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표에서 벗어나는 용기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두 가지를 챙긴다. 선물과 안부.
그리고 그 안부는 이상하게도 늘 같은 방향으로 흐른다. 잘 지내냐는 말로 시작하지만, 대답이 길어질 틈은 없다. 요즘 회사는 어떠냐, 연애는 하냐, 결혼은 언제 하냐, 아이는 낳을 거냐, 집은 샀냐, 대출은 얼마나 받았냐.
명절 식탁에서 오가는 말들은 대체로 '상태 확인'에 가깝다. 무슨 일이 즐거웠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사는지, 요즘 무엇이 나를 살게 하는지는 잘 묻지 않는다.
대신 그 사람의 삶이 정상 범주 안에 들어 있는지를 확인한다.
명절은 한국 사회의 작은 축소판 같다. 밥상 위에 올라오는 건 전, 갈비, 잡채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기준표가 함께 올라온다.
"너는 어디쯤 와 있니?"
"너는 늦지는 않았니?"
"너는 평균에서 벗어난 건 아니니?"
그리고 우리는 그 질문이 무례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딘가 익숙하게 웃어넘긴다. 그게 이 사회에서 가장 오래된 예의처럼 굳어져 있으니까.
버티고 있는 사람들
나는 한동안 '주류의 삶'을 잘 따라가던 사람이었다. 4년제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고, 회사에 들어가고, 야근을 해서라도 성과를 내고, 더 큰 프로젝트를 따내는 게 목표였다. 바쁘게 사는 게 멋있는 줄 알았고, 바쁘니까 살아있는 줄 알았다.
광고회사라는 곳은 특히 그렇다. 숨을 쉴 틈이 없고, 하루가 아니라 분 단위로 일이 쏟아지고, 밤을 새우는 게 이상하지 않다. 처음엔 그게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했다. 내가 뭔가를 만들고 있다는 느낌,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있다는 느낌. 내가 버티면 버틸수록 더 중요한 일을 맡게 되는 구조. 그게 일종의 인정 같았으니까.
그렇게 일에 빠져 살던 어느 날, 정말 아무렇지 않게 사무실이 너무 편해진 날이 있었다. 기분이 너무 이상했다. 바쁜 게 익숙한 사람에게 편함은 ‘휴식’이 아니라 ‘불안함’이다. 나는 모니터를 보면서도 자꾸 주변을 보게 됐다. 동료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선명하게 드는 생각이 있었다.
‘아, 여기 사람들은 살고 있는 게 아니라 버티고 있구나.’
조직 안에서 사람들은 잘 버틴다. 그게 한국 사회에서는 미덕처럼 굳어져 있다. 힘들어도 참고, 괴로워도 참고, 어쩔 수 없으니까 참고. 그렇게 버틴 시간은 어느새 경력이 되고, 연차가 되고, 직급이 된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버틴 시간이 삶의 질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걸. 익숙해진 업무, 어제도 했고 오늘도 하는 일, 나보다는 회사를 위해 쏟는 시간. 그 속에서 '나'는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취미는 오랜 추억에 머물렀고, 약속은 지키지 못하는 일이 빈번했고, 집안일은 할 시간조차 없었다. 운동은 고사하고 때를 맞춘 식사, 4시간 이상의 잠은 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삶을 “열심히 산다”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출퇴근만 반복하는 삶을 '바쁘게 산다'라고 할 수 있는 걸까. 회사 일만 하면 ‘열심히 산다'라고 할 수 있을까.
똑같이 야근을 하고 똑같은 프로젝트를 붙잡고 있어도 모두가 성장하는 건 아니다. 와중에도 사람들의 욕심은 다 다르다. 나는 욕심이 많았고, 상사가 컨펌해도 내 욕심에 몇 번이고 수정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과연 그렇게 일을 해서 남는 게 뭘까. 내 회사도 아닌데, 일개 직원인데. ‘건강’과 맞바꾼 성과급 몇 푼과 이력서 한 줄이 그만큼이 가치가 될까.
그날 이후로 나는 묻기 시작했다. 나는 지금 주류의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주류의 삶처럼 보이는 소진을 살고 있는 걸까.
평균에서 벗어나지 마
그래서 나는 30대에 들어서서 과감히 퇴사를 결심했다.
경기는 점점 안 좋아지고, 취업난이 심각해진 때. 그럼에도 예상외로 주변 사람들은 퇴사를 말리지 않았다. 야근수당도 없고, 연장근무수당도 없고, 오로지 휴일근무만이 대체휴무를 받을 수 있었던 내규. 퇴사 후 대체휴무로만 두 달 치 급여를 받았다. 우리나라 휴일이 그렇게 많았던가. 나만 자각하지 못했을 뿐, 그 정도로 심각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 주어진 회복 시간은 두 달 정도. 대체휴무로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기간이 지나니 어김없이 들려왔다.
“그래서 이직은 언제 할 건데?”
명절에 듣던 질문들과 닮아 있다. 결국 핵심은 하나다. "평균에서 벗어나지 마."
한국 사회는 이상할 정도로 '평균치'를 사랑한다. 그 평균치는 대체로 누군가가 만든 시간표다. 몇 살엔 취업, 몇 살엔 결혼, 몇 살엔 출산, 몇 살엔 집, 몇 살엔 승진. 그걸 따라가면 마치 인생이 안전해질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시간표를 따라가고 있는 사람들 중에도 불행한 사람이 많다는 걸. 그리고 그 시간표에서 벗어난 사람들 중에도 의외로 잘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는 걸.
