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밝은 어느 밤, 상오는 여느때와 다름없이 한백의 집이 보이는 수풀에서 소야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소야의 표정은 국상 이후로 밝았던 적이 없었고, 그 점이 상오를 더욱 자주 찾아오게 만들었다.
그는 손 안에 돌맹이를 하나 쥐고 굴리면서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언젠가 국상이 한창이던 때에 상오는 소야를 더욱 보고싶다는 충동에 못이겨 그녀를 보러 갔더니 그녀가 서럽게 울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한백의 모든 하인은 잠들어 있었고 그녀의 방을 포함한 모든 집에 등불은 켜져 있지 않았지만, 그녀의 새어나오는 울음소리는 상오의 발걸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는 그렇게 그녀의 울음소리를 듣길 한 시간이 채 되기 전에 그녀의 방 앞으로 가 창 앞에 섰다. 그녀의 창문은 아주 조금 열려있었고, 그 틈으로 어둠 속에서 그녀가 침상 위에 웅크린 채 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잠시 시선을 내리고 고민에 빠졌다. 말을 걸고 싶었고, 작은 위로라도 전해주고 싶었다. 그는 두건을 벗어 허리께까지 오는 긴 머리를 드러내고, 가면을 턱 밑으로 끌어내렸다.
그 후 그는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면서 일부러 들리게끔 경첩 소리를 냈다. 소야가 소스라치게 놀라 외쳤다.
“누구십니까?!”
상오는 창을 열고 뒤로 물러났다. 소야는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은 상오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이전에 봤던 그 얼굴이었다.
그녀는 새까만 옷의 사내를 보자 얼굴을 아는 사내임에도 불구하고 겁에 질려 침상에서 웅크린 채 나올 생각을 못 했다. 소리를 질러야 하는 건지, 도망을 가야 하는 건지가 먼저 고민되는 그녀였다.
그 때, 상오는 지금까지 만지고 있던 작은 조약돌을 조심스레 들고 가 그녀의 창틀에 올려놓고 다시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그가 창틀에 올려 놓은 것이 무언지 궁금해 조심스레 침상에서 나와 창틀로 가까이 다가갔다.
‘돌?’
그녀는 그가 무슨 의미로 이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 그를 바라보았고, 상오는 아무 말 없이 굳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는 조약돌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어느새 그와 가까이 서 있음을 깨달았고, 그가 그녀를 해하려 하지 않는 다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그제서야 지금껏 울어 눈물자리가 가득한 볼을 닦으며 그에게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참… 고운 돌이네요.”
그녀가 한 말은 빈 말은 아니었다.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으나 이 작은 조약돌의 부드럽게 둥글고 은은한 온기를 띄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얕게 웃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상오는 그녀의 미소를 이렇게나 가까이서 직접 보며 인사를 받자 두 눈이 커지고 심장이 격하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말 없이 뜨거워진 듯 한 고개를 까딱하며 그녀의 인사에 답한 후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좀 전과는 다르게 웃음기가 사라진 채 어딘가 깊게 슬픔이 베어있었다.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저를 아시는 거죠?”
상오는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고, 소야는 그 모습을 긍정의 뜻으로 이해하며 말을 이었다.
“왠지 모르겠으나 저를 많이 아껴주시는 듯 해 감사합니다. 하지만 소녀는 이 영문 모를 친절이 마냥 달갑지만은 않습니다.”
“그대가.”
소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상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말을 내뱉고 나서야 상오는 그게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멈칫했다.
자신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소야가 눈이 커져서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느끼자 그제서야 상오는 말을 어떻게든 이어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가… 아파하지 않았으면…좋겠습니다.”
상오는 그 말을 힘겹게 내뱉고 난 후 입을 다물었다. 소야는 그의 말을 듣고 한 동안 벙쪄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거친 외모에서 베어나오는 낮고 굵은 목소리는 그 부드러움이 막근의 것과는 또 다른 묵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를 마주할 수록 자꾸 막근이 떠오르니 소야는 이 묘한 느낌에 미칠 노릇이었다.
하지만 막근과 포옹을 하거나 서로에게 연정을 표현할때와는 다른 이 설레임은 그녀에게 상오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를 조금씩 키워주었다.
그녀는 창에 더 다가가 창틀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무사님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제가 감사함을 표하기 위해 이름을 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상오는 그녀의 질문과 자신을 향한 큰 눈망울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은 이젠 주체할 수 없이 그녀를 향해 튀어나갈 듯 뛰고있었다.
“상오라고 합니다.”
그녀는 그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얕게 숙이며 인사를 올렸다.
“아시겠지만, 소녀의 이름은 소야라고 하옵니다.”
상오도 그녀의 인사에 뻣뻣하게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그녀는 그와 인사만 나누었을 뿐인데 왠지 모를 유대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처지가 떠올라 금새 눈에 슬픔이 다시 고였다.
장내에 퍼져있는 막근의 정약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궁녀들 사이에도 이미 큰 이야깃거리로 떠올라 그녀를 스치는 모든 이들이 그녀의 뒤에서 수근대며 그녀를 힘들게 했다.
이전에는 아무리 그녀가 밉더라도 막근을 만나러 가는 길이나 만나고 오는 길에는 아무도 그녀에게 눈도 마주치려 들지 않았다.
이는 그녀가 혹여라도 세자비가 될 경우 달아날지 모르는 자신들의 목을 생각해서 였을 것이다. 하지만 막근의 정약결혼 소문이 돌기 시작한 이후로는, 모두가 그녀에게 시기와 질투를 서슴없이 표현하기 시작했다.
