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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콘 Sep 08. 2023

[차대왕] 피로 물든 달

진당은 그의 말에 일일이 답할 수 없어 계속 달렸다. 그의 머리 옆으로 화살이 스치기도 했고, 진당의 발밑으로 무언가가 던져지기도 했으나, 진당은 마치 말 자체가 된 듯이 자유자재로 피하며 달렸다.



하지만 운강과 그의 부하들을 떨쳐 내기 힘들어 보이자 진당은 말 머리를 돌리며 달리기를 멈추었다. 막덕은 외쳤다. 




“왜 멈추는 겁니까!”




진당은 이미 말을 빠르게 달리느라 지칠 대로 지치기도 했고, 하나하나 막덕에게 설명하자니 답답하기도 해서 그의 말에 답 할 것 없이 일단 말에서 내려 오른손을 길게 옆으로 뻗고 주먹을 움켜쥐듯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길 양쪽의 나무 두 그루가 경직되듯 흔들렸고, 말에 탄 두 흑막병이 두 사람을 향해 말을 달리며 칼을 뽑자 막덕은 조급해져서 말에서 내려 진당의 옷깃을 당기며 외쳤다. 




“뭐 하는 겁니까!”




‘조금만 더..’




진당은 그들의 말발굽에 집중하며 생각했다. 어느새 진당 옆 막덕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서른 걸음 쯤까지 다가오자 막덕은 울먹거리며 외쳤다. 




“진당!”




그때, 진당이 뻗어 있던 오른손을 왼쪽으로 당기며 자세를 낮추자 한순간에 양쪽 나무가 길 안쪽으로 휘어들어왔다. 하지만 괴이하게도 꺾이지는 않았다.



두 그루의 나무가 길에 누우면서 한 흑막병은 그대로 나무 기둥에 말을 부딪혔고, 한 명은 가까스로 위로 뛰어올라 나무를 넘어섰다.



하지만 그에 맞춰 진당이 왼손을 아래에서부터 위로 끌어올리자 흙과 돌들이 하늘을 향해 쏘아올라가면서 흑막병이 탄 말과 그를 관통했다.



진당은 거친 숨을 내쉬며 울기 직전의 막덕에게 말했다. 




“가시지요…저하…” 




그렇게 말을 타려 하는 와중에 화살이 진당의 머리 위 관을 뚫고 지나갔다.



흘러내리는 백발과 함께 진당이 황급히 무너뜨린 나무 너머를 보자 외눈의 운강이 화살을 등 뒤에서 한 발 더 꺼내고 있었다. 진당은 막덕을 황급히 말에 태우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뚫려 있는 길이 아닌 다른 수풀로 말머리를 틀어 운강의 시야에서 사라지며 등 뒤의 막덕에게 말했다. 




“제가 아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셔서 한동안…”




진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둘이 탄 말이 무언가에 걸린 듯 앞으로 고꾸라졌고, 진당과 막덕은 바닥에 심하게 굴렀다. 진당이 고통을 뒤늦게 감지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흑막병들이 두 사람을 포위하고 있었다.



진당은 자기 마구에 달려 있던 칼집을 풀어 막덕에게 던졌고, 막덕은 바닥에 널브러져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진당이 던진 칼도 받지 못해 바닥에 던져진 칼을 땅에 꽂아 의지하며 일어나야 했다.



흑막병들도 그들의 모습에 칼을 뽑고 천천히 그들을 감싸오기 시작했는데, 그들 중 한 명이 먼저 막덕에게 달려들었다.



막덕은 처음 오는 공격은 받아 냈으나 그다음으로 오는 발차기를 막지 못해 고꾸라졌고, 진당은 그를 도우려던 찰나 자신에게 날아온 칼을 막아 내기 위해 지팡이를 높이 들어야 했다.



공격은커녕 방어도 겨우 해내던 도중 진당은 도무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손을 하늘로 뻗었고, 큰 바람이 일어 두 사람 주변의 모든 흑막병을 띄우고는 그대로 땅으로 손을 감아내려 그들을 메다꽂았다.



