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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콘 Sep 08. 2023

[차대왕] 마침표를 찍는 이

막덕의 방에서 막근은 말문이 막힌 채 막덕을 바라보았다. 동생은 그에게 거절의사를 밝혔고 이제 그는 하나뿐인 혈육을 두고 이 나라를 떠나게 되었다.



그에게 막덕은 덩치나 나이와 상관없이 늘 어린 말괄량이일 뿐이었다. 자신이 떠난 후 막덕이 겪게 될 온갖 고생도 설명해 보았다.



하지만 막덕의 눈빛은 그의 형한테 일말의 여지도 주지 않았다.



되려 막덕은 전보다 더 자신감이 넘쳐보였고, 막근은 그를 더 붙잡을 수 없었다. 




“잘 알겠다. 어쨌든 대견하구나.”




“난 형님이 더 대단하오. 사실 아직도 형님의 마음이 이해되진 않소.”




“그래…”




막근은 창밖의 어둠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너 또한 그럴 날이 올 게다. 그땐 이 못난 형보다 더 현명한 삶을 살길 바란다.”




막덕은 그의 체념한 듯한 말투에 그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국상 전까지만 해도 막근은 참 키도 훤칠하고 멋진 사람으로 보여졌는데, 어느새 막덕도 덩치가 커져서 그의 형과 시선이 같은 선상에 있었다.



같은 높이로 막덕이 보는 막근은 어느새 참 연약해 보였다. 막덕은 작은 서신을 꺼내 형에게 건넸다.



막근은 편지를 받고 막덕을 바라본 후, 바로 그 앞에서 열어 보았다. 




내가 오늘 궁 서문으로 술과 음식들을 보낼 것이오.




그러니 아마 병사들은 오늘 자리를 비우거나 잔뜩 취해 있을 것이오.




궁에서 오십리 정도 남쪽으로 향하면 두 노부부가 사는 집이 있을 것이오.




두 사람 다 눈이 하얗게 멀었으니 형님을 알아보진 못할 것이오.




그곳 마구간에 괜찮은 말 두 필과 재화가 될 만한 것들과 약간의 먹을 것들을 실어두었소.




더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오.




“어찌… 괜찮겠소?”




막덕의 말에 막근은 두 눈에 눈물이 가득해서 동생을 바라보았다. 




“고맙다… 내 이 은혜는 잊지 않겠다.”




“잊으면 안 될 것이오. 아바마마께 혼나고 싶지 않다면.”




막덕이 멋쩍게 웃자 막근도 웃음이 나왔다. 막덕은 헛기침을 한 후 형에게 말했다. 




“어서 가시오. 어디서든 잘 지내시고 언젠가 꼭…”




막근은 동생이 말을 하다 말아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막덕은 입술을 깨물고 무언가를 힘겹게 삼켜내고 있었다.



막근 또한 그런 동생을 보니 마음이 아파 그의 동생을 안아주었다. 막덕은 울먹거리며 낮게 말했다. 




“언젠가… 꼭 다시 만납시다, 형님.”




막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막근은 동생의 손을 꽉 잡으며 마지막인 듯 그와 인사했고, 막덕이 떠난 후 그는 바로 궁으로 향했다.



선조의 못에 도달한 그는 예를 갖추어 황금의자에 절을 올린 후 그 앞에 앉아 말없이 못을 바라보았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못난 아들을 용서해주시옵소서…”




 그는 첫 마디를 끝내기도 전에 눈물을 쏟아 내었다. 그리고 더는 말을 이을 새도 없이 울음이 목구멍을 밀고 올라왔다.



그는 한참을 울고 난 후에야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음을 깨달았다.



몇 시간 후면 해가 질 것이고, 약속된 시간, 약속된 장소에서 소야와 함께 새 삶을 시작할 것이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궁으로 향했다. 그때 궁 담벼락 그늘 한쪽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막근세자저하.”




막근이 깜짝 놀라 어두운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진당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당은 그를 향해 아무 말도, 손짓도 하지 않고 그저 지그시 바라보았다.



