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오는 깜짝 놀라 팔에 힘을 줘보려 했으나 쉽게 풀어지지 않았다. 그는 몸부림을 멈추지 않고 계속 힘으로 대치하며 답했다.
“왠 놈이냐.”
그가 묻자 그를 묶은 자는 그의 등허리를 발로 차 그를 앞으로 넘어뜨린 뒤 단도를 주머니에 다시 꽂으며 말했다.
“나다.”
상오가 넘어짐과 동시에 튀어 올라 검을 뽑고 보자 운강이 보였다. 그는 운강이 잠복지점에 나온 것을 본 적이 없어 사뭇 놀랐다. 상오는 검을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운강은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그저 다가왔다. 그늘에 가려져 있던 그의 얼굴이 달빛을 받자 그가 얼마나 분노한 상태인지 상오는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운강은 턱에 힘을 주어 까드득 소리를 내며 그에게 다가왔다.
“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그따위 행동을 하는 게냐.”
운강이 분노에 가득 차 상오에게 말했다. 상오는 변명도 할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죄송합니다…”
운강은 상오의 배에 강하게 주먹을 날렸다. 상오는 배를 부여잡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운강을 올려다보았는데, 하나뿐인 눈이 달빛을 담아 퍼렇게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과연 다른 그 누구와도 차원이 다른 살기였다. 운강은 분노를 줄이지 못한 채 말했다.
“그러다가 누군가에게 잡히기라도 했으면, 네놈이 알고 있는 전부가 모두에게 공개되면, 네놈이 갑자기 어딘가로 끌려가 버리면.”
운강은 상오를 억지로 일으킨 채 뺨을 세게 치고는 말했다.
“대체 남은 흑막병들은 어떻게 하란 말이냐.”
상오는 그의 말에 그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흑막대의 철칙을 대장인 자신이 어긴 것에 대해서는 어떤 것도 변명이 될 수 없었다.
운강은 뒤돌아 한숨을 몇 번 연거푸 쉬고는 상오를 향해 손가락질 하며 말했다.
“네놈 때문에 저 고운 소녀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도 이상할 것이 없게 되었다! 네놈의 불찰이 죄 없는 소녀의 목숨까지 사지로 내 몰은 것이란 말이다!”
상오는 그의 말에 아무 변명도 할 수 없었지만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치고 올라오는 무언가가 뜨겁게 그를 달구었다.
그는 지금 자기 행동이 잘못된 것, 자신이 다른 누군가에게 언제나 좋지 않은 영향을 주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걸 잊을 만큼 잠시나마 행복했다는 것이 고통스럽고 화가 났다.
갑자기 그가 어머니에 대해 묻자 차갑게 외면하던 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돌연 그는 세상이 자신에게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난 왜 늘 참고 참아야 하는 걸까.’
상오의 마음이 읽혔는지 조금 전까지 그에게 화를 내던 운강이 다가와 그의 앞에서 한숨을 깊게 내쉬며 말했다.
“힘들 거 안다. 모든 게 다 원망스럽겠지.”
그는 허리에 손을 올리며 그를 향해 평소와 같은 다정다감한 투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하는 이 일들이 왕령과 대의 때문이라지만… 진짜 사람이 할 짓은 아닐 때가 많지 않느냐.”
상오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말을 들었다. 운강은 그의 눈치를 보듯 표정을 읽어내보려 했지만 고개 숙인 상오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그는 상오의 두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지나고 나면 다 또 한 번의 봄, 또 한 번의 겨울이었을 것이다.”
상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운강은 잠시 후 좀 전과 같은 울음소리를 산 너머를 향해내었고, 곧 있으니 흑막병 하나가 그들 앞으로 뛰어왔다.
운강은 능숙하게 그에게 한백의 처소를 감시하라 명한 후 상오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는 까마귀 굴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까마귀굴로 향하는 동안 운강이 그에게 말했다.
“내가 오늘 그곳에 왜 갔는지 아느냐.”
한동안 말이 없던 상오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저를 혼내러 오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운강은 상오를 정말 모르는 거냐는 표정으로 쳐다본 후 하늘을 올려다보며 크게 한숨을 쉰 후 말을 이었다.