흑막병들은 적잖이 당황한 기색으로 황급히 일어나서 좀 전과는 다른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진당은 땅을 솟아오르게도 해 보고 바람을 불러일으켜보기도 했지만, 자신을 감싼 적들이 쉴 새 없이 공격해 오는 바람에 제대로 집중도 할 수 없었고, 그들은 또 민첩하게 진당의 도술을 피해내고 있었다.



겨우 한 두 명 지치게 했을 때쯤 막덕을 돌아본 진당은 막덕이 바닥에 누워서 칼날로 겨우 흑막병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음을 알아채고 막덕을 공격하던 흑막병을 날려보냈지만, 막덕은 이미 기진맥진해 보였고 진당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하! 정신 차리셔야 합니다!”




진당의 말에 막덕은 일어나 자세를 고쳐잡으며 외쳤다.




“네 이놈들! 네놈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는지 아느냐!”




하지만 흑막병들은 그들을 향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대열을 유지했다. 빈틈 하나 없이 단단해 봉는 그들의 칼날은 어느새 막덕이 아닌 진당을 향하고 있었다. 진당은 아직 시도하지 않은 많은 도술들이 있었으나, 막덕마저 다칠까 겁이나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였다. 무언가 수풀을 크게 흔드는 소리가 들렸고, 거친 발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발소리가 아닌 네 발 짐승의 발소리 였는데, 그 기세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흑막병들도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무슨 일인지 궁금해했다.



수풀이 흔들리는 소리는 그들의 주변을 계속 맴돌며 그들을 혼란하게 했고, 진당은 상당히 어두운 기운이 다가왔음을 감지했다. 일찍이 고구려에서 지낸 이후로 이런 기운은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다.



그의 등에 식은땀이 흐르고 손이 떨릴 정도로 공포를 가득 품은 그 기운은 계속 그들을 맴돌며 수풀을 흔드는 듯한 행동을 하더니 이내 멈추었다.



순간 흑막병들은 진당이 아닌 수풀들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리려 했고, 진당도 흑막병이 아닌 수풀 쪽을 향해 자세를 낮추고 돌아보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날카로운 짐승 소리와 함께 흑막병 한 명이 나가떨어졌다.



모두가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자 시커먼 덩치에 빨간 두 눈의 괴수가 다시 수풀로 사라졌고, 다른 흑막병이 재빨리 나가떨어진 동료를 향해 달려가 상태를 확인해보니 그는 이미 숨이 멎어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다른 이들에게 말을 하려는 찰나 다시 수풀에서 튀어나온 그 괴수는 그 흑막병의 머리를 붙잡고 높이 들었다가 바닥에 몇 번이고 내려찍었다. 그제야 모두 그 괴수가 무엇인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늑대의 형상이었으나 두 발로 서 있었다. 늑대는 그렇게 흑막병을 죽인 후 그의 시체를 던지고는 가슴을 피며 크게 울었는데, 그 기세가 온 산에 울려 퍼질 정도로 대단했다.



진당은 살면서 실제로 악귀를 접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적잖이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는 이전에 자신이 배웠던 것들을 기억해내려 애쓰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고, 옆의 막덕은 늑대의 울음소리에 겁 먹고 바닥에 웅크린 채 머리를 감싸고 흐느끼고 있었다.



어느새 흑막병들은 진당과 막덕을 포위하던 대열을 변경해 늑대를 향해 칼을 겨누고 있었다. 늑대는 울고 난 후 씩씩대며 숨을 돌리다가 천천히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그 기세에 몇몇 흑막병들의 칼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정해진 듯한 손짓을 어깨 위로하며 남은 이들에게 신호하고는 허리띠에서 폭탄을 뽑아 늑대에게 던졌고, 발치에서 폭탄이 터지자 늑대는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고, 폭탄으로 인해 자욱한 연기 안으로 모든 흑막병들이 일제히 공격을 감행했다.



몇몇은 연기 안으로 그대로 돌진해 들어갔고, 두 명은 양 옆의 나무 위로 재빨리 타고 올라가 활시위를 연기 속을 향해 겨눈 채 상황을 지켜봤다.



몇 번의 비명과 칼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짐승이 으르렁대는 소리가 연기 속에서 울려 퍼졌다.