막근은 진당이 자신에게 뭔가 긴히 할 말이 있다는 걸 느꼈고 그를 향해 담벼락 그늘로 다가 갔다.



진당은 그를 안내하듯 더 안쪽 그늘로 들어갔고, 이내 막근은 궁에 이런 곳이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어두운 곳에 진당과 함께 마주 보게 되었다.



진당은 평소에 세자를 바라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마치… 화가 나 있었다.



진당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세자저하…”




막근은 무언가 압도당할 듯한 기운에 갑자기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진당이 화가 나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막근의 대답을 기다릴 것 없이 진당은 말을 이었다. 




“지금 무슨 일을 꾸미시는지 소인이 잘 알고 있사옵니다.”




막근은 여전히 대답하지 못한 채 침만 삼켰다. 이미 수차례 떠도는 소문으로 진당이 비범한 인물이라는 것을 듣기는 했으나 평소 그저 세자와 신하의 관계 이상으로는 가까워져 본 적이 없으므로 일면도 판단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얘기하는 것을 볼 때, 진당은 다 알고 있다고 보여졌다.



막근은 기세에 눌리지 않으려는 듯 눈에 힘을 주고 진당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해주시더라도 내 결심은 변함없습니다..!”




진당은 그의 반응을 보며 생각했다. 이 어린 세자에게 지금 수성이 꾸미는 일을 말하는 것이 옳을까.



수성이 알고 있다는 점이라도 말을 해주어야 하는 것일까. 대체 자신이 무슨 상황을 벌이려는지 알고는 있을까… 진당은 그에게 말했다. 




“세자저하로 인해 막덕세자께서도 위험해지실 것은 아십니까?”




막근은 진당의 말에 놀라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진당의 흔들림 없는 표정과 눈빛은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분명 자기 도피계획은 전부 수면아래에서 진행되고 있었을 텐데, 대체 무슨 위험이 막덕에게 처해진다는 건지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그런 질문을 받으리라고는 더욱 생각한 적 없었다.



막근은 어렵게 되물었다.




“위험이라니..?”




진당은 막근에게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걸 설명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흑막병이 어딘가에서 분명 막근이 사라진 것을 찾고 있을 것이고,



잠시 눈 속임으로 자신과 막근이 보이지 않게 암막을 쳐 놓았지만 누구라도 가까이 오게 되면 암막 속 기척을 느낄 수 있을 것이었다.



진당은 세자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다시 물었다. 




“막덕세자는 어디 계십니까?”




진당이 묻자 막근은 정신을 차리려는 듯 큰 숨을 내쉰 후 말했다. 




“막덕은 오늘 서문에서 병사들과 술자리를 할 예정이라 들었습니다.”




진당은 그의 말을 듣고 눈을 감고 생각했다.



그는 막근이 더는 믿음직스럽지 못했기에 말을 아끼기로 했다. 




“일단 소인은 그만 물러가도록 하겠습니다. 허나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저하.”




진당이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나자 갑자기 그림자가 모두 진당의 등 뒤로 사라지며 그곳이 다시 익숙했던 담벼락으로 돌아왔다.



막근은 어리둥절해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자기 방을 향해 발길을 빠르게 옮겼다. 




진당은 자기 침소로 돌아와 일단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앞으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참 많은 것들이 달라질 터였다.



알면서 모르는 척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자기 기준에 맞게 행동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내려야 하는지 그는 고민했다. 하지만 사실 그는 이미 마음이 어느 정도 기울어 있었다.



옳지 않은 일을 지나칠 수는 없었다.



그가 지금 고민하는 것은 정말 마지막으로 이런 행동이 괜찮을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렇게 그가 앓는 소리를 내며 눈을 감고 고민하고 있으니, 율이 차를 들고 와 그의 앞에 놓고 옆에 앉아 물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진당은 율이 내온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율을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잊고 있었던 그녀의 존재에 고민이 또 하나 늘었다.




‘이 아이는 어째야 하나…’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이제 이 아이의 운명도 함께하게 되었다. 혹여나 자신이 수성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하게 된다면, 이 영특하고 재능있는 아이도 생을 다하게 될 것이었다.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그는 허리를 숙여 율에게 더 가까이 얼굴을 내밀며 물었다. 




