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씹어야 맛이 나는 것들

무엇을 보느냐보다 무엇을 남기느냐

by Roselle

드라마, 영화, 만화, 예능, 대중음악, SNS.

콘텐츠 소비에 적극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콘텐츠는 취미이자 약속이고, 때론 친구가 되기도 한다.

반복되는 출퇴근길 북적거리는 거리를 나만의 레드카펫으로 만들어주는 음악, 가만히 앉아 있지만 익스트림한 감각을 더해줄 영화, 혼자 있어도 덜 외롭도록 만들어주는 드라마와 예능, 어른도 동심으로 돌아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해주는 만화까지.

콘텐츠는 이제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다. 감정의 밀도를 조절하고 하루의 결을 바꾸는 방식에 가깝다. 어쩌면 우리 삶에 영양소만큼이나 필수적인 요소인지도 모른다.


우리 집 TV는 양말 건조대가 되었다


나는 볼록한 브라운관 TV 시절에 태어났다. 그때는 TV를 ‘바보상자’라고 불렀고, 지금처럼 콘텐츠가 다양하지도 않았다. 채널은 단순했고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대부분의 뉴스는 TV를 통해 접했고, 짜인 편성표에 따라야 하는 시청은 선택보단 습관에 가까웠다.

우리 집은 그중에서도 더 단순한 편이었다. 아침 뉴스, 9시 뉴스, 월요일 저녁의 <우리말 겨루기>, 일요일 저녁의 <도전 골든벨>. 가끔 토요일 오전 영화 소개 프로그램 정도가 전부였다. ‘투니버스’, ‘OCN’과 같은 케이블 채널은 없었고, KBS1·2, MBC, SBS, EBS. 다섯 개의 지상파 채널이 전부였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자연스럽게 TV와 거리를 둔 채 자랐다. 빠져들 만한 것이 없어서였는지, 아니면 그게 당연한 환경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게 TV는 시간을 채우는 대상이 아니었다. 틀어져 있으면 보는 것이 아니라, 볼 것이 있을 때만 켜는 물건에 가까웠다.


성인이 되고 독립하면서 TV는 완전히 필요 없는 물건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집에는 있어야 한다는 부모님의 말에 IPTV를 설치했지만, 여전히 나는 리모컨이 두 개인 이유를 헷갈리고, 전원 버튼을 두 번 눌러야 켜지는 방식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결국 우리 집 TV는 켜지지 않는 채로, 양말을 말리는 건조대가 되었다.


TV는 한때 중심이었지만, 더 이상 중심이 아니다.


OTT, 선택이 습관이 된 시대


지금은 OTT의 시대다. 방송국 프로그램을 실시간으로 플랫폼에서 보고, 영화는 개봉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집에서 본다. 플랫폼은 더 이상 유통 창구가 아니라 제작자가 되었고, 오직 그 안에서만 소비할 수 있는 콘텐츠가 사람을 모은다.

나는 미국드라마 <FRIENDS> 때문에 Netflix에 가입했고, 포털에서 무료로 보던 KBO리그 중계권이 이동하면서 TVING을 구독했고, 통신사 혜택으로 WAVVE까지 사용하고 있다. TV를 거의 보지 않았던 사람치고는 꽤 많은 서비스를 이용하는 셈이다.


이러한 변화는 ‘편해졌다’는 수준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콘텐츠에 시간을 맞추지 않는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싶은 시간에, 원하는 만큼 소비한다.

선택권과 동시에 책임도 생겨났다. 무엇을 볼지, 얼마나 볼지, 언제 멈출지. 이 모든 것이 개인의 선택이 되었다. 그래서 요즘의 콘텐츠 소비는 종종 과잉의 형태를 띤다. 한 편만 보려고 시작했던 드라마를 보다 밤을 새우기도 하고, SNS나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끊임없이 다음 것을 제시한다.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 같지만, 오히려 멈추기 어려운 중독에 빠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계속해서 플랫폼 속으로 들어간다.

그 안에는 늘 다음 이야기가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흥행하는 영화와 버텨야 하는 산업 사이


최근 2년 만에 ‘천만영화’가 탄생했다. 조선시대 단종의 이야기에 픽션을 더한 역사물 <왕과 사는 남자>는 개봉 50일 만에 1500만 관객을 넘어서며 역대 개봉작 3위에 오르는 흥행을 기록했다.


한국 영화의 흥행이 반갑지만, 영화 업계의 분위기는 그리 밝지만은 않다. 몇몇 작품에 관객이 집중되는 동안, 상당수의 영화들은 개봉과 동시에 조용히 사라진다. 제작비는 점점 높아지고, 투자 환경은 보수적으로 변하는데, 관객의 선택은 더 까다로워졌다. 집에서 스마트폰으로 내 손 안의 영화관을 만들 수 있는 시대에, 숏폼 콘텐츠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한 달 구독료로 구매해야 하는 2시간짜리 영화 티켓은 메리트가 적은 게 사실이다.

