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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따라하는 걸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라

요즘 하도 '나만의 독창성을 세워라' 이런 소리가 자주 들려서...

by 대장장이 휴
If I have seen farther, it is by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만약 내가 멀리 보았다면, 그건 내가 거인의 어깨 위에 서서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 아이작 뉴턴 -


뉴턴이 로버트 훅이라는 자신의 경쟁자에게 보낸 서신에 쓴 말이다. 이 말을 한 의도에 대해 여러 가지 논쟁이 있다. 뉴턴은 좀 '인성질 캐릭터'였던 것 같다. 로버트 훅이 풍채가 볼품없었던 것을 비꼬아서 한 말이라는 썰도 있고, 로버트 훅의 많은 아이디어를 가로챈 뉴턴이 제발 저려서 하는 이야기라는 썰도 있는 걸 보면. 뉴턴의 성격이 어땠든 간에, 분명한 것은 뉴턴은 인류 역사에서 길이 남을 큰 획을 그은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천재. 천재인 그가 저런 말을 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손에 꼽히는 천재도, 거인의 어깨에 올라탔다는 말했다는 사실을 가슴에 잘 새겨두자. 사실 저 말의 의미는, 잘 알다시피 그간 해왔던 연구들에 나도 숟가락 얹었다는 이야기다. 물론 좀 큰 숟가락을 얹은 거 같긴하다, 뉴턴은 ㅋㅋ


뉴턴도 저럴진대,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누군가가 이루어낸 것을 따라하거나 모방하는 걸 '베낀다'면서 못났다고 손가락질한다. 요리사가 다른 셰프의 음식을 참고하는 걸 탐탁치 않아 하고, 작가가 다른 작가의 글 전개를 참고하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으로서 가만히 보자면, 직장인들 또한 다른 선배나 다른 부서 동료가 쓴 보고서를 몰래 참고하되, 그 OO보고서를 참고했다는 말은 남에게 숨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건 무언가 무능력하고 못난 사람들의 행동이라고 확신하는 거 같다. 그럴 필요 없다! 어쩌면, 우리 삶은 애당초에 다 따라하는 거고, 다 모방이고 베끼는거다 ㅋㅋ 베끼는 건 못난 짓이라고, 하면 안 되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당신의 선비마인드를 좀 내려놓는 일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이 되었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따라하기'다.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 서정주 '자화상' 中 -


서정주 시인이 쓴 자화상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워낙 유명해서 많이 인용되곤 한다. 우리를 키운 건 무엇일까. 당신과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모방(이라 쓰고 '따라하기'라 읽는다.)이다. 아닌 거 같은가? 우리는 베끼는 거 말고 사실 살면서 별로 한 게 없다. 우리가 태어나서 한 거라고는 어릴 때는 엄마 아빠, 혹은 형이나 누나, 혹은 보육원 선생님, 학교 선생님을 따라하고, 자라서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나 동경하는 우상, 사랑하는 연인을 따라한 게 전부다. 나름 체계적인 과학적 근거(?!)가 있다고들 하는 정규교육과정은 사실상 그냥 따라하기 과정이다. 교육과정도 어느 나라 교육시스템을 베껴와서 따라하는 걸 껄..? 사실 우리가 자라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학습'이라는 개념 자체가 기본적으로 모방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옹알이를 하고, 걸음마를 배우고 학교에서 수학을 배우고 살아가면서 삶의 지혜를 익혀나가는 배움들은, 사실 전부 다 따라하기다. 이렇게 사는 내내 누군가가 고안해놓은 걸 베껴놓고, 갑자기 남을 따라하는 건 못난 짓이라면서 자기를 옥죄고 자책하는 걸 보면, 누군가는 황당해할 일이다. 남을 베끼고 모방하는 '못난 이'들을 싫어하는 당신이 듣기에 불편할 수도 있지만, 우리는 모두 애시당초 '프로 모방러'다. 어찌 보면, 사는 내내 베끼는 거 말곤 한 게 별로 없다니까..? ㅋㅋ 근데 이제 와서 굳이...? 모방은 나쁜 거라고, 하면 안 되는 짓이라고 새삼스럽게 생각('반성')할 필요 없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


우리가 '찐이다.'라고 인정해주는 '창조'의 어머니가 바로 우리가 잘하는 '따라하기', 즉 모방이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듯이,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다. 숱한 모방과 베끼기가 결국 언젠가 우리의 영혼과 만나 창조라는 결과물을 잉태한다. 모방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창조하는 법을 배울 것인가. 정말 태초에 생물 하나 없던 지구에서 최초의 동식물이 탄생하는 것처럼 멋들어지는 '無에서 有로 가는' 창조를 바라는거라면, 미안하지만 그런 창조는 아마 100년 내로는 정말 어려울지도 모른다. 조승연 작가가 글쓰기에 대한 강연을 한 적이 있다. 그 강연에서 그는, 글쓰기를 할 때 거장들의 글 전개 구조를 마치 고급 장난감인 것처럼 여기고 가져놀아라고 말했다. 그말인즉슨, 지금까지 이름을 떨치는 유명한 거장들의 글쓰기 프레임과 전개구조를, 모방해라는 이야기다. 작가가 되고 싶은 많은 사람들은 습작을 한다. 왜? 그 문체에 깃든 많은 것들을 본받아 따라하고 싶어서. 필드에서 뛰는 프로 작곡가들이 가장 많이 하는 일은 영화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바다를 보며 내 영감과 악상을 떠올리는 게 아니다. 그 대신 프로작곡가들은 레퍼런스 곡(작곡할 때 참고로 삼을 곡)을 열심히 찾는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곡들 중 정말 절대다수는 아주 오래 전 어느 나라에선가 만들어졌던 곡의 비트메이킹이나 리프 멜로디 진행, 코드진행 등을 가져다 쓴다. 뭐 표절 논란이 많으니 악기 소리도 바꾸고 아주 일부만 가져다 쓰기도 하고, 수많은 곡을 조금씩 섞어서 레퍼런스 삼아 쓰기도 하는 것 같지만, 레퍼런스 곡에서 일정 파트를 모방해서 따라만든다는 것은 명백하다. 아무 것도 모르는 내가 들어도 가끔 레퍼런스곡이 뭔지 떠오르는데 뭐... 진정한 창작의 대표주자인 것 같은 작곡도, 집필도 모두 거장들의 창조물을 참고하고, 필요하면 모방도 한다!