“율아. 너는 전에 나에게 도술을 알려달라 부탁한 적이 있다.”




율은 그 얘기를 기억하는 진당에게 감동한 듯 미소를 살짝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당은 그녀에게 말했다. 




“이따가 해가 거의 다 지면 내가 너에게 길잡이를 하나 붙여줄 것이다. 너와 길잡이는 조금 추운 산등성이 마을까지 함께하게 될 것이야.



하지만 길잡이도 그 이상으로는 길을 모른다. 너는 길잡이가 안내해 준 곳에서부터 스스로 길을 알아내 내가 지냈던 높은 산 위의 도원에 가야 한다.



내가 서신을 하나 적어 줄 테니, 너는 그 서신을 그곳에서 만난 분께 드리면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생활하게 될 것이야.”




율은 그의 말에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하지만 진당은 여전히 근심 가득한 표정이었고 율은 그에 바로 미소를 지우고 물었다. 




“저와 함께 가지 않으십니까?”




진당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피고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대답했다.




“나는 그곳에 다시 갈 수 없단다. 그리고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좀 있구나.”




율은 아무 말없이 그 자리에서 진당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할 말을 겨우 참아내는 듯했다. 진당은 이어 말했다.




“율아. 넌 참 영특한 아이란다. 하지만 하나는 꼭 내가 말한 그대로 기억해다오.”




율을 향해 몸을 튼 진당이 말했다.




“사람들에 대한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율은 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진당은 어서 가서 짐을 싸라고 했고, 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방을 나오려다가 입구에서 뒤돌아 물었다.




“다시 뵐 날이 있는 겁니까?”




진당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뜨고는 그녀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볼 수 있을게다.”




율은 그의 미소를 보고 자기 방으로 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진당은 창밖을 내다보며 이전에 태조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연에만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생각했다.




‘지금, 이 모든 게 역사의 이치라 한다면, 나는 그것을 부정하는 것일 테지.’




잠시 후 작은 봇짐을 멘 율이 그의 방에 돌아왔다. 아이는 한껏 기분이 들뜬 표정으로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진당은 아이의 미소를 미소로 화답하면서 일어나 책장에서 두루마리를 하나 꺼낸 후 아이와 함께 마구간으로 갔다.



마구간에는 진당의 말만이 있었다. 율은 말했다.




“말을 타고 갑니까? 소녀 말은 타본 적이 없사옵니다.”




진당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니다. 너를 지켜 줄 길잡이는 따로 있단다.”




그가 두루마리를 펼치자 두루마리에서 먼지와 같은 가루들이 터져 나와 두 사람 앞에 형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몇 초 만에 두 사람 앞에는 딱 율이 타기 좋아 보이는 당나귀가 하나 서 있었다.



율은 두 눈이 휘둥그레 해져서 진당에게 말했다.




“이게 무업니까?”




진당이 당나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길잡이는 아주 빠르고 강하단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더라도 너를 끝까지 지켜 줄 거란다. 이 위에서 피곤해 잠이 들더라도 걱정 말거라.”




그는 율의 옆구리를 들어 올려 율을 당나귀에 앉혔다. 그러고는 품 안에서 작은 서신을 하나 꺼내 율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절대 잃어버려선 안 되는 것이다. 알겠지?”




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품 안에 편지를 잘 넣었다. 그는 율이를 한 번 꼬옥 안아주고는 당나귀를 출발시켰고, 당나귀는 부드럽게 나아가기 시작했다.



율은 고삐를 쥐고도 계속 고개를 돌아봐 진당을 바라보았고, 진당은 그녀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율은 미소가 싹 가신 얼굴로 그에게 손을 흔들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며 멀어졌는데, 눈물을 훔치는 듯한 손짓이 보였다.



그렇게 율을 보내고 나자 진당은 다짐할 수 있었다.




‘이치가 무엇이 되었든 간에, 난 내가 믿는 대로 행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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