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망각한 채 사는 평범한 삶이 받게될 형벌에 관한 소고
죽음을 망각하고 산 탓에 받게 될 형벌에 대하여
11살이었나, 12살이었나.
사실 어릴 때 기억이 크게 없는데, 그 중 한가지 또렷한 기억.
자려고 누워서 가만히 생각하다 보면, 덜컥 겁이 났다.
죽는다는 게.
지금 이렇게 두려워하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이 우주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은 채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는 게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힐 거 같았다.
그래서, 많이 울었다.
나는 중학교 1학년이 끝나면서부터는 누가 보지 않아도 울지 못하는 전형적인 한국 남자들의 자기검열장치를 강력하게 내재화했는데.
11살 그 때는 아직 그러기 전이었던 거 같다.
정말 많이 울었다.
동생과 늘 한 방을 썼기 때문에, 혼자서 숨죽여 울곤 했는데.
그러다가 도저히 참을 수 없겠다 싶으면 한밤중에 거실에 나와 엄마한테 몇 번을 묻곤 했다.
‘언젠가는 누구나 반드시 죽어야 하는건데. 이걸 어떡하냐고.’
엄마는 그런 나를 달래주었지만, 사실 그건 엄마가 달래준다고 달래지는 건 아닌 문제였다.
***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성인이 되고, 군대를 다녀오고, 직장을 가지고,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면서.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어릴 적 그 때처럼 죽음에 관해 소위 ‘답도 없는 문제’를 계속 골똘히 생각하는 건 사람을 굉장히 힘들게 한다는 것을.
그리고 나를 포함한 인간이라는 동물은, 힘든 걸 꽤 많이 싫어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도 점점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재밌는 걸 하면 웃고 힘든 걸 해야할 땐 힘들어하며 그렇게 살았다.
내 딴에 퍽 마음에 와닿아서, 군대있을 당시부터 일기를 적어놓곤 하던 티스토리 블로그의 소개글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었지만. 현실은 또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글귀와는 별개의 것이니까.
죽음을 망각한 생활과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옴을 의식한 생활은
두 개가 서로 완전히 다른 상태다.
전자는 동물의 상태에 가깝고,
후자는 신의 상태에 가깝다.
톨스토이가 한 말이라고 전해지는데, 이 말은 결국 오랜 시간을 건너고 건너 내가 집필한 첫 책의 한 귀퉁이에 적혔다.
하지만 아까 말한 것처럼, 난 ‘죽음’ 같은 애매모호하고 현실과는 동떨어진 그 개념과 그리 가까이 지내진 않았다. 생각해봤자 마음만 가라앉는데 뭐.
***
죽음을 겪었다.
죽음이 가져오는 가장 큰 슬픔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길지 않은 삶이라는 여정에서, 진심으로 나를 아끼고 사랑하고 자신보다 위하는 누군가를, 내가 그 무엇보다 사랑하고 애정하는 누군가를 두번 다신 만나지도 못하고,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눈을 마주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겪었다.
내가 죽지 않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그 또한 나의 ‘죽음’이다.
그와 내가 이 생에 태어나 서로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다면, 서로 두 번 다시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되는 건 그에게도, 나에게도 동일하게 벌어지는 일이니까.
그래서 내게, ‘죽음’이란 한 번이 아니라 여러번 겪어내야 하는 일이다.
내가 현실적이지 않은, 영화같고 운명같은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렇게 마음 바쳐 사랑하는 사람의 수만큼 우리는 언젠간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아빠를 떠나보낸 후, 그런 일기를 썼었다.
‘더는 온 마음을 바쳐 사랑하는 사람을 더 만들지 않는 게 낫겠다.’
***
이젠 늘 ‘죽음’을 생각한다.
아니, ‘시크릿’에서는 좋은 것만 생각해야 우주가 나한테 내가 생각한 걸 가져다주는데 죽음을 늘 생각하다니!
라고 소리칠지 모르지만.
나 스스로에게 내려진 모든 형벌과 처절한 고통은 모두 ‘죽음’을 망각하고 살아온 것 때문이었다.
톨스토이의 말이 맞았다.
내가 아무것도 모르던 20대초반 이등병 시절, 그의 글귀가 마음에 강렬한 울림을 주었던 까닭은 그거였다.
아마 내 마음 깊숙한 곳 어디 모퉁이에서는, 내가 먼훗날 죽음을 망각하고 산 탓에 받게 될 그 형벌을 알고 있었던건지도 모른다.
나는 매일 아침, 그리고 매일 저녁 죽음을 생각한다.
언젠가는 반드시 지금 내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어떨 때는 아무 감흥도 느끼지 못하고 지내는 이 모든 것들이 사라지리라.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언젠가 반드시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이들을 다신 볼 수 없는 날을 맞이하게 되리라.
이런 생각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고통과 두려움을 가져다주는지 안다.
상담심리대학원에서 펼쳤던 대부분의 책들은, 우울증이라는 주요한 병리적 심리장애를 언급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지도식을 바꾸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도록 하고, 좀 더 미래를 비관하지 말고 이런 식의 이야기들이 많이 적혀있다. (물론 이런 말들은 퍽 유용하고 충분히 옳은 이야기들이다.)
허나, 내가 피부로 겪고 느낀 것은 다르다.
인간은 그 암담하고 두렵고 무기력해지는 ‘죽음’을 시시각각 곁에 두고 살아야만 한다.
내가 보기에 그건 결국 나 스스로를 위한 최고의 마음가짐이고 삶에 대한 가장 청결하고 고귀한 태도다.
… 아, 쓰고 보니 그래서 톨스토이가 ‘신’의 상태에 비유한건가?
난 신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지만, 분명히 우리의 삶을 가장 정신적으로 윤택하게 하고 의미있게 하는 마음가짐은 죽음을 늘 생각하는 마음가짐이다.
***
음.
이럴 때가 많다.
분명 지금 떠오른 감상이라 생각하고, 그 느낌을 놓치기 싫어서 부리나케 글을 썼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이미 내가 책에다가 똑같은 감상을 써놓았던거였네.
…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인가.
아무튼.
이 모든 것이 결국 다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고 우울해지는 생각이, 우리가 늘 곁에 두고 꺼내보아야 할 가장 첫번째 생각이다.
그러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아마 나처럼 상상도 못할 엄청난 회한과 형벌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