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도 편식이 있다

우리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에 대하여

by Roselle

‘남존여비’

며칠 전 저녁 식탁에서 나온 단어다. 낯설지는 않지만, 요즘에는 쉽게 들을 수 없는 말이다.

“할머니, 요즘은 세상이 바뀌었어요. 여자가 하늘이에요.”

나는 웃으며 농담처럼 말했고, 이런 반응이 익숙한 듯 할머니도 웃었다. 그리고 한 마디가 더 날아왔다.

“그래도 여자가 너무 나서면 못 써.”


각자의 세계에는 질서가 있다


우리 할머니는 1930년대 생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전쟁을 겼었고, 어려운 시절에 다섯 자녀를 키우며 살았다.

할머니에게 국민학교 졸업은 꽤 자랑스러운 이력이다. 지금은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이지만, 그 시절에는 여자가 학교를 다니는 것 자체가 흔하지 않았다. 한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고, 교육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기회가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할머니의 세계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다.

남자는 바깥일을 하며 돈을 벌고, 여자는 집안일은 한다.

아들은 집안의 대를 잇고, 딸은 출가외인이다.

지금도 흔히 남편과 아내를 ‘바깥양반’, ‘집사람’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낡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그 시절에는 그것이 당연한 상식이었다. 사회 전체가 그렇게 움직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집 밥상에는 아직도 익숙한 장면이 있다. 아버지나 오빠가 물을 찾으면 나는 밥을 먹다 말고 물을 떠다 줘야 하고, 밥상을 치우는 것도 설거지를 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여자들 몫이 된다.

아직 오빠도 미혼이지만, 결혼 이야기는 늘 내 쪽으로 먼저 향한다. 남자는 조금 늦어도 되지만, 여자는 애를 낳아야 한다는 이유다. 이젠 그냥 웃으며 알겠다고 답한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과일을 깎았다.

‘과일을 예쁘게 깎아야 예쁜 딸을 낳는다’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애가 칼을 들고 있는 것부터가 걱정될 법 한데, 그때의 나는 용케도 다치지 않고 곧잘 깎았다.

여덟 살쯤 되었을 때는 이미 혼자 채소를 썰고 볶음밥을 해 먹을 수 있었다. 그게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집에서 자연스럽게 배우는 일 중 하나였다.

물론 그 덕에 야무진 손을 가질 수 있었달까.


나는 할머니의 그런 사고를 비난하지 않는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틀려 보일 수도 있지만, 그때는 맞다고 믿었던 삶이다. 그 시대가 옳다고 믿는 방식 속에서 살아오셨을 뿐이다.


상식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사회학에는 ‘문화적 재생산(cultural reproduction)’이라는 개념이 있다. 한 시대의 가치와 규범이 사람들의 삶을 통해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과정을 말한다. 이 과정은 거창한 교육이나 제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래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편견’이라고 느끼지 않는다. 그저 ‘상식’으로 받아들인다. 어릴 때부터 먹어온 음식이 입맛이 되는 것처럼.


시선은 처음 생각했던 곳으로 돌아간다


짧은 치마를 입고 길을 걸으면, 나는 늘 몇 개의 시선을 함께 데리고 다닌다. 특별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옷차림 하나로 누군가의 판단 속에 들어가는 순간을 종종 경험한다.

외국에 나가보면 옷차림이 훨씬 다양하다. 몸의 형태도 다양하고, 미의 기준도 생각보다 넓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기준은 꽤나 또렷하다.

여자는 하얗고 마른 게 미의 기준이고, 화장은 자연스러워야 하며, 옷차림은 지나치게 튀지 않아야 한다. 옷은 무채색이 가장 잘 팔리고, 가방은 블랙이나 브라운이 기본이 된 이유다.


나는 짧은 치마와 하이힐을 즐겨 신는다. 머리는 생머리도 반곱슬도 아닌 곱슬머리고, 피부는 까무잡잡하다. 화장을 조금만 해도 ‘연하게 해라’라는 말을 듣고, 이미지가 세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어느 날 대학원 동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스타일이 너무 튄다며, 조금 더 평범하게 하고 다니면 좋아하는 남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나는 잠깐 웃었다.

