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 영화 '기생충' 中 -
영화 기생충에서 아버지 '기택'이 아들 '기우'를 보며 감탄하듯이 내뱉는 대사다. 그렇다.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아들이 계획을 세우고 계획대로 지켜나가는 것 같다고 느낄 때, 흐뭇하다. 우리는 초등학교때부터 생활계획표 짜는 법을 수업시간에 배운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이 되면 방학계획표를 짠다. 아침에 7시에 기상해서 1시간동안 아침밥을 먹고 오전에 학원에 갔다가 점심을 먹은 후에는 두 시간 동안 방학과제를 하고, 한 시간 자유시간을 가진 후에는 다시 수학 문제집을 푼다. 그리고 뭘 언제 하고 뭘 언제 한 후에, 마지막에 밤 10시가 되면 꿈나라로 향한다. 뭐 이런 식이다. 나도 동그라미를 크게 그린 후에 저런 방학계획표를 짜곤 했다. 왜 계획표를 짜고 그거대로 생활하는 걸 그렇게 가르칠까? 계획대로 사는 게 왜 중요한걸까. 그렇다면, 계획을 어릴 때부터 세워온 우리는 계획대로 잘 사는가.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는 계획표를 짠다. 그래서 계획대로 잘 흘러가는가. 멀리 갈 필요도 없다. 과연 우리 주위의 친구들은, 초등학교 때든 지금 직장을 다니면서든 계획표대로 삶을 훌륭하게 채워나가고 있는가. 음, 적어도 내 주위는 그렇지 않다. 계획대로 사는 녀석은 거의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고.
아,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어차피 계획을 세워도 실천하기는 힘드니까 계획을 세우는 건 위험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계획대로 실천되지 않는 건 '계획의 위험성'이라고 보긴 어렵다. 그건 그냥, 안타까운 현실같은거다.
계획이 가지는 치명적인 위험성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쳐다보는 대신 '계획'을 쳐다본다는 데 있다.
우리는 왜 계획을 세우는가. 계획이란 무엇인가.
앞으로 할 일의 절차, 방법, 규모 따위를 미리 헤아려 작정함. 또는 그 내용.
- 표준국어대사전 -
앞으로 할 일의 절차나 방법 등을 미리 헤아려서 수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하다. 가만히 냅두면 우리가 계획하는 모습으로는 안 흘러갈꺼니까! 계획없이 주말을 보내면 운동을 30분도 안 할껄 아니까! 그래서 운동계획을 세우는거다. 여기에 핵심이 있다. 계획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자연스럽게 흘러갈 모습과는 다른 어떤 '이상적인 모습'을 위해 세우는거다. 우리가 주말에 라면 2개를 야식으로 먹을 계획을 세우나? 우리가 내일이 중간고사인데 오늘 공부를 한 글자도 안 할 계획을 세우나? 아니면, 퇴근 후에 헬스장에 절대 안 갈 계획을 수립하나? 아니다. 우리는 그런 계획은 수립하지 않는다. 그런 건 계획으로 쳐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저런 계획은 어차피 세우지 않아도 지켜질 계획이기 때문이다! 저런 내용의 계획은 우리에게 쓸모가 없다. 굳이 우리가 계획하지 않아도, 우리는 퇴근 후에 절대 헬스장에 가지 않는다! 내일이 중간고사라고 해서 오늘 밤새워 공부를 하지 않는다! 어차피 계획을 안 세워도 내 자연스러운 모습이 저런 모습인데, 우리의 그런 자연스러운 모습을 굳이 '계획'하는 멍청이는 세상에 없다.(적어도 우리 중에는 없을거라고... 그렇게 믿는다.) 결국, 계획은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면 나타날 우리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머리로 생각할 때 멋지고 근사한 우리의 모습을 출현시키기 위해 짜는거다.
