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랴!”
막덕이 또 한 번 눈앞의 이리를 놓치자 그의 옆에 있던 병사가 말을 달려 나갔다.
전같지 않은 활시위에 그와 동행하던 무리들도 의아해할 정도였다.
그는 전날 밤 막근의 미소가 잊혀지지 않아 무엇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당장에라도 그를 붙잡고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듣고 싶었으나 흑막병을 포함해서 주변에 눈과 귀가 너무도 많아 말도 걸 수 없었다.
그저 답답한 마음이 커져 슬슬 화가 나기도 했다.
‘고구려를 떠난다라…’
그는 화살을 회수하며 생각해 보았다. 막근이 이 나라를 떠날 때 같이 간다는 것은 분명 소야와의 연정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막덕 자신은 굳이 고구려를 떠나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궁 밖에서의 생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아는 바도 없었다.
더군다나 그는 궁 생활을 상당히 사랑하고 있었다. 여유롭게 사냥을 하며, 재미는 느끼지 못하더라도 억지로 서적을 공부시켜 주며, 모두가 그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형을 따라나선다면 이 모든 게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는 사냥 무리들과 함께 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서민들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떨어지기 직전인 헝겊들을 옷이랍시고 걸치고 씻지 못한 꼴로 더러운 것들을 만지고, 땀내가 진동하게 일하고, 겨우겨우 하루 끼니를 메워 나가는 모습들이었다.
그러다가 누구라도 높은 사람이 다가온다 하면 지금 그가 겪듯이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얼굴 한번 마주하지도 못하고 절을 해야 한다. 그에게 궁 밖의 생활은 언제나 그런 모습이었다.
이제 곧 있으면 성년의 대우를 받게 될 그는 자기 미래를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게 되었는데, 다른 타국의 공주와 정약결혼해서 공주의 나라에서 불행할 수도 있을 것이고, 이곳에서 행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가 여전히 왕자라는 전제였기 때문에, 형의 생각은 어떤 의미로 대단하게 느껴진 것이다.
방에 앉아서도 그는 계속해서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하는 시간이 흐를수록 고민의 방향은 막근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려 할까의 고민으로 바뀌었다.
누군가를 흠모한다는 마음 자체가 이해가 안 되었다. 소야가 그렇게 좋으면 정약결혼 후 첩으로 받아들이면 될 텐데 굳이 정약결혼을 거부하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고구려를 위한 일에 어찌 세자가 사적인 감정을 앞세우는 건지 내심 형에게 실망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여러 감정들이 교차하던 중 문득 막덕은 자신이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막근이 고구려를 떠난다면 다음 왕위는 자신이었다.
대왕은 이미 충분히 노년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고, 설령 자기 아버지처럼 오래 왕위를 지킨다 치더라도 막덕 자신이 왕위에 오른다는 것 자체는 변함이 없으리라. 막덕은 갑자기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단 한 번도 왕위에 오를 자신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선조들께서 나를 선택하셨구나.’
막덕은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막근에 대한 걱정은 어느새 사라졌다.
그는 자기 아버지처럼 멋진 왕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것,
자신이 국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자라는 것이 그의 자신감을 한층 더 고무시켜 주었다.
‘봉황이… 내 것이 될 수 있어…!’
그는 한쪽에 진열되어 있던 자신이 가장 아끼는 활을 꺼내어 어루만졌다. 그는 심장이 두근거리고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용포를 입은 자신을 상상하며 한참을 즐거워하다가 문득 형이 떠올랐다. 막근이 조용하고 사고없이 사라져야 자신이 무리 없이 왕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과연 그의 형이 온전히 사고없이 이 나라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는 평생 자기 눈에는 샌님으로밖에 보이지 않은 그의 형이 걱정되었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막근의 방으로 향했다.
* * *
작은 틈새로 바람이 오가며 창을 치는 바람에 진당은 겨우 든 잠에서 깨어 버렸다.
국상 이후로 불안한 마음이 가라앉질 않고 있었는데, 아무리 이게 기우라 치부하더라도 뭔가 수면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었다.
그는 자기 책상 위 등불에 불을 붙이고 앉아 무어라도 적어 내려가보려 했지만 당최 집중이 되질 않았다. 그는 일어나서 자기 옆 방에서 자고 있을 새 식솔 율이를 보러 가 봤다.
아이는 어린 나이에 참혹한 것들을 많이 봐서 그런지 나이에 맞지 않게 참 얌전했고, 그의 심부름을 곧잘 이해하고 기억했다.
진당은 아이에게 글을 가르치며 여가를 보내곤 했는데, 글을 가르친지 넉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소녀가 직접 그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책들을 집어와 읽어도 되는지 물으니 여간 신통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이 기묘한 아이가 정말 자기 가족같아 하인과는 다르게 대하게 되었고, 애정이 깊어져서 간혹 오늘처럼 잠이 오지 않는 날에 한 번씩 아이를 보고 오곤 했다.
율이는 예상대로 곤히 잠들어 있었고, 그는 아이의 침상에 걸터앉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그게 소녀의 잠을 깨워 버렸다. 아이가 졸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는 말했다.
“미안하구나. 어서 다시 잠들거라.”
진당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녀가 물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진당은 그 물음에 소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미소 지으며 답했다.
“아니다. 노인들은 원래 잠이 없단다. 어서 잠들거라.”