오늘만해도 그녀는 선조의 못에서 화초들을 보살피던 도중, 몇몇 궁녀들이 그녀 들으란 듯이 그녀의 뒤로 지나가며 그녀에 대한 험담을 내뱉으며 웃었다.
그녀는 근래에 일어나기 시작한 이런 괴롭힘들을 입술을 깨물며 의연하게 버텨내보려 하지만, 집에 와서는 결국 그 설움에 매일 밤 눈물을 흘리게 된 것이다.
그녀는 마음 같아서는 막근에게 제대로 물어보고 사랑을 확인받고도 싶었지만 이러나 저러나 해도 그는 세자였고 소야 자신은 궁녀일 뿐이었다.
막근 그도 소야의 마음을 읽어 몇 번이고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어떤 말을 해도 그녀의 눈은 건널 수 없는 강을 보는 듯 했다.
그녀는 창틀에서 손을 떼 자신의 가운데 가지런히 모은 후 상오에게 힘없이 물었다.
“흑막대는 정말 이 나라의 모든 일을 다 아나요?”
상오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다. 사실 상오는 그 이야기들 때문에 최근 그녀가 걱정되어 더 자주 보려 했던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표정에서 안타까움을 최대한 가린 채 그녀에게 답했다.
“이 나라 뿐 아니라 저 멀리 부여까지도 압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그에게 계속 물었다.
“그 곳도… 이 곳과 똑같나요?”
상오는 그녀의 질문에 잠시 고민했다. 다르다면 다른 것도 많을테지만, 그녀가 처한 일만큼은 그 곳이라고 다를까.
“사람 사는 곳은 다 같습니다.”
그녀는 돌을 만지작거리며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더욱 기운이 빠져 그에게 할 말이 더 없어졌다.
그녀는 그렇게 입 끝까지 차오르는 수 많은 질문과 속내를 내비치지도 못한 채 조약돌만 만지작 하다가 이내 대화를 포기한 듯 조약돌을 창틀 위에 올려 놓으려 했다.
그 때 상오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 돌은 고구려의 돌이 아닙니다.”
소야는 그의 말이 갑작스러워 그를 바라보았다. 상오는 전과는 다르게 조금은 편안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 돌은 저 멀리 부여의 동쪽 끝 해변에서 가져온 돌입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사람 손을 거치지 않고 그렇게 둥근 돌이 되기까지는 수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소야는 그의 말을 듣고 돌을 다시 보니 정말 누군가 열심히 갈아놓은 듯 반듯하게 둥그런 조약돌이었다.
회색 빛의 그저 그런 조약돌임에도 불구하고 상오의 말을 들으니 새삼 이 조약돌이 더 이뻐보였다. 알게 모르게 조금 푸르스름한 빛이 묻어나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녀가 돌을 들어 달빛에 대고 관찰하자 상오는 그녀에게 물었다.
“외국의 모습이 궁금하신 적은 없습니까?”
소야는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을 질문받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호기심이 가득해져 그에게 물었다.
“궁금합니다. 외국이라 함은 부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녀의 질문에 상오는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부여 뿐 아니라 한나라, 옥저 등 전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야의 눈이 좀 전과는 다르게 반짝거리기 시작해서 물었다.
“저는 단 한번도 이 고구려 도성도 벗어나 본 적이 없는걸요.”
상오는 그녀의 입에 미소가 조금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내심 그녀를 기분 좋게 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들떠서 말했다.
“분명 재밌으실 겁니다.”
상오는 그녀의 창틀에 등을 대고 앉아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둘은 함께 달을 보며 상오가 부여에서 겪었던 산적떼와의 전투, 한나라와 부여의 국경에서 겪었던 소소한 일들과 문화들을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소야는 말주변은 없지만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상오의 어투가 마치 신비로운 옛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기분이 한층 나아져서 어느새 창틀에 두 손으로 턱을 받치고는 그와 함께 달을 바라보며 그의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꾸미지 않은 잔잔한 농담이 좋았고, 그녀가 사는 동안 절대 겪을 일 없는 거친 전투 이야기도 듣다보니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다.
상오는 그녀가 웃을 수 있도록 몇몇 부분은 과장을 하기도 했고, 그녀는 그런 그의 말들이 뻔히 과장인걸 알면서도 굳이 따지지 않았다. 달빛 아래에 둘은 그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게 이야기를 주고 받았고, 상오는 이 순간이 그저 꿈같았다.
그렇게 한창을 달이 한 편으로 기울도록 얘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한백의 집이 그대로 내려다 보이는 산등성이에서 특이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곳은 바로 상오가 잠복하던 자리였다. 상오는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그 소리가 다시 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렸을 때, 그는 흑막대가 서로를 호출할 때 쓰는 소리임을 알고 정신을 차려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 그만 가 보겠습니다. 부디 평안한 밤 되시기 바랍니다.”
소야는 갑작스러운 그의 딱딱한 태도에 놀래 제대로 인사도 못 했다. 그는 소야에게 말을 끝내자 마자 대답을 기다릴 것도 없이 바로 담장을 뛰어올라 사라졌다.
그녀는 잠시 멍해져서 그가 사라진 방향만 우두커니 바라봤지만, 이내 기분이 좋은 듯 돌을 안고 창문을 닫으며 잠에 들 준비를 했다.
상오는 산맥을 잰걸음으로 빠르게 올랐다. 그가 잠복하던 곳에 거의 다다랐을 때, 그는 조용히 검을 뽑아 주변을 살피며 다가갔다. 잠복지점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였다.
누군가 상오의 뒤로 와 그의 왼팔을 팔뚝으로 묶듯 제압한 뒤 그의 목에 단도를 들이대며 말했다.
“까마귀가 미쳤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