나는 그 평균치를 믿지 않기로 했다. 중학생이 유튜버가 되어 돈을 벌고, 40대에도 초산을 건강히 하며, 정년퇴직 후에도 취업하는 시대에 ‘평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평균이란 건 결국, 너무 많은 사람들을 한 번에 묶어두기 위해 만든 편리한 선일뿐이다.
그래서 나는 대학원에 입학했다.
나에게 대학원은 단순히 학위를 위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건 일종의 '리셋'에 가까웠다. 똑같은 환경, 한정된 사람들, 비슷한 업무, 그것들의 반복은 나를 성장시키는 게 아니라 소진시킨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학부 때보다 훨씬 다양한 공부를 하고 있다. 단순히 지식을 채우는 공부가 아니라 견문을 쌓는 공부. 시야를 넓히고, 다채로운 사람들과 교류하며, 그동안 습관처럼 끄적이던 글을 이제는 칼럼으로 제대로 써나가고 있다.
주류의 시간표를 그대로 따라갔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것이다. 주류의 삶은 대체로 ‘빠르게 안정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그 안정이 내가 나를 잃는 방식으로 오는 거라면, 그건 안정이 아니라 정지라고 생각했다.
나를 아는 것부터
주류의 시간표는 사회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사랑과 결혼에서도 똑같이 등장한다.
나도 한때 결혼 생각을 했다. 20대 후반이 되고, 하나둘씩 결혼이라는 선택을 할 때 나도 비슷한 마음이 있었다. 연봉이 괜찮고, 가정환경이 모나지 않고,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적당히’ 결혼할까 했다.
그때 내가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은 “결혼을 하고 싶은가?”가 아니었다.
“나는 지금 나를 얼마나 알고 있는가.”
결혼은 두 사람이 만나 200%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서로를 깎고 맞추고 변화시키며 둘이서 100%를 맞춰가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결혼은 필연적으로 어떤 부분의 ‘포기’를 포함한다.
그 포기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능해지려면, 최소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했다. 그런데 그 시기의 나는 나를 잘 모르고 있었다. 적당한 프레임에 신경 쓰고, 연봉으로 내 가치를 매기며, 미래의 목표 또한 ‘직장'에 국한되어 있었다.
적어도 나는 알아야 했다. 내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내려놓을 수 있는지.
그걸 모르는 상태에서 주류의 시간표에 맞추기 위해 결혼을 선택하는 건 너무 큰 도박처럼 느껴졌다.
주류의 삶이라는 레시피
'주류의 삶'은 대부분 누군가가 만든 레시피다. 그 레시피는 나쁘지 않다. 대중적인 맛이 있고, 실패할 확률이 낮고, 남들에게 설명하기도 쉽다. 하지만 그 레시피가 내 입맛에 맞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명절이 되면 이 비교는 더 시끄러워진다. 남들의 삶이 너무 크게 들리고, 내 목소리는 작아진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조용히 자기 삶을 의심한다.
늦은 것도 아니고, 뒤처진 것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다. 나는 단지 다른 레시피로 요리하고 있을 뿐이다. 그 레시피는 조금 더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가 나를 잃는 방식으로 완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설거지는 결국 내가 한다
명절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 식탁 위에는 남은 음식이, 마음에는 남은 말들이 있다. 어떤 말은 괜찮은 척해도 오래 남는다.
명절 식탁에서 사람들은 아무도 묻지 않는다. 지금 배가 고픈지, 정말 먹고 싶은 게 있는지, 요즘 삶이 어떤 맛으로 굴러가고 있는지.
주류의 삶이란 결국 ‘다 같이 같은 반찬을 집는 법'을 배운 사람들의 세계다. 그게 예의처럼 굳어지면, 다른 반찬을 집는 사람은 눈치가 된다.
하지만 삶은 단체 급식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고기가 맞고, 누군가에게는 채소가 맞고, 누군가에게는 아직 밥이 필요하지 않은 계절이 있다. 중요한 건, 선택의 결과는 결국 각자에게 남는다는 사실이다.
주류의 시간표를 따라가면 인정은 빨리 올지 몰라도, 그 선택의 설거지는 결국 내가 해야 한다.
남들이 정해준 속도로 취업하고,
남들이 가르쳐준 방식으로 일하고,
남들과 같은 타이밍에 결혼하고,
남들과 비슷하게 집을 사고,
그렇게 살았는데도 마음이 비어 있다면, 그건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애초에 내 몫이 아닌 식탁을 차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명절에서 듣는 질문들 앞에서 내 삶을 변명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확인하기로 한다.
지금 내 식탁에 올라간 것들 중에서, 정말 내가 올린 건 얼마나 되는지.
누가 차려준 상은 그럴듯하다. 그럴듯해서 더 위험하다.
남들이 다 먹는 메뉴를 따라먹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입맛이 뭔지 잊는다. 배는 부른데, 이상하게 마음이 허기진 채로.
그래서 내 레시피에는 앞으로 한 가지 원칙을 추가하기로 한다.
“삶은 ‘정답 맞히기’가 아니라 ‘내 입맛 찾기’라는 것.”
명절은 결국, 한 해에 두 번씩 돌아오는 리마인더이다.
내가 아직도 남의 식탁에서 내 몫을 찾고 있는 건 아닌지.
뉴욕일보 칼럼니스트 작가 송지
http://m.newyorkilbo.com/44919
#퇴사 #대학원생
#일상에세이 #공감에세이 #감성에세이 #인문학
#브런치작가 #칼럼니스트 #작가송지
#생각의식탁 #삶의레시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