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같이 상오는 소야가 창을 열고 달을 바라보는 것을 멀찌감치 떨어진 수풀 사이에서 보고 있었다.
그는 막근과 막덕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그래서 어떻게 하려 하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달리 이 보고를 대왕에게 올리자니 알 수 없는 반발심이 그를 막아섰다.
아마도 소야가 그 이유였을 것이다. 막근이 도망가려는 것이 들통나면 분명 그녀가 가장 먼저 참형에 처해질 게 뻔했고, 상오는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차라리 어떤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그녀가 사모하는 막근과 함께 도망가는 것이 행복이라면 그랬으면 했다.
‘그녀의 방 앞에 도라지 꽃을 놓는 것도 이제 곧 못하겠구나.’ 라고 그는 생각하며 그녀를 바라보던 찰나, 그녀가 상오 쪽을 바라보는 것을 느꼈다.
그는 놀라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숙이며 그녀가 알아챘을리 없다고 생각했다. 소야는 잠시 후 창에서 멀어지더니 도라지 꽃을 한 송이 손에 쥐고 다시 창에 나타났다.
상오는 심장이 크게 요동치는 것을 느끼며 계속 그녀를 관찰했다. 그녀는 도라지꽃을 손으로 살며시 감싸 쥐며 미소 짓더니 이내 그 꽃을 머리에 꽂고는 두 손을 모았다.
상오는 자기 입이 벌어져 있는 것도 모른 채 그녀의 자태에 넋이 나가 있었고, 잠시 후 그녀가 창을 닫은 후에도 한동안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정말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단 한 번이라도 그가 지키고 싶은 것을 그가 정할 수 있었던가.
그녀라면 지킬 수 있을까.
전에 없이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끼던 그때, 그의 곁으로 한 흑막병이 다가와 말했다.
“대장, 대왕께서 찾으십니다.”
상오는 그의 말에 황급히 마른 세수한 후 자리를 떴다.
수성은 선조의 못에서 맴돌며 황금의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예전부터 이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곳은 마치 그에게 억지로 모든 것을 감내하라 강요하는 기분을 주었다. 그중 가장 그의 마음이 불편한 곳은 바로 저 황금의자였다.
그의 눈에는 아직도 그곳에 그의 형이 앉아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을 전부 없애버리거나 바꿔 버리고 싶었으나 몇백 년이 넘도록 유지된 이곳을 자신이 손 댄다는 것은 신하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한 명분이었다.
그는 강력한지배를 통한 정치를 하고 있으나, 신하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는 것은 불필요했다.
그는 황금의자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피로감을 느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과 아담한 달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칭송받은 왕들은 사후 저 높은 곳에 별이 되어 후손들을 돌본다던가, 혹은 영물로 태어나 후대 왕들과 영광을 함께한다던가 하는 말들은 늘 들어왔지만 그는 쉽사리 믿지 못했다.
죽어서 누리는 영광이 다 무슨 소용이던가. 그는 이제서야 한평생 기다려온 영광을 누리기 시작했다. 자기 손으로 일궈낸 대 영토를 스스로 다스리게 된 것이다. 이는 그의 기여와 희생에 대한 보상이고 마땅한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 더욱 당당해져야 한다고,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딘가 허전했다.
이 땅의 모두가 그를 보며 고개를 조아리고 적황빛의 봉황이 그의 등 뒤에서 날개를 펼쳐도, 왠지 그의 마음 한구석에 공허함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공허함은 날이 갈수록 그를 괴롭히고 외롭게 했다.
그는 전에는 누가 권해도 거절하던 술을 어느새 그가 혼자 매일 밤 찾고 있었으며, 친한 벗이라고 여겨 왔던 진당과 한백도 더 이상 찾지 않았다.
그는 매일 밤 그의 침상에 덮여있는 적호의 가죽과 그가 애용하는 장검을 바라보며 과거의 전투를 떠올리곤 했고, 술에 취한 밤 홀로 방 안에서 검무를 추기도 했다.
