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이 막연하고 어려운 이유와 우리가 우리를 알아야 하는 이유
우리는 왜 사는가. 사는 이유에 대한 고민은 인간이 태어난 이래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계속 되어온 고민 중 하나이다. 수많은 철학자들과 위인들이 이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를 했지만 여전히 우리는 왜 사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깊은 사유와 철학적 고찰 따위의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결코 아니다. 많이들 내게 묻기도 하고, 나 또한 그것에 대해 갈증이 많아서 현실 속의 궁금증을 이야기하는거다. 당신은 왜 사는가.
각자 이에 대한 생각은 다양할 것이다. 누군가는 돈을 위해, 명예를 위해, 권력을 위해 살기도 하고 누군가는 사랑을 위해,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살기도 한다. 누군가는 삶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냥 흘러가는대로 살다가면 그 뿐인 것 아닌가, 라고 말한다. 정답은 없다. 물론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삶에 정답은 없다.'는 말에 고개만 끄덕일 뿐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흘려보낸다는 걸 안다. 하지만 정말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삶에, 정답은 없다.
그럼에도 삶의 이유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들을 몇 가지 끄적여보고자 한다. 이는 우리 각자가 스스로와 스스로의 삶을 이해하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삶은 기본적으로 불가항력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선 우리는 우리가 태어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없었다. 즉, 시작할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없이, 태어나지기로 결정'되어' 태어난 것이다. 끝은 어떨까. 우리는 죽을지 말지 선택할 수 있는 힘 또한 없다. 우리의 끝 또한 불가항력적으로 정해져 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 언젠가는 이 정해진 길을 뛰어넘는 세상이 올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다. 결국 우리는 삶의 시작과 끝을 우리가 전혀 선택하거나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채 불가항력적으로 건네받게 된다.
그러다 보니 삶의 이유에 대해서도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만약 우리가 저 우주 밖에서 가만히 우주를 쳐다보다가 '아, 나는 삶을 한 번 시작해봐야겠다. 태어나기로 결정했다. 나 이제 '삶'을 시작한다. 시작버튼. 띡.' 이렇게 삶을 자율적으로 결정해서 시작했다면, 어쩌면 '왜 사는지'와 같은 삶의 이유에 대해 지금처럼 고민을 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결정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주어진 삶은 제멋대로 우리에게 주어졌으나 머지않아 또 우리의 의사와 관계없이 제멋대로 끝난다.
이렇게 우리의 자율적 결정이 아니라 '주어진' 삶이다 보니 우리는 은연 중에 삶의 이유 또한 우리의 밖에서 '찾으려고' 한다. 흔히들 삶의 이유를 찾아라고 말한다. 무언가를 찾는다, 발견한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무언가를 우리가 찾아낸다는 의미를 가진다. 내 삶의 소명은 '찾아낼, 발견할' 무언가로 종종 언급되곤 한다. 외부에 이미 존재하거나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으나 우리가 아직 그것을 발견해내지 못했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다. 이해가 간다. 삶과 죽음이 모두 외부에서 '주어지는' 형태의 인생에서, 삶의 이유 또한 어디선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게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삶의 이유는 우리가 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해진대로 태어나 정해진대로 죽어야할 삶이지만, 그 주어진 시간 동안 삶을 무엇을 바라보며 살 것인지는 우리가 정할 수 있다.
물론 우리 삶에는 정해져 있는 부분도 많다.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들로 인해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바쁘다. 우리는 아기 때부터 배가 고프면 먹을 걸 얻기 위해 울고, 24시간이 다 돌기 전에 몸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기 위해 수면을 취해야 한다. 음식을 먹으면 배설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고, 일정 시기가 지나면 자연스럽게 성욕에 기인해서 이성을 찾기 시작한다. 이런 욕구들은 다 우리에게 선천적으로 설계된 것들이고, 이러한 욕구들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기만 하더라도 삶은 무리없이 어디론가 흘러간다. 인간도 결국 동물이고, 우리가 소위 '동물'이라고 부르는 많은 생명체들은 이렇게 설계된 욕구들에 점철된 채 자연의 순환 속에서 살아가다가 삶을 마감한다. 우리도 사실 그렇게 살다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삶은 아무 문제도 없는 삶의 양식이고, 실제로 겉으로 세련되고 현대화되어 보일 뿐 우리도 많은 경우 저렇게 주어진 욕구를 따라 살아가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포장이 되고 또 되다보니 그렇게 보이지 않을 뿐.
하지만 이따금씩 왜 사는지, 무얼 위해 이렇게 살아가는건지 마음이 공허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위에서 이야기한 저런 이유들(삶, 죽음, 뿌리칠 수 없는 많은 욕구들이 모두 외부로부터 이미 주어진 것이라는 맥락의 사실들) 때문에 삶의 이유 또한 자꾸 외부 어딘가에서 '찾으려고'하는 경향이 있다. 내 삶의 이유가 어딘가에 있을꺼야,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삶의 이유는, 우리가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삶의 이유를 정할 때는, 내 내면의 소리 이외에 외부의 시선과 기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삶의 이유와 목적에는, 우열이 없다. 귀천도 없다. 귀천이 있다면, 얼마나 온전히 내 마음을 따라 결정한 것이냐 정도가 될 것이다.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볶음밥을 먹을지 결정할 때의 딱 그 정도의 마음가짐이면 된다. 우리는 은연 중에 삶의 이유는 윤리적이고 거창해야 한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짜장면은 짬뽕보다 숭고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아닐수도 있다.(안물안궁이겠지만, 내게는 짜장면보다 짬뽕이 더 숭고하다.) 문화권의 기대와 타인의 시선, 내가 배웠던 윤리관을 모두 내려놓고 순전히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서 삶의 이유를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져보길 권하고 싶은 마음을 끄적이면서 이번 글은 여기서 끝.
P.S) 말이 쉽지 정말 어려운 것 같다. 삶의 이유를 정하는 류의 일은, 일종의 예술행위나 정무적인 감각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는 어떤 매뉴얼이나 지침에 따라 기계적으로 학습한다고 해서 제대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다. 많은 시행착오와 노력을 통해 조금씩 비언어적으로 몸에 체화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 일단 자꾸 부딪쳐보자. 안 되면 다음에 또 하면 되니까. 어차피 왕도가 없는 이런 류의 일은, 자주 마음과 시간을 내어 해보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