계획은 본질적으로, 진정한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 애초부터 계획이란, 진짜 우리를 저버리기 위한 행동이다. 우리가 12시까지 늘어지게 자고싶을만큼 게으르고 몸이 피곤하다면, 우리의 계획은 새벽 6시에 일어나 책을 읽고 운동도 하는 '근사한 우리'를 지향한다. 결국 우리는, 계획을 통해 진정한 우리 자신을 외면하는 법을 학습한다.
처음에는, 계획은 점차 그 본질적인 성격 상 진짜 우리 자신의 모습을 외면하게 만든다. 진짜 우리 모습을 외면해야 공부도 잘 하게 되고 직장에서도 인정받고 몸짱도 되고 돈도 많이 벌테니까. 진짜 우리의 모습은 언제나 그렇듯이 게으르고 무능하고 해이하고 나태하다. 우리는 근면하고 출중하고 인정받고 근사한 모습을 '계획'한다. 이렇게 계획은 분명 우리가 진짜 우리 자신을 외면하게 만들어나간다. 그러다가 종국에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망각하게 만든다.
그런 이야길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다. 돈을 많이 벌려면, 부자가 된 나를 아침부터 하루종일 책상 위에 붙여놓고 상상하라고. 잠들기 전에도 이미 억만장자가 된 나를 상상하면서 내가 이미 억만장자인 것처럼 상상하라고. 그러면 우주가 당신의 꿈을 들어줄 것이라고. 나는 그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이런 방식의 자기최면에 많은 장점이 있다는 데 이견은 없다. 하지만 그건 어떤 면에서는 꽤나 위험한 짓이다. 직장을 구하지 못해 겨우 최저시급으로 생계를 유지는 하고 있는 사람에게, 분명 꿈과 희망은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을 외면하고 직시하지 못하는 나약함을 감출 수 있는 핑계거리가 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지금 진짜 내 모습을 직시하지 못하는 나약함은, 싸워서 이겨내고 극복해야 하는 적(Enemy)이다.
계획은 사실 지금의 나를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들의 도피처 같은 성격을 분명 가지고 있다. 나는 어릴 때 무척이나 계획을 짜는 걸 좋아했다. 강박적으로 엑셀에 내가 삶에서 이루고 싶은 분야를 다 행에 적어놓고 그 각 분야마다 10년 후 20년 후를 10년 단위로 계획을 짜서 80년 후까지 10년 단위 목표를 적어두었다. 그리고 다시 그 10년단위들을 1년단위로 나누고, 1년 단위들을 한달 단위로 나누고, 한달 단위를 일주일 단위로, 다시 하루 단위, 시간 단위로 나누어서 각 분야별로 이번주는 시간 단위로 무얼 채워나가야 할지를 분야마다 빼곡하게 적어놓곤 했다. 재밌는 사실은, 계획을 실천해나갈 때만큼이나, 아니 그 때보다도 오히려 계획을 짤 때 훨씬 더 즐거운 적이 많았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분명 나는 내가 계획한 모습의 나를 상상하고 그릴 때가 그 계획을 실천하느라 낑낑댈 때보다 훨씬 더 좋았다. 즐거웠다. 많은 것을 이루고 성취하고 근사하고 말할 수 없이 화려해진 나를 계획하며 머릿 속으로 그려볼 때가, 아직은 아쉽고 부족하고 초라한 내 현재의 현실 속 모습을 바라볼 때보다 훨씬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현실을 자각하고 싶지 않고 외면하고 싶고 망각해버리고 싶으니, 자꾸 상상 속에서만 머무르려는 것이었던 게 아닐까 싶다. 과거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혹시 계획을 실천하기보다 수립할 때가 더 즐거운 경험이 있다면 도대체 왜 내가 그렇게 느꼈는지 내 마음을 한 번 들여다보기 바란다. 계획은 본질적으로 내가 '계획한 나'를 바라보며 지금 '현재의 나'를 점점 외면하고 외면하다가 조금씩 잊어가게 만든다. 결국 우리는 계획에 몰두하면서 점차 지금의 나 자신,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고 바꿔버리고 싶은 내 현재의 진짜 모습을 망각하기 시작한다.
