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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남 눈치를 보는 이유는, 그러고 싶기 때문이다

근데 재밌게도, 우리는 우리가 남눈치를 보고 싶어한다는 걸 잘 모른다

by 대장장이 휴

법륜스님이 즉문즉설에서 남을 의식하고 싶지 않은데 그게 잘 안된다는 질문자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 '그러면 의식하지 마세요.' 질문자는 당황해서였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마 조금 황당했을수도 있고, 법륜스님의 스타일을 알았다면 그 뒤의 부연설명이 나올 것이라 기대를 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것일수도 있다. 법륜스님은 이야길 이어나갔는데, 이야기의 핵심은 이렇다. 질문자 당신은 실은 남을 의식하고 싶어한다는 것. 남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기 때문에 남 눈치를 보는 것이지 남 눈치를 안 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을 의식하고 눈치를 볼 때의 내 마음도 실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왜 남의 눈치를 보고싶어하는 것일까. 다른 하나는, 왜 우리는 그 마음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되려 반대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첫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남의 눈치를 보고 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아야 그가 날 미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좀 더 이쁨받고 싶다는 적극적인 욕구보다도, 미움받고 지탄받기 싫다는 소극적인 욕구가 더 강하다. 고통에서 회피하고 싶은 욕구말이다. 혹은 상대가 날 버릴지도 모른다는 유기에 대한 공포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미움과 유기에 대한 공포가 모든 것을 잠식한다는 데 있다. 미움받고 버림받기 싫은 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아니, 사실 이것도 고민해볼 문제지만 일단 자연스럽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이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나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선 거의 모든 것을 다 찍어누르는 가치가 바로 이것이다. 남의 눈밖에 나지 않는 것. 남의 눈밖에 나면 어떻게 되길래, 내게 어떤 고통을 가져다주길래 이리도 사람들이 여기에 매달려 삶을 제물로 갖다바치는걸까.


수렵사회에서는 무리에서 벗어나거나 퇴출당해서는 절대 생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때는 사실 굉장히 합리적인 욕구이었을 수 있다, 눈치보고 복종하는 것은. 어쩌면 농경사회도, 집단에서 눈밖에 나면 언제든지 내 생존이 위협받을 수 있는 환경이었다. 지금은? 아마 외로워질 수는 있겠다. 고독할 것이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가 아니라, 비위를 맞추고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나로서만 받아들여지는 관계 속에서는 어차피 한없이 외로울 수밖에 없다. 되려 무섭더라도 내가 솔직한 나를 드러내야만, 그 위험을 감수해야만 진짜 내 모습을 받아들여줄수 있는 관계를 죽기 전에 하나라도 만들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던 이야기로 돌아오면, 우리는 생존에 위협까지는 아니지만 외롭고 겁이 나서 내 마음 대신 타인의 마음에 따라 살아간다. 외롭고 겁이 나는 이유는, 그 근원은 무엇일까. 나는 여기서 진화심리학의 관점을 빌리곤 한다. 그게 분명 우리의 생존과 번식을 통한 유전자 복제에 유리했고, 자연선택은 그것에 민감한 존재로 우리를 진화시켜왔다.


그렇다면 두번째 질문에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우리는 왜 우리가 남의 눈치를 보고싶어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걸까. 그것은 우리의 '자기개념'에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 설계된 욕구, 두려움에 따라 그렇게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진짜 모습'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존재라고 자기개념을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의 나는 타인에게 수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 스스로가, 인간이 그러한 존재라고 배워오지 않았다. 만물의 영장이며 세상을 지배하는 숭고하고 이성적인 존재가 바로 우리인 것이다. 동물처럼 생존을 위해 세팅된 공포와 욕구 따위에 휘둘리며 사는 짐승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다. 우리 자기개념에 위배되는 것이다, 그런 모습은.


그렇다면 이러한 자기개념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여기부터는 로저스가 나선다. 로저스에 따르면, 우리는 사회와 문화, 타인에게 수용받기 위해 사회에서 용인하는 모습을 자기개념으로 형성한다. 가장 어릴때는 부모님, 커서는 친구와 사회, 조직구성원들이 내 자기개념을 만들어준다. 그들의 가치를 내사(Introjection)해서 자기개념을 형성하는 한편, 우리 본연의 고유한 모습들은 왜곡하거나 부인한다. 결국 남의 가치에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내 모습을 제대로 자각을 하지 못하는 이유 또한 남에게 수용받으려는 욕구 때문인 것이다.


이쯤되면,


어지러워질지도 모른다. 남의 눈치를 보는 이유가 타인에게 미움받고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이고, 남눈치를 보려는 내 모습을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는 이유도 남에게 수용받을 수 있도록 형성해놓은 자기개념 때문인 것이다. 결국 두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타인으로부터 수용받고자 하는 욕구로 귀결된다. 남의 눈치를 보는 내 생각과 감정, 행동이 미시적인 것이라면, 사회에서 용인할 수 있는 자기개념을 형성하고 그것에 부합하는 내모습만 내가 지각하고 수용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거시적인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것은 다 같은 이야기다. ...로저스의 탁월한 통찰의 아우라를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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