패션을 좋아하고 꾸미는 것도 즐기지만,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옷을 입는 건 아닌데.

그 친구의 말이 특별히 악의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현실적인 조언이었을지도.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타인의 삶을 하나로 정리해 버린다. 옷차림이 튀면 뒷말이 돌고, 외모로 성격을 짐작하고, 직업과 학력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공무원을 고리타분할 것 같고, 변호사는 깐깐할 것 같고, 의사가 하는 말은 다 정답이고, 음악이나 미술을 전공하면 예민할 것 같다는 식의 단편.

그래서 어떤 행동을 해도 처음의 판단은 좀처럼 바뀌기 어렵다.


편견은 언제나 상식의 얼굴로 나타난다


문제는 시대가 바뀐 뒤에도 그 방식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은 달라졌는데, 판단의 기준은 예전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 오래된 기준은 새로운 세상을 볼 때도 여전히 작동한다.


이것이 편견의 출발점이다.

충분한 근거 없이 특정 대상에 대해 갖는 판단.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판단이 오랜 경험에서 나온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편견은 공격적인 형태보다 ‘당연한 말’의 형태로 등장한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는 개념에 닿는다.

영국의 심리학자 피터 웨이슨(Peter Wason)은 흥미로운 사실을 설명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설을 검증할 때, 그것을 ‘반박하는 증거’보다 ‘지지하는 증거’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찾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믿고 있는 생각을 확인하는 방향으로 세상을 해석한다는 이야기다.


나는 이 현상을 이렇게 이해한다.

편견이 ‘저 사람은 이럴 것이다’라는 출발이라면, 선입견은 그 출발이 하나의 틀로 굳어지는 과정이고, 확증편향은 그 틀을 계속해서 단단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이다.

세 가지는 따로 작동하지 않는다. 하나의 흐름처럼 이어진다.


한 번 ‘이미지가 세다’는 인상이 박히면, 내가 조용히 있어도 ‘저 사람은 원래 저래’가 되고, 크게 웃어도 ‘역시 거침없네’라는 말이 따라온다. 어떤 행동을 해도 처음의 판단을 강화하는 증거로 읽힌다. 내가 무엇을 하든 이미 결론이 정해진 채로 해석되는 것이다.


할머니의 세계도 다르지 않다. 수십 년 동안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기준 속에서 살아왔다면, 그 기준을 지지하는 장면들만 더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렇게 쌓인 경험은 점점 더 단단한 확신이 되고, 그 확신은 자연스럽게 다음 세대로 전해진다. 편견이 문화적으로 재생산되는 방식도 어쩌면 이런 모습일지 모른다.


문제는 이 과정이 대부분 악의 없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할머니도, 그 대학원 동기도, 어쩌면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세상을 보고 있을지 모른다.


같은 세상을 보면서도 각자 다른 맛을 느끼는 이유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할머니의 세계와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생각보다 멀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할머니는 그 시대의 기준 속에서, 그 기준이 맞다는 증거를 보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의 기준 속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대는 분명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확신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생각보다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어릴 때부터 먹어온 음식이 입맛이 되는 것처럼, 사람이 살아온 시대와 환경은 생각의 맛을 만든다. 같은 세상을 보면서도 각자가 전혀 다른 맛을 느끼는 이유다.


그래서일까. 가끔은 이렇게 생각해 본다.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정답을 찾는 일이라기보다, 서로 다른 접시를 바라보는 일에 조금 더 가까운 것 아닐까 하고.

누군가는 담백한 음식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향이 강한 요리를 좋아한다. 어떤 접시는 소박하고, 어떤 접시는 화려하다. 중요한 건, 그 접시가 누구의 취향으로 만들어졌는 가다.


삶이라는 식탁 위에는 정해진 하나의 레시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완성된 수많은 요리들이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접시를 섣불리 평가하기보다 가끔은 이런 마음으로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아, 이런 맛도 있구나 하고.




뉴욕일보 칼럼니스트 작가 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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