그는 검무를 출 때마다 눈물을 흘리곤 했는데, 언제부턴가는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전처럼 손에 감기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불행했다.
그는 억울했고, 불행했다. 원망스러운 이가 많았고, 미안한 이가 많았다.
그는 몇 날 며칠을 그 생각으로 밤을 지샌 후, 더 큰 욕망으로 이를 뒤덮기로 했다.
그가 선조의 못에 비친 달을 바라보며 그간의 고민을 되새김질 하던 중 상오가 그의 뒤에 나타나 절을 올렸다.
수성은 그를 뒤돌아보며 말했다.
“왔느냐.”
상오는 그에게 답했다.
“부르셨습니까.”
수성은 시선을 다시 못으로 향하며 말했다.
“흑막대의 보고를 받았다. 내 직접 너에게 몇 가지 확인하고자 불렀다.”
상오는 차분하게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왕의 표정은 날이 갈수록 읽기 어려워져서 마치 그의 형이었던 선왕을 떠올리게 되었다. 수성은 여전히 시선을 못으로 향한 채 상오에게 물었다.
“세자가 근래 몇몇 궁녀들을 궁 한구석에서 만난다 들었다.”
상오는 그의 말에 올 것이 왔다는 것을 느꼈다. 상오는 답했다.
“예. 최근 보고에 따르면 세자가 주로 만나던 소야가 아닌 다른 궁녀들을 은밀하게 만나고 있다고 합니다.”
수성은 상오의 대답에 뒤돌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상오는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왜 그러는 지도 아느냐?”
왕의 말에 상오는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대답을 주저했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왕의 까마귀였다.
“…편지를 주고받는 것 같습니다.”
수성은 상오의 대답을 듣자 다시 천천히 못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상오는 그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지를 생각하며 얕게 소름이 돋았다. 그는 마치 목숨을 담보로 한 시험을 보는 기분이었다. 왕의 질문은 계속되었다.
“편지의 내용은 파악이 되었느냐.”
상오는 결국 피하고 싶었던 그 질문을 듣고야 말았고, 다른 변명을 준비해 두지 못한 대가로 그 순간 불편한 침묵을 맞이해야만 했다. 왕은 재촉했다.
“… 그런 것까지는 흑막대의 재주 밖인 것이냐.”
상오는 그의 차분하면서 날카로운 재촉에 조금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답했다.
“막근세자와 소야가 고구려를 달아나려 하는 듯했습니다.”
수성은 그의 대답을 듣고는 못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상오는 고개를 숙인 채 황급하게 말꼬리를 붙이기 시작했다.
“송구하오나 전하, 이 모든 편지내용은 막근의 연정이 담긴 시 정도로만 예측되옵나이다. 평소 막근이 소야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이렇게 애정이 가득 담긴 시를…”
“무엇이냐.”
상오의 말을 끊고 수성이 말했다. 상오는 그의 질문에 당황하여 저절로 고개를 들어 용안을 보았다. 수성의 표정은 분노로 휩싸여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공허했다. 왕은 상오에게 재차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리 감싸려 드냐는 말이다.”
왕의 질문에 상오는 고개를 숙여 급하게 말을 지어냈다.
“송구하옵나이다, 전하. 하오나 그저 불필요한 살생이 일으킬 파장이 걱정되다 보니 소인의 말이 길었사옵나이다.”
수성은 상오의 말을 차분히 듣고는 다시 한번 질문했다.
“…언제부터 왕의 까마귀가 스스로 상황을 판단했더냐.”
상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왕은 못을 한 바퀴 돈 후 그의 앞에 서서 조용히 말했다.
“한 나라의 세자가 다른 나라로 도망가는 일은 없어야 한다.”
상오는 제발 그 말만은 아니길 빌며 이를 꽉 깨물고 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둘 모두 없애거라.”
상오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이 심장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왕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마주한 왕의 눈은 달빛보다도 차가웠고, 그렇게 가까이 보고 나서야 차가운 그의 눈 사이로 서린 분노가 느껴졌다.
상오는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명 받들겠나이다.”