그의 말에도 불구하고 율은 힘겹게 이불을 밀어내며 허리를 일으켰다. 아이는 손으로 눈을 비비며 침상에서 내려오더니 차를 담아 놓은 작은 주전자를 가져와 도기 잔에 따른 후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아이를 기특하게 바라보며 그 잔을 받아들였다. 아이는 자신보다 조금 더 높은 탁상에 의자를 가져와 앉고는 그에게 물었다.
“소녀 질문이 하나 있사옵니다.”
진당은 아이의 질문을 언제나 환영했다.
“오, 그래. 해 보거라. 무엇이냐?”
아이는 졸려서 덜 뜬 눈을 손으로 비비며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께서 하시는 그 진기한 일들은 다른 사람들은 못 합니까?”
진당은 멈칫한 후 말했다.
“도술을 말하는 것이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고, 진당은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며 침상 옆에서 일어나 아이의 옆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그렇단다. 이 고구려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아마 없을 것이야.”
아이는 그를 올려다보며 계속 질문했다.
“그럼 어찌하여선생님께서는 그런 것들을 할 수 있게 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진당은 부스스하게 뻗어 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짓고는 말했다.
“이 늙은이는 다른 먼 곳에서 왔단다. 마치 율이 너처럼.”
아이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마 이방인이라는 것이 아이에겐 또 하나의 공감대를 형성한 듯했다. 진당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곳은 우리 고구려의 영토이긴 하나 아무도 살지 않는 줄 안단다. 산세가 험하므로 상인들도 그리로는 지나가지 않으려 하지.
하지만 그 산의 정상 언저리에 작은 학술전같은 것이 하나 있단다. 수많은 서적들이 있는데 그 서적들은 모두 우리 사람들의 기원과 자연의 이치들에 대해 적혀 있다.
그곳에서 나는 좋은 스승님들 밑에서 정말 긴 시간을 배웠지. 그 덕택에 이런 하찮은 재주가 있는 거란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율이의 얼굴은 호기심에 잠이 다 달아나 어느새 옛날이야기를 듣는 아이마냥 그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아이는 그의 말이 끝나자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저는… 못 배우는 것입니까?”
진당은 아이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놀라움을 숨길 수 없었다.
일단 도술이란 것이 사람들로부터 배척받는 재주이기도하고, 그로 인해 불필요한 화를 입을 수도 있어서 진당 본인도 여간해서는 도술을 부린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내아이도 아닌 여자아이가 도술을 배우고 싶다 말하는 것은 여간 대담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는 아이에게 물었다.
“…율이 너의 눈에는 도술이 멋져 보이느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당은 창으로 가 두 창을 열어 달빛을 방 안으로 들이게 했다. 그 후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아 아이가 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말했다.
“분명히 너는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특출나단다. 하지만 이 도술이란 건 율이 너의 생각만큼 그저 좋은 것은 아니란다.
사람들은 너를 두려워할 것이고 넌 매일 밤을 해를 입을까 두려움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것이야.”
율은 시선을 떨구며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이미 저는 그렇게 지내고 있사옵니다.”
진당은 그 말에 놀라 말문이 막혔다.
그는 그간 자기 나름대로 이 아이에게 관심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또래 아이들과 어떻게 지내는지도 물어본 적이 없고, 사실 그런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고민한 적도 없었다.
그는 자기 허리만큼밖에 오지 않는 작은 아이에게 물었다.
“그래… 너를 많이 챙기지 못해 미안하구나…”
율이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선생께서는 나랏일이 더 중하시지 않습니까. 제가 아무리 무지하다 한들 그런 점을 간과할 정도는 아닙니다.”
아이가 쓰기엔 너무나 어려운 말들과 아이답지 않은 태도에 진당은 예전엔 기특했지만, 이젠 사뭇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앞섰다.
아이는 잠시의 침묵 후 그에게 다시 말했다.
“저에게 도술을 배울 기회를 주실 순 없으시겠습니까?”
진당은 아이의 말에 앓는 소리로 답하며 한동안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몇 분을 말없이 눈을 감기도하고, 창밖을 보기도 했다.
잔에 든 차를 다 마신 후에서야 그는 입을 열었다.
“…안타깝게도 내가 너를 가르칠 수는 없단다. 그러고 싶다 한들 나에겐 그럴 자격이 없구나.”
율은 잠에서 다 깬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어떤 분께서 저를 도와주실 수 있는지는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진당은 그녀가 도술을 익힌 후를 상상하려 해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그마저도 수많은 유혹을 견뎌 내는 것에 힘겨워 했고, 아직도 그는 하루하루 이성의 끈을 부여잡으며 마음 같이 흘러가지 않는 세상을 지켜보는 것을 배워나가고 있었다.
그와 같은 도술가들은 대부분은 가르침을 따라 자연의 힘을 숭배하며 겸손하게 지냈지만, 어떤 이들은 도술을 익힌 후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변모하여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기도 했다.
세상에 공공연히 알려지지 않은 힘을 다루는 자들이 부리는 악행은 그 어떤 자연재해 보다도 큰 공포를 불러일으켜 사람들을 죽음에 내몰기도 하였고, 한 국가의 존속을 뒤흔들기도 했다.
율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진당은 고구려로 넘어온 이후 누구와도 도술에 관해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기에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그에게 도술에 관해 묻는 율이 불편했다.
그는 얕은 신음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꾸나. 너의 청은 내가 숙고해보도록 하겠다. 지금은 어서 다시 잠이 들도록 하거라.”
그는 율의 방을 나온 후 그의 방으로 돌아와 침상 한쪽에 세워져 있는지팡이를 챙기고 바람을 쐬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