“아니다. 사실 니가 거기 있을 줄도 모르고 간 것이다. 내가 오늘 한백의 처소로 향한 것은 그 소야라는 여자 때문이었다.”
상오는 놀라 그를 쳐다보았고 운강은 기다렸다는 듯 모든 걸 설명해주었다.
“오늘 궁 내에서 한 궁녀가 이상하리만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니는 것을 한 놈이 발견했다.
게다가 멀리서 지켜보니 다섯 걸음이면 닿을 코 앞을 스무 걸음을 돌아가는 듯이 움직이더라는 것이야. 그걸 어찌 그냥 두고 보기만 하겠느냐.
당장에 인적 드문 곳에서 그 궁녀를 따져물었지. 하지만 끈질기게 버티다가 결국 꺼낸 것이 품 안의 작은 편지였다. 둘둘 말린 작은 종이를 펼쳐서 읽어보니 내용인 즉 슨…”
상오는 운강의 이야기를 더 듣지 않고도 왠지 다음 내용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부디 그가 예상하는 내용이 아니길 빌었지만, 운강이 전해주는 사실을 그를 그렇게까지 배려해주지 않았다. 운강은 그의 눈치를 잠시 살피고는 말을 이었다.
“왕자와 궁녀가 이 나라를 떠나려고 한다.”
그 말에 상오는 가던 길을 멈추어 운강을 바라보았다. 운강은 발길을 멈춘 상오를 뒤돌아보며 거짓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상오는 눈빛이 흔들린 잠시 후 다시 그를 따라 걸으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운강이 말했다.
“너도 소식은 들었을 것이다. 한나라와의 정약결혼 말이다.”
상오가 고개를 끄덕이자 운강이 이어갔다.
“왕은 고구려의 국력을 위해서 무엇이든 내 줄 준비가 된 듯하다.
전투에서 보여 주었던 적호라는 악명은 마치 어명이어서 수행한 것이지, 본인은 온 건파인 것처럼 말이다.
뭐,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 전쟁이라면 이골이 났을 법하지.
어찌 되었든 부여와 한나라의 첩보에 따르면, 알게 모르게 우리 쪽에서 그들에게 교류라는 명분으로 전달된 곡물과 재화들이 적지 않은 듯하다.
보부상의 모습으로 고구려에서 출발하지만 어떤 보부상이 한나라와 부여의 왕궁으로 들어가겠느냐. 그러니 막근의 정약결혼도 아주 헛된 소문은 아닌 줄은 알았지만, 정말 이렇게 대대적으로 표를 내는 것을 보니 마음이 급한 듯하다.”
상오는 운강의 이야기를 듣고는 있었지만 머리에는 이미 소야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어느새 까마귀 굴 근처에 그들이 자주 찾는 돌의자에 도착했다. 운강은 자연스레 한숨을 내쉬며 그 돌에 앉았고, 상오는 앉기를 주저하다가 운강과 눈이 마주치고는 이내 앉아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보통 가난한 서민들은 말이다. 집 안의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 가보를 팔거나 망아지 따위를 판다.”
운강은 대뜸 그런 이야기를 꺼내며 주머니에서 호두를 두 알 꺼냈다. 호두는 어느새 외면이 다 닳아서 그저 둥근 구슬로 보이기도 했다. 그가 고민이 있거나 긴장될 때마다 꺼내 손에서 놀린 탓이다.
“근데, 그 재화가 다 떨어지면 그때… 아들 딸을 시장이 내놓기도 하는 법이지.”
상오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앞에 흐르는 계곡물을 바라보았다. 물소리는 잔잔하고 생기 있게 들렸지만, 운강의 이야기를 듣는지금의 기분 탓인지 오늘따라 조금 소름이 끼치는 소리 같기도 했다.
“결국에는 딸의 경우 돈이 많은 늙은이에게 시집을, 아들같은 경우에는 그런 놈들의 하인으로 보내게 되곤 한다.”
운강은 손안에 놀리던 호두 두 알을 손바닥을 펴 바라보며 말했다.
