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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콘 Sep 08. 2023

[차대왕] 붉은 새벽의 시작

 해가 지고 달이 빛을 내기 시작하자 소야는 불안한 마음에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궁 뒤편으로 이어져 있는 산 중턱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의 시간이 어느새 잠시 후로 다가온 것이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막근을 만나 부디 조금만 천천히 생각해 보자고 그를 타일러볼 생각이었다. 더는 지체할 수 없는 시간이 되자 그녀는 마음이 급해져서 황급히 탁자를 치며 일어났다.



그 바람에 화병에 있던 도라지 꽃이 바닥에 우스스 떨어졌지만, 그녀는 다시 정리할 생각은 못 하고 신을 신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머리를 급하게 만진 후 아버지에게 인사를 올리러 한백의 방 앞으로 갔다. 




“그 말이 사실이오?”




그녀는 한백의 방에서 나오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그 자세 그대로 멈추어 방에서 새어 나오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소. 우리가 나서서 이를 멈추어야 하지 않겠소.”




진당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한단 말이오. 그 또한 왕의 뜻 아니겠소…”




“장군! 세자 뿐만 아니라 장군의…”




“세자를 시해하려는 것이 다름 아닌 대왕이시라면, 그 뜻이 분명 있으실 거란 것 아니겠소.”




소야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아 소리가 나는 것을 겨우 참아냈다. 대왕은 오늘 밤 막근을 살해하려는 것이다. 그녀는 더 생각할 것 없이 바로 한백의 말 위에 올라탔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가 죽는 것만은 안 되었다. 그녀가 올라탄 말이 울자 진당과 한백이 놀라 방문을 열었다. 




“소야! 무엇하는 게냐!”




한백이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소야는 한백을 바라본 후 슬픈 표정으로 말 머리를 돌렸다. 그렇게 말이 집에서 달려 나가자 진당은 한백의 어깨를 잡고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며 외쳤다.




“지금 소야도 죽게 생겼단 말이오, 장군!”




한백은 진당의 말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몇 시간 전, 까마귀굴 안에서 상오가 운강에게 왕명을 전달하자 그를 따로 한쪽으로 끌고 가 귓속말했다. 




“너는 오늘 이 임무에서 빠지도록 해라. 일을 그르칠까 겁난다.”




상오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주먹만 세게 쥐었다. 운강의 말을 이해하지 못 하는 것도 아니었으나, 소야가 죽는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운강은 이를 꽉 문 상오를 보며 어깨를 한 번 토닥인 후 다시 오와 열을 맞추어 서 있는 흑막병들을 향해 임무 분담을 시작했다.



그리고 작전 개시 시간에 맞추어 모두가 까마귀 굴에서 뛰어나갈 때 운강은 마지막으로 나가며 상오에게 말했다. 




“분명 언젠가는 내게 감사했다며 술을 사주길 기대하마.”




그렇게 운강이 나간 후 상오는 운강과 함께 자주 갔던 개울가로 가 하늘을 바라보며 앉았다. 자신에게 걸려 있는 모든 관계들과 일들이 하나둘 씩 떠올랐다.



왕이었던 아버지, 형제일 수 있었던 두 세자,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 셋 중 어느 하나도 그에게 결정권을 쥐어 주지 않았다.



이 왕의 까마귀라는 별칭도 마찬가지로… 그는 손에 쥐고 있는 돌을 계속 만지작대며 소야를 떠올렸다. 정말 운강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 자신이 소야를 더 위험하게 만드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생각하니 갑자기 무엇 하나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때, 그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와 그는 고개를 돌렸다. 까마귀굴의 대장장이였다. 그는 입에 궐련을 문 채 그의 옆으로 와 운강이 늘 앉던 자리에 무심하게 앉았다.



상오는 그가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으나, 이상하게 지금은 누구보다도 대화를 많이 나눈 운강보다 편한 느낌이었다. 상오는 개울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선생께서 고국에서 사랑했던 궁녀를 기억하십니까?”




질문 후 대장장이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그저 개울가를 바라보며 궐련만 계속 피워댔다. 상오는 계속해서 물었다.




“아름다웠습니까? 지금 생각해도?”




그의 질문에 대장장이는 피식하고 웃었다. 상오는 처음에 그가 질문을 비웃는 줄 알았으나 눈빛을 자세히 보니 어느새 그 주름 가득한 지친 눈꺼풀 아래 눈동자에 한 궁녀가 보이는 듯했다. 대장장이는 길게 연기를 뿜어내 마치 한숨을 쉬는 듯했다. 상오는 말했다.