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바꾸고 싶은 현재의 아쉬운 내 모습을 계획한 내 모습대로 바꾸어나가기 위한 전략과 전술 수립 행동이 '계획'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몰두할수록, 지금 수학을 40점 받는 나는, 최저시급과 거의 비슷한 급여만을 받으며 근근히 생활하는 나는, 120키로가 넘어서 어떤 옷을 입어도 맵시가 나지 않는 지금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난 어차피 나중에 최소 몇억의 현금성 자산을 가지고 있을 사람이고, 몸짱이 될 사람이고, 수학도 90점을 넘게 받을 사람이니까. 난 그걸 계획해서 계획대로 지키려 노력하고 있으니까!! 처음에는 가끔 거울을 보고 통장 잔고를 보고 내 성적표를 보며 지금의 나를 '미래에는 사라져버릴 못난 나'로 외면하는 수준에 그치지만, 결국에는 망각하기 시작한다.
'이, 뭔, 개소리야!!' 유튜버들이 자주 쓰는 그 갑옷입은 아저씨의 짤방을 넣고싶다. 계획이 계획을 세우지 못하게 한다니 이게 무슨 소리일까. 계획은 진정한 계획을 세우지 못하게 하는 게 분명하다.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나는 계획이 '위험하다'는 것이지, 계획을 짜지 말자는 게 아니다.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좋은 행동이다. 전략과 전술은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분명 요긴하고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단, 우리가 반사적으로 떠올리는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계획'은 대부분 우리가 진정한 계획을 수립해서 원하는 삶을 행복과 함께 얻는 걸 방해한다. 왜 그럴까.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계획은 진짜 우리의 모습을 외면하게 하고 종국에는 망각하게 만든다. 강하고 잦은 외면은 결국 망각을 낳으니까. 우리가 정말 삶을 행복하게 채워나가면서도 원하는 모습으로 성장해나가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계획수립이 필요하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자. 우리가 제대로 된 계획을 짜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볼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진짜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아는거다. 우리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전략과 전술을 짠다고 생각해보자. 그 때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일은, 현재 상황이다. 우리가 전략과 전술을 펼칠 수 있는 우리의 군종별 병사 및 장비규모, 그리고 우리가 전략을 펼칠 무대인 지형지물 등이다. 우리가 삶을 펼쳐나갈 무대인 '전쟁에서의 지형지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다. 이건 별 거 아닌 것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왜 계획에 실패하나.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계획을 짜기 때문이다. 내가 체질적으로 잠이 너무 많고 잠이 모자라면 아무 것도 주의집중을 못하는 신체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다.(사실 대다수가 이렇다.) 그런데 하루에 4시간씩 자며 일하고 공부할 계획을 세운다. 이게 얼마나 지속될 것이락 기대하는가. 억지로 버틴다 치더라도, 제대로 보고서나 수험서가 머리에 들어올리도 없고 아마 머지 않은 시일 내에 몸이 망가져서 어쩌면 큰 병을 얻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과만 먹으면 심하게 배탈이 나고 알러지가 생기는데, 사과가 몸에 좋다고 사과 다이어트를 억지로 참아가며 근성있게 해낸다고 해보자. 그게 도대체 얼마나 효과가 있을 것이며, 얼마나 지속될거라 보는가. 사람이 없으면 너무 극심한 외로움을 타는 사람이 평생 실험실에서 연구만 하며 연구자가 될 계획을 수립하면, 그게 얼마나 갈 것이며 그 사람이 얼마나 행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금 진짜 내 모습'을 조금 더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대개 '계획자'의 마인드로 현재의 내 모습을 자꾸 싸우고 극복하고 찍어누르고 이겨내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진짜 우리 자신은 적(Enemy)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기 전에 파악해야 할 지형지물, 혹은 협력자나 동료 정도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해한 후에 계획을 세운다면, 그 계획은 분명 우리를 '삶'이라는 전쟁에서 승리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