그렇다고 이게 비난할만한 일인가?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과거의 누군가가 발명하고 발견한 그 무언가를 베끼고 모방하지 않고 살아가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가 발견하고 창조해낸 모든 발명과 발전들을 모방하고 가져다쓰고 베끼지 않아야 한다면, 우리는 불을 처음 발견한 원시인과 똑같이 시행착오와 오랜 시간을 쏟아부어서 불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가 굳이 그럴 이유가 있을까. 물론 우리가 남이 한 걸 그대로 베껴서 그걸로만 살아가는 건 아쉬운 일이다. 남이 만든 무언가를 양분 삼아 나만의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 모사품으로 날 규정하고 내 정체성으로 삼는다면, 그건 분명 아쉽다. 하지만 작정하고 '내가 그 사람의 모사품이 되겠다'는 심정으로 베끼고 따라하는 게 아니라면, 모방은 필수적인 과정이지 못났다고 손가락질 할 일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모방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요즘 다들 못난 짓 취급받는 '따라하기'는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누가 당신에게 모방하고 베꼈다고 비난하지 않을테니, 메시나 박지성처럼 드리블을 해라고 하면 당신은 그걸 베낄 수 있을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처럼 글을 쓰라고 하면 당신은 그걸 따라할 수 있을까. 임재범이나 나얼처럼 똑같이 창법을 베껴서 노래를 불러도 된다고 하면, 당신은 그걸 그대로 따라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일이다. 우리는 언제나 '학습'이라는 이름의 '모방', 즉 따라하기에 많은 노력과 시간을 쏟지만 그게 제대로 되는 경우는 정말 드물다. 복싱장에 가면 스텝에 한 세월, 잽('원'이라고들 한다.)에 한 세월, 스트레이트('투')에 한 세월이다. 간단한 동작 하나를 따라하는 데도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든다. 며칠 전에 UFC 선수 맥그리거와 포이리에의 경기가 있었다. 발목 골절로 이슈가 된 것 같은데, 사실 나는 맥그리거가 올해 초 1월에 포이리에와 치뤘던 경기가 더 기억에 남는다. 그 경기에서 맥그리거의 실패를 보면서, 나는 '모방의 어려움'을 느꼈었다. 맥그리거는 여지껏 해오던 스타일과 다른 스타일의 경기운영방식을 배워서 '따라하고' 싶었던 것 같다. UFC 경기에서 맥그리거는 항상 긴 팔을 이용해 뒷발에 무게중심을 싣고 꽤 먼 거리를 두다가 반격 스트레이트를 날리거나 상대가 머뭇거리는 틈을 타 달려드는 방식의 경기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올해초 포이리에와의 경기에서는 여지껏 해오던 것과 달리, 앞쪽에 무게중심을 두고 좀 더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공격을 들어가는 스타일을 모방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고 맥그리거는 경기에서 졌다. 맥그리거는 분명 여러 면에서 천재라고 평가받기도 하는 UFC 간판스타 중 한 명이다. 그럼에도 '천재'인 맥그리거에게조차 다른 격투가의 스타일을 모방하는 것은 중요한 경기에서 패배를 안게 할만큼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이건 내가 완성된 곡을 가끔 집에서 카피하다가 느끼는 것이기도 한데... 애당초 베끼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고, 고급기술이다!


따라하면 안 된다고 자책하지 마라


우리가 누리는 대부분의 것들은 결국 남들이 창조하고 이룩해낸 무언가를 모방하고 가져다쓰고 베끼면서 사는 덕분에 가능한 것들이다. 우리가 남이 해낸 걸 모방하고 베끼는 게 못난 짓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과거 인류가 겪었던 시행착오와 오랜 씨름의 시간들을 다시 겪어낼 이유는 없다. 우리는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 여지껏 인류가 쌓아온 상아탑 꼭대기에 작은 돌 하나를 어떻게 하면 얹을 수 있을지를 고민하면 된다. 그러니 나만의 독창적인 무언가를 만들고 남들과는 다른 창의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며, 스스로를 너무 괴롭히지 마라. 마음껏 베끼고 마음껏 따라하고 모방한 후에, 그 어깨 위에서 나만의 것을 한 스푼만 첨가하면 된다. 우리는 그걸로 충분히 우리만의 창조물을, 우리만의 삶을 근사하게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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