“저는 지키고 싶은 여자가 있는데, 결국 지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까마귀는 어딜 가나 불행한 소식만을 전한다고 하는데, 결국, 그녀에게마저도 저는 까마귀였던 것 같습니다.”




어느새 상오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울먹였다. 대장장이는 결국 눈물을 훔쳐 내는 상오를 바라본 후 밤하늘을 향해 연기를 길게 뿜어내고는 짤린 혀로 인해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가.”




상오는 처음 듣는 대장장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대장장이는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더니 그의 손에 쥐여주었다. 손가락 두 개 크기의 주머니였는데 이게 무언지 눈으로 묻자 대장장이는 이마를 톡 치고는 눈을 감으며 고개가 뒤로 젖혀지는 시늉했다. 그러고는 상오의 어깨를 꽉 쥐며 다시 말했다.




“가.”










소야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막근의 집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말을 탈 일이 없어 승마 경험이 많지 않던 그녀는 얼마 가지 못해 말에서 굴러떨어졌고, 놀란 말은 그녀를 떨어트린 후 그대로 달려 눈앞에서 사라졌다.



소야는 발목을 부여잡았다.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었고 머리가 헝클어졌다. 그녀는 이를 갈며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나 다리를 절뚝거리며 계속해서 걸었다.




‘조금만 더 가면… 조금만 더 가면…’




그녀는 몇 번이고 넘어지고 발목의 통증이 밀려와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기어가다시피 도착한 막근의 처소는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다.



그의 하인들의 시체가 방 앞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는데, 개 중에는 도망가다가 죽은 듯해 보이는 어린 궁녀들도 있었다. 




“저하!”




소야가 외쳤으나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설마…’




그녀는 절뚝거리며 그의 침소 앞까지 가 문을 열었다. 흰 수면복 차림의 막근은 칼을 든 채 벽에 등을 대고 흑막병 네 명과 대치하고 있었다. 소야를 발견한 한 흑막병은 순식간에 그녀의 목에 칼을 대고 움직이지 마라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소야! 어찌 여길 왔단 말이오!”




막근은 벽에서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칼만 앞으로 내민 채 소야에게 외쳤다. 막근을 마주한 채 서 있던 흑막병은 자기 눈앞에서 풀잎처럼 흔들리는 막근의 칼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밀어내며 말했다.




“왕명이다.”




그 말과 함께 순식간에 막근의 하얀 옷 위에 새빨간 줄이 대각선으로 그어졌다.



곧이어 고운 그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고 소야는 자기 눈으로 본 걸 믿지 못해 비명을 질렀다.



막근은 쓰러지면서까지 소야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고통으로 가득한 그의 눈을 소야를 바라보며 눈물지었고, 침상에 눕는 와중에도 고개는 여전히 소야를 향해 있었다.



그의 입은 무언가 열심히 말하려 했으나 터져 나오는 피로 입술의 움직임조차 읽을 수 없었다. 소야는 그 광경을 받아들이지 못해 이마에 핏대가 서도록 울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막근을 벤 흑막병은 소야도 마저 베라고 손짓한 후 검을 닦으며 방을 나서려 했다. 그때였다.




“멈추어라.”




상오였다. 그는 대장장이가 건네준 주머니를 들고 소야의 뒤를 쫓아 한백의 처소로 갔었다.



하지만 이미 한백의 말과 함께 사라진 소야를 확인하고는 막근의 집을 향해 내달리던 중 막근의 집 앞에서 헐레벌떡 뛰어가고 있는 소야를 볼 수 있었고, 그녀를 향해 칼을 뽑고 뛰어가려는 세 흑막병을 발견했다.



상오는 황급히 그들의 뒤로 가 대장장이가 건네준 주머니를 그들의 발아래로 던졌고, 그 주머니는 꽃씨와 같은 가루를 날리며 그들을 감쌌다. 이내 그들은 쿨럭거리다가 그 자리에서 기력이 빠지는 듯 무너졌고 잠들었다.



그 찰나에 막근의 집에서 소야의 비명이 들려 바로 뛰어 들어 온 것이었다.


 흑막병들은 상오를 보자 바로 무릎 꿇어 예를 갖추었다. 소야는 자신에게 무릎 꿇는 줄 알고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고는 상오와 눈이 마주치고 겁에 질려 막근의 시체를 향해 뒷걸음질 쳤다.