결국 ‘흥행하는 영화’와 ‘버텨야 하는 산업’ 사이에는 간극이 생긴다. 한 편의 성공이 업계의 회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TV가 일상이었고, OTT가 습관이라면, 영화관은 여전히 ‘경험’에 가깝다. 어두운 공간, 큰 화면, 좌석을 채운 낯선 사람들, 웅장한 사운드. 영화관은 단순히 영화를 보는 곳이 아니라 감정을 공유하는 장소다.

이야기의 밀도도 다르다. 드라마나 시리즈물처럼 여러 편에 걸친 전개가 아닌, 짧은 시간 안에 이야기를 완성해야 한다. 그래서 더 집중되어 있고, 더 압축되어 있다. 그 밀도의 매력을 아는 사람은 여전히 영화를 소비한다.


다만 이제는 그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영화관을 찾든, 집에서 보든, 결국 중요한 건 ‘무엇을 느끼게 하느냐’다.


사람 자체가 콘텐츠가 되는 공간


유튜브와 스트리밍 콘텐츠는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가장 빠르고, 짧고, 즉각적이다. 몇 초 안에 시선을 붙잡기 위해 자극적인 썸네일을 만들고, 몇 분 안에 흥미를 전달하지 못하면 바로 다른 콘텐츠로 넘어간다.

이 환경에서 콘텐츠는 더 이상 ‘완성된 작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정, 일상, 생각으로도 콘텐츠를 만든다. 사람들은 완벽한 결과가 아니어도, 지금 이 순간을 ‘공유’하는 사람에게 쉽게 반응한다.


그래서 유튜브는 단순한 플랫폼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콘텐츠가 되는 공간’에 가깝다. 누군가의 하루, 생각, 취향. 그 모든 것이 편집되고 업로드되는 순간 하나의 콘텐츠가 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안에서 또 다른 삶을 본다.


나는 여전히 문장 쪽에 가깝다


사람들이 소비하는 모든 정보와 경험을 ‘콘텐츠’라고 한다. 흔히 ‘콘텐츠’를 영상물로 떠올리지만, 뉴스나 블로그 글, 강의나 리뷰 같은 정보형 콘텐츠, SNS 게시글, 댓글, 밈(meme)까지. 형태가 다를 뿐, 모두 같은 흐름 안에 있다.

다양한 OTT서비스 구독자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시청각 콘텐츠보다 텍스트 기반 콘텐츠를 더 많이 소비한다. 블루투스 이어폰은 거의 쓰지 않고, 태블릿 PC는 충전기를 꽂은 지 오래다. 음악은 카페나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걸로 듣고, 드라마나 영화 소식은 뉴스 기사로 접한다.


어쩌면 그래서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동시에, 어쩌면 그래서 아직 ‘트렌드에 가까운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형식은 달라도, 결국 콘텐츠는 사람을 향한다. 사람은 이야기를 소비하고, 감정을 나누고, 자신과 닮은 장면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위로를 받기도 하고, 이해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그냥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내가 서 있는 자리


돌아보면 나는 꽤 한쪽으로 치우친 식성을 가지고 있다. 콘텐츠 편식도 심하다.

영상보다 문장을 더 오래 붙잡고, 빠른 장면보다 느린 문장을 더 신뢰한다. 이어폰을 끼고 하루를 보내는 대신, 종이 위의 글을 따라가며 시간을 쓰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일까. 나는 콘텐츠를 소비하면서도, 늘 그 바깥에 서 있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모두가 빠르게 넘겨보는 장면들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한 문장을 고르고, 한 단락에 머무른다.

그렇다고 해서 이 흐름과 무관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상, 나 역시 같은 식탁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니까.


다만 내가 집어 드는 것들이 조금 다를 뿐이다.

자극적인 맛에 끌리는 사람, 익숙한 맛을 반복해서 고르는 사람. 나는 그 사이에서, 오래 씹어야 비로소 맛이 나는 것들을 천천히 가져다 놓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 가끔은 고민하게 된다. 나는 지금의 흐름을 따라 다른 메뉴를 익혀야 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내가 잘하는 방식으로 식탁을 채워도 괜찮은 걸까.


아마 정답은 둘 중 하나가 아닐 것이다. 새로운 재료를 외면하지 않되, 내가 만들어온 방식을 버릴 필요는 없을 테니까. 트렌드를 이해하되 휩쓸리지 않는 것, 빠른 형식을 받아들이되, 나의 속도를 잃지 않는 것. 시소처럼 유지하기 어려운 이 밸런스는 내가 풀어야 할 숙제지만, 결국 중요한 건 어떤 방식으로 이 식탁을 이어갈 것인가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문장으로 무언가를 차려내는 사람이다. 다만 이제는 그 접시가 어떤 자리 위에 놓이게 될지까지 함께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보느냐보다, 무엇을 남기느냐를 생각하게 되는 시점에서, 나는 여전히 콘텐츠의 바깥이 아니라 그 안에 서 있다.




뉴욕일보 칼럼니스트 작가 송지

https://newyorkilbo.com/45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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