“고구려의 경우, 후자겠지. 보호를 자처하는 것이다.”
상오는 그의 말을 더 들을 수 없어 말했다.
“그래서 막근과 소야가 도망가려 한다는 사실을 대체 누가 얼마나 알고 있는 겁니까?”
운강은 답했다.
“그 운반책이던 궁녀조차 편지의 내용을 읽진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당사자인 그들과 우리 즈음으로 보여지지.”
상오는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왕에게 말씀드려야 하는 겁니까?”
운강은 그 말에 호두를 놀리기를 멈추고 상오를 한참 바라보았다. 수많은 생각이 그의 눈에 담겨 있었다. 상오는 영문을 몰라 그와 눈을 마주하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운강은 다시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소녀를 사랑하느냐.”
상오는 당황했다. 낯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 그는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 답도 내리지 않았다. 운강은 곁눈질로 그의 반응을 보고는 말을 이어갔다.
“평소의 너라면 지금, 이 상황에서 나에게 그런 것을 묻지 않았을 것이다. 당장 왕에게 달려갔겠지. 말해 봐라. 왕에 대한 반발심이냐, 아니면 단순히 그 소녀를 사랑하는 것이냐.”
상오는 말을 잇지 못했다. 운강은 고개를 돌려 상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사랑이라는 감정은 그 소녀가 겪고 있는 일들에 대한 동정이냐, 아니면 너의 진심이냐.”
상오는 그가 말한 동정이라는 단어에 갑작스러운 반발심이 들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동정이라니! 당치 않습니다!”
운강은 상오의 반응을 보고 천천히 고개를 앞으로 돌렸지만 그의 말을 믿는 기색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질문은 이어졌다.
“너는 누구의 것이냐?”
상오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구려의 것입니다.”
“고구려 국왕의 것이다.”
운강이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고구려가 어떻게 흥망성쇠를 겪더라도 흑막대는 고구려 국왕의 명만 따르는 것이다.
대장인 네놈이 이를 잊은 건 아닐 테고, 치기 어린 감정에 눈이 멀으려 하는구나. 이 나라가 겪게 될 그 어떤 일들에 대해서 너는 판단을 할 것도 없고, 판단해서도 안 되는 것을 모르느냐.”
상오는 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축 늘여 땅만 바라보았다.
“넌 네 어미에 대해 아는 바가 하나도 없는냐.”
상오는 그 말에 고개가 절로 올라가 운강을 바라보았다.
그 시각 소야는 상오를 보낸 후 자기 방에서 작은 편지를 펼쳐보았다.
해가 지기 전에 읽고 지금 다시 읽었지만, 몇 번이고 다시 읽어봐도 글자 하나 바뀌지 않고 그녀가 이해한 내용이 맞았다.
함께 이 나라를 떠나자는 것.
그녀는 자기 아버지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갑작스레 사라진 딸을 어떻게 이해해주실까.
또 세자와 함께 야반도주한 딸의 아버지가 어찌 이 땅에서 몸 성히 계실수 있을까. 막근은 정녕 자기 동생을 걱정하진 않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들다 보니 내심 막근의 용기가 어리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녀는 편지를 다시 접고는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가 그 창틀 앞에 놓여 돌에 눈이 갔다. 상오라면 어떻게 생각할까.
그에게 바깥세상은 얘기해줬듯 신나는 일로 가득하니 괜찮을 것이라고 말할까, 아니면 어찌 됐던 흑막병이니 그녀를 막으려 들까.
혹은 더 나아가서 그녀를 처단하려 할 수도 있을까. 그 순간 그녀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듯했다.
방금 막 만나서 제대로 얘기한 그였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그녀에게 무서운 표정으로 다가와 검을 내민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녀에게 상오는 더 이상 그런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를 알지 못했다. 그는 그녀의 친구일까 적일까. 그녀는 달빛을 받는 조약돌이 뒤로 길게 그늘을 늘이는 것을 보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사흘 후면… 죽거나 아니면 좀 전에 들은 그런 삶을 살고 있겠구나…”
그녀는 그 편지를 처음 받았던 순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답을 내리지 못한 채 뒤늦게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