그 후 상오가 일어나 자리를 뜨려는 데 왕의 목소리가 등 뒤로 들렸다.
“그리고.”
상오가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돌아 왕을 보자 왕이 못 가에 피어 있던 작은 꽃의 줄기를 꺾으며 말했다.
“그 동생도 없애거라.”
상오는 식은땀을 숨긴 채 왕에게 절을 올린 후 담장을 넘어서 재빠르게 달렸다. 그가 향한 곳은 한백의 집, 소야의 방이었다.
그는 달이 밝게 뜬 밤에 풀잎과 나무 사이를 가로질러 그녀를 향해야만 했다.
‘그녀라도… 그녀라도 살려야만 해…’
그는 아직 시간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녀를 잠시만이라도 다른 곳에 머물게 하면, 이 모든 일이 조금 잠잠해지고 나면 괜찮으리라.
그가 간간이 시간을 내서 그녀가 머물 임시거처에 음식과 옷 등을 주면서 그녀가 버틸 수 있게만 해주면 모두가 그녀를 잊으리라.
그때, 그녀를 다시 아버지에게 돌려보내면 그녀의 아버지가 상오 자기 말은 몰라도 그녀의 말을 믿고 어떻게든 대처하리라.
아마, 나라를 뜨겠지. 이 나라를 뜨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 흑막대는 고구려 바깥까지도 쫓아가지만, 상오가 그것만큼은 어찌저찌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막근과 막덕은 정치싸움으로 인해 목숨을 잃는 것이라 생각해도 되지만, 소야만은 무슨 죄로 죽어야만 하겠는가. 이 순진무결한 어여쁜 여인은 그저 세자를 사랑한 죄 밖에는 없다.
애초에 세자가 그녀에게 접근하지 않았더라면…
그래. 세자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이다.
자기 앞가림도 하지 못 하는 그가 상오는 갑자기 싫어졌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죽게 된 경위가 자신이 보낸 편지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알기나 할까.
자신이라면, 절대 그렇게 놔두진 않을 것이다. 상오 자신이라면…
그는 한참을 그렇게 빠르게 달리다가 갑작스레 무언가에 걸려 넘어져 길에서 몇 바퀴를 굴러야만 했다.
그가 흙먼지를 털어내며 고개를 들자 운강이 바닥에 설치 되어 있던 사슬을 풀며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미행한 것을 기분 나빠하진 말거라. 오히려 니가 눈치 못 챘다는 것에 나는 좀 화가 나는구나. 무엇에 그렇게 눈이 멀은 게냐.”
상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대답도 않고 다시 달리려 했고, 운강은 사슬을 그의 발목을 향해 던져 그를 다시 한번 고꾸라지게 만들었다.
상오는 큰 소리로 말했다.
“제발 이번 한 번만 봐주십시오!”
운강은 그의 태도를 보고 얼굴이 굳어져 사슬에 묶인 그의 발목을 짓누르며 말했다.
“왕명을 받은 왕의 까마귀는 곧바로 까마귀굴로 돌아와 명을 전달하고 행동에 착수하는 것이 정해져 있는 수순이다. 허나 네 반응을 보아하니 그 명이 무엇인지 뻔히 알겠구나.”
운강은 그렇게 말한 후 그의 발목을 더 세게 짓눌렀고 상오는 어느새 소리치고 있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일단 저를 놓아주십시오!”
“네놈이 어쩌다 이리 되었느냐!”
자기 말이 끝남과 동시에 더 큰 소리로 윽박지르는 운강을 보며 상오는 잠시 멍했다. 운강은 분노 가득한 얼굴로 주변에 너무 큰 소리를 낸 건 아닌지 두리번거린 후 말했다.
“지금 당장 까마귀굴로 가자.”
상오의 발목을 거세게 짓누르며 묻자 상오는 일그러진 얼굴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둘이 자리를 뜨자 담벼락 옆에서 진당이 나와 그들이 뒹군 자리를 보며 혼잣말했다.
“아아…수성이 일을 그르치려 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