상오는 그녀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자신을 보는 것이 상당히 마음 아팠으나 별 말하지 않았다. 막근의 숨이 이미 멎은 것을 눈으로 확인한 그는 흑막병들에게 말했다. 




“이만하면 됐다. 왕명은 지켜졌다.”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막근을 벤 자가 말했다.




“허나 대장, 운강대장님께 전해 듣기로는 저 여인도 처리해야 하고 목격한 이 모두 죽이라 명하셨나이다.”




상오는 뒤돌아 그자를 바라보았다. 운강의 말이 맞다. 지금 상오의 행동은 본인이 보아도 비정상의 범주였다. 그걸 알기에 그도 더 반박할 수 없어 큰 소리로 응수했다.




“네놈의 대장은 누구냐!”




무릎 꿇고 있던 네 명의 흑막병들이 모두 움찔했다. 상오는 이쯤 하면 알아먹었으리라 생각하고 소야의 모습을 보았다. 이미 명을 다한 막근을 끓어안고 서럽게 울고 있는 그녀를 보고 상오는 생각했다.




‘평생을 살아도 내 것이 아니겠구나.’




그는 착잡한 마음으로 방을 나서려 했고, 그 순간 칼을 뽑는 소리가 들렸다.




“왕명보다 높은 것은 없습니다. 대장.”




한 명이 칼을 뽑자 나머지가 다 칼을 뽑아 그에게 겨누었다. 상오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의 손이 칼집으로 향하자 흑막병들이 한꺼번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막근의 방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재빠르게 공격을 피하며 어느새 소야를 등지고 선 상오는 막근의 칼까지 들어 쌍검으로 네 명의 부하들과 대치하게 되었다.




‘단 한 번이다.’ 




그는 생각했다.




‘단 한 번이라도 내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겠다.’




그가 정신없이 공격받아내는 사이 그의 귀에는 막근을 껴안은 소야의 공포에 질린 울음소리가 가득했다.



상오는 등 뒤의 소야가 다치지 않게 지켜내며 전투를 하려다 보니 자기 힘을 제대로 발휘하기가 힘들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싸움은 해 본 적이 없었던 그는 제약된 공간에서 행동마저 제약되었고, 어느새 흑막병 중 한 명이 그의 왼팔을 벴다.



그는 오른손에 쥔 칼로 그의 칼을 위로 쳐 내 벗겨낸 후, 왼손의 칼로 그의 명치를 조준해 찔러넣었고 그렇게 한 명이 쓰러졌다.



명치에 칼이 꽂힌 채 흑막병은 자기 대장을 향해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눈빛으로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지자 나머지 세 명은 더욱 거세게 상오를 공격했고, 그는 힘에 부치기 시작해 어느새 피를 흘리는 왼팔은 늘어놓은 채 오른손으로 소야를 향해 오는 공격을 방어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굵직한 목소리가 막근의 처소 전체에 울려 퍼졌다. 




“소야 있느냐!”




한백의 목소리와 함께 방문이 부서졌다. 한백은 칼을 든 채 씩씩대며 방 안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도깨비 같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의 패기에 놀란 흑막병들은 그를 향해 검을 겨누었고, 상오는 언제 베였는지 모를 피가 흘러내리는 팔을 부여잡고 구석으로 피한 뒤 말했다.




“소야를 데리고 도망치시오!”




“뭣이 어째?!”




한백의 눈에는 모두가 죽일 놈이었다. 그는 기합과 함께 두 흑막병과 싸움을 시작했고, 노장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했던 그의 칼솜씨에 두 까마귀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한백이 칼을 휘두르는 속도도 속도였지만 매 번 그가 휘두르는 그 힘이 과연 수성과 함께 고구려를 가장 넓은 영토로 확장시킨 주역이 될 만 했다.



그는 그의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칼을 오른쪽으로 빗겨 쳐 낸 후 그대로 칼자루 끝으로 옆에 있던 이의 머리를 가격했고, 입에서 피를 흘리며 뒤로 물러난 그 흑막병은 허리춤에 차 있던 주머니를 허리띠에서 뜯어내 손에 쥐었다.



상오는 그가 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조심..!”




상오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방 안에 주머니에서 나온 흑색 가루가 가득 퍼졌고, 그와 함께 살을 뚫고 지나가는 쇳소리가 들렸다.



소야가 잔기침하며 눈앞의 연기를 헤쳐보니 한 흑막병이 한백의 배에 칼을 찔러넣은 상태로 서 있었고, 한백은 그 칼을 빼지 못하게 맨손으로 날을 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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