 되고, 예전 세대처럼 “일단 들어가서 버텨본다”는 선택은 점점 낯설어진다.


이를 개인주의라고 말할 수도 있다. 끈기가 부족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선택의 비용이 너무 커진 사회의 반응일지도.

NEET라는 단어는 차갑다. 그 안에는 계산과 좌절, 체면과 기대가 섞여 있다. 기회비용이 높아진 사회에서 무작정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어설픈 선택을 하지 않기 위해 멈춘 결과일 수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멈춰 있는 사람만 불안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취업자들 역시 끊임없이 이직을 고민하고, 지금 경로가 맞는지 의심한다.


메뉴가 너무 많은 시대

마치 메뉴를 고르는 일 같다.

우리는 분명 20~30년 전보다 더 잘 산다. 동네만 나가도 세계 각국의 음식을 맛볼 수 있고, 배달 앱을 켜면 선택지는 끝이 없다. 과거에는 특별한 날에만 먹던 음식이 이제는 평일 저녁 메뉴가 되었다. 식문화는 다양해졌고, 식당의 선택 폭은 넓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만족감은 그 선택의 폭과 비례하지 않는다.

메뉴는 많아졌는데 결정은 더 어려워졌다. 후기는 넘쳐나는데 확신은 줄어들었다. 내가 고른 게 최선이 아니었던 건 아닐까, 더 나은 선택이 있었던 건 아닐까, 우리는 식사가 끝난 뒤에도 비교를 멈추지 못한다.

선택이 많아질수록 틀릴 가능성도 함께 커진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우리를 더 조심스럽게, 더 계산적으로 만든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직업은 다양해졌고, 정보는 넘쳐나고, 비교는 실시간이다. SNS 속 타인의 성취는 늘 더 빠르고 화려하다. 그래서 덜 만족하고, 더 쉽게 흔들린다. 어설픈 선택 하나가 경로 전체를 망칠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누군가는 멈춘다. 잘못 들어가느니 차라리 대기하겠다고.

그리고 누군가는 달린다. 멈추는 순간 뒤처질 것 같아서, 혹은 사라질 것 같아서.


결국 우리는 둘 중 하나다.

움직이지 못해 불안하거나, 멈추지 못해 불안하거나.


멈추면 사라질 것 같아서


나는 후자에 가깝다.

가만히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쓸모 없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확신이 없어도 일단 지원하고, 준비가 덜 됐어도 시작부터 해본다. 이게 용기인지, 불안의 다른 이름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건, 멈춰 있는 사람을 보면 설명하기 어려운 초조함이 올라온다는 사실이다. “저러다 정말 아무것도 안 되면 어떡하지.” 그 문장의 주어는 사실 타인이 아니다. 언제든 멈출 수 있는 나 자신이다.

그래서 나는 말을 많이 한다. 조언이라는 형식을 빌려 내 불안을 밀어내려고 한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계산한다.

‘그래도 나는 뭔가는 하고 있으니까.’


이 비교는 조용하다. 우리는 서로를 대놓고 경쟁하지 않는다. 대신 속도로 재단한다. 누가 더 바쁜지, 누가 더 많은 걸 시도하는지, 누가 더 빨리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지. 그리고 그 속도 위에 자존감을 올려둔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멈춰 있음과 움직임은 방향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멈춰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이 있고, 쉼 없이 달리면서도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

멈춰 있음이 실패가 아니듯, 달리고 있음도 성공은 아니다. 둘 다, 이 선택 과잉의 시대를 버티는 방식일 뿐이다.

지금의 청춘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건 실패 그 자체보다 ‘멈춰 있음’이라는 상태, 방향 없는 정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누군가의 멈춤을 공격하게 만든다.


잠시 주문을 미루는 법


나는 여전히 움직이겠지만, 누군가의 멈춤을 함부로 처방하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나의 달림을 미화하지 않기로 한다.

메뉴가 많아진 시대에 진짜 필요한 건, 더 많은 선택지가 아니라 자신의 입맛을 아는 일이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견딜 수 있는지, 무엇을 포기해도 괜찮은지. 인기 있고 잘 팔리는 메뉴가 아니라, 내가 소화할 수 있는 메뉴를 찾는 일.

그리고 그걸 알기 위해서는 때로 주문을 잠시 미루고, 메뉴판을 내려놓고, 물 한 잔을 마시며 생각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질문 앞에서, 잠깐 숨을 고르는 용기. 남의 속도 대신 나의 온도를 살피는 태도.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단지 멈추지 않기 위해 가고 있는가.


이 질문을 식탁 위에 올려둔 채로, 오늘의 선택을 한다.
완벽한 메뉴는 없겠지만, 적어도 내 입맛에 맞는 한 끼를 고르기 위해.

그게 지금 내가 배우고 있는, 삶의 레시피다.





뉴욕일보 칼럼니스트 작가 송지

http://m.newyorkilbo.com/44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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