연기가 조금 풀려서 슬슬 무언가 형태가 보이기 시작할 때쯤, 나무 위 두 명 중 한 명에게 흑막병의 시체가 던져졌고, 놀란 흑막병은 활시위를 풀지도 못한 채 그대로 던져진 동료 시체에 맞고 나무 밑으로 추락했다.



이에 다른 편 흑막병은 위치를 확인할 것도 없이 화살을 날렸고, 화살을 쏘자마자 나무에서 내려와 수풀에 몸을 숨긴 채 연기가 걷히길 기다렸다. 곧 연기가 걷히자 진당은 상상도 못 할 광경을 보게 되었다.



늑대는 온몸 구석구석 상처가 나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당당하게 서 있었고, 조금은 지친 건지 한 손을 나무에 대고 숨을 헐떡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변으로 모든 흑막병들이 죽어 있었는데, 어떤 이는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진당은 그제야 늑대의 모습을 차분히 관찰할 수 있었고,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길게 늘어진 검은 머리처럼 얼굴 정 중앙부터 등 뒤까지 길게 늘어져 있는 검은 띠, 그리고 그보다 아주 조금 옅지만 여전히 검은 흑막병의 옷과 같은 몸, 그리고 무엇보다 저 눈빛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어디서 본 눈빛인지 도저히 짚어내지 못해 고민을 더하던 중, 늑대는 네 발로 천천히 수풀에서 활시위를 당기고 있던 흑막병을 향해 다가 갔다.



흑막병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를 보고 마치 결심이라도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화살을 날렸고, 늑대는 재빠르게 옆으로 뛰어 피한 후 흑막병을 덮쳤다.



곧 수풀과 그 옆 나무에 피가 튀었고, 비명도 질러보지 못한 채 마지막 흑막병은 죽어 버렸다. 늑대는 피가 흥건한 얼굴을 수풀에서 들어 올려진당을 바라보았다. 


진당은 말했다.




“그대는 왕의 까마귀 아닌가!”




늑대는 멈칫했다. 하지만 대답하지는 않았다. 진당은 확신했다.




“그대는 예전부터 한백의 처소를 염탐했지. 난 알고 있었네.”




진당은 식은땀으로 온몸이 축축해져 있었다. 긴장감이 흐르는 대립양상이었다. 




“자네… 소야를 사랑했는가?”




늑대는 그 말에 두 발로 서서는 다시 한번 크게 울었다. 하지만 이번엔 한 번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마치 괴로워서 미칠 듯한 느낌으로 사방으로 고개를 흔들며 여러 번을 크게 울었다.



그 소리에 나뭇잎들은 떨어졌고, 땅에 굴러다니는 여러자루의 칼들은 진동했다. 진당은 귀를 부여잡고 겨우 그를 진정시키려 말을 꺼내려 했지만, 그가 말을 하기도 전에 늑대의 울음소리는 갑작스럽게 멈췄다.



막덕이 늑대의 배에 칼을 찔러넣은 것이다. 막덕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늑대의 몸에 칼을 꽂은 채 말했다. 




“네놈 가죽으로 내 갑옷을 만들어야겠구나!”




늑대는 막덕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진당은 그 찰나의 순간에 늑대의 눈빛이 분노가 아니라 어딘가 서글픈 눈빛이란 걸 느꼈다.



막덕은 바로 늑대의 배에서 칼을 다시 뽑아냈고, 늑대는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며 배를 부여잡으며 무릎 꿇었다. 막덕은 뒤로 두 걸음을 물러난 후, 다시 칼을 높이 들었고 늑대는 으르렁대는 소리와 함께 막덕을 한 손으로 잡아 나무를 향해 던졌다.



막덕은 나무에 부딪힌 후 땅에 그대로 떨어졌는데,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잠시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곧 이내 잠잠해졌다.



죽은 것이었다. 진당은 달려가 막덕의 목에 두 손가락을 대고 다시 확인해봤지만 분명했다. 이제 이 고구려에 세자는 없다.



진당은 망연자실해져서 막덕의 옆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았고, 늑대는 기침으로 피를 뱉고 있었다. 그때, 진당의 뒤에서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렸다. 




“믿고 싶지 않은데, 아무래도 맞는 것 같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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