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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콘 Sep 08. 2023

[차대왕] 마지막 인사

진당의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외눈의 흑막병 운강이었다. 진당은 그를 알지 못했으나, 복장으로 보아할 때 그가 흑막병이라는 것, 그리고 눈의 흉터를 포함한 다른 외관들의 흔적으로 보아 그가 숙련된 자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운강은 진당을 지나쳐서 늑대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며 말했다.




“진당선생 맞습니까?”




진당은 그가 자기 이름을 아는 것에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운강은 여전히 시선을 늑대에게 꽂은 채 말했다.




“저는 흑막병의 선임대장 운강이라 합니다.”




늑대는 지쳐서 어깨가 축 늘어진 채 턱을 치켜들고 운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입김이 어찌나 뜨거운지 밤하늘에 하얀 증기로 조금씩 베어나오고 있었다.



운강은 자신감이 넘치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도술을 좀 부리실 줄 안다고 들었습니다. 저를 도와 저 괴물을 물리치신다면…”




운강은 그 말을 내뱉고 진당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미소를 품고 말했다. 




“멀리 도망치시는 것을 눈감아 드릴 순 있습니다. 믿건 말건.”




진당은 말없이 일어나서 지팡이를 집었다. 운강이 그의 곁으로 온 탓에 둘은 붙어 있었으나, 진당은 말없이 뒤로 물러나 왼손은 운강을 향해, 지팡이를 든 손은 늑대를 향해 들어 올렸다.



운강은 미간은 일그러졌으나 미소는 잊지 않고 말했다.




“…실망이오. 현자라 들었건만.”




운강도 뒤로 조금 더 물러나자 달빛 아래 셋은 정확하게 삼각형으로 서 있게 되었다.



흑막병들과 막덕의 시체를 여기저기 둔 채로 셋은 아무 말 없이 긴장상태를 유지했고, 그 침묵을 깬 것은 늑대였다.



그는 숨을 깊게 내쉰 후 순식간에 네 발로 운강에게 뛰어들었다. 운강은 황급히 활을 쏘았지만 늑대는 옆으로 손쉽게 화살을 피한 후 나무 기둥에 발을 디디며 운강의 머리를 앞발로 치려 했다.



하지만 운강은 허리를 숙인 후 앞으로 구르고는 뒤를 돌아 칼을 뽑았다.



늑대는 앞발로 다시 한번 그를 내려치려 했고, 운강이 칼날을 세워 그의 공격을 막았다.



늑대는 손바닥이 칼날에 닿은 상태여서 피가 흘러내렸지만 계속 힘으로 밀어붙였고, 살이 패여감에도 불구하고 자기 눈앞까지 손끝이 다가오는 것에 놀란 운강은 그대로 늑대의 손바닥을 베어내며 뒤로 굴러 피했다.



늑대는 고통스러운 듯 비명을 지른 후 달려들며 이번엔 입을 벌렸다.



쉴 새도 없이 운강은 다시 한번 칼로 그 이빨을 쳐 내며 회피해야만 했다.




몇 번의 합이 이어졌지만 일방적으로 늑대의 공격이었다.



그렇게 많은 전투를 홀로 해냈음에도 운강과 싸우는 것이 대등해 보이자 진당은 그 포악함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무엇이 저 자를 그리도 원망과 분노로 가득하게 만들었는가…’




그는 어느새 늑대의 공격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 늑대의 일방적인 [사냥]이 그 어떤 생존이나 재미가 아니라, 어딘가 슬픔이 서려 있는 광기와 같이 보이는 것이었다.



운강은 제대로 된 공격을 한 번도 성공하지 못한 채 늑대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면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그는 계속해서 늑대의 발톱을 막거나 회피하면서 소리쳤다. 




“진당! 그래도 사람끼리는 도와야 하는 것 아니오!”




진당은 그의 말에 꺼내기 어려운 말을 내뱉었다.




“저 늑대도 사람이오! 왕의 까마귀란 말이오!”




운강은 그의 말을 듣고 놀라 진당을 바라보았다. 그 빈틈에 늑대는 운강에게 달려들어 앞발로 일격을 가했고, 운강은 뒤로 나가떨어진 후 피를 뱉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상체에는 늑대의 발톱이 지나간 자리로 천 갑옷이 찢어져 있었다. 늑대는 운강이 나가떨어지자 고개를 돌려 진당을 보았다.



진당은 처음에는 그를 향해 뛰어오른 늑대를 향해 손바닥을 펴 늑대를 나무로 날려 보냈다.



나무는 늑대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고 기둥이 부러지며 뒤로 무너졌고, 늑대는 부러진 나무 밑둥을 짚고 일어나 눈에 살기를 다시 한번 켰다.



그때 상처를 부여잡고 나무에 상체를 기댄 운강이 진당을 향해 외쳤다.




“저 괴물이 상오라는 말이오?!”




진당은 왼손으로 바닥의 돌들을 들어 올린 후 늑대를 향해 날렸다. 늑대는 두 팔로 자기 얼굴을 막았으나 여기저기 빠르게 날아오는 돌에 맞아 피를 흘리며 울부짖었다. 진당은 운강에게 말했다.




“소야가 죽은데에 대한 원한에 악귀가 된 것이오!”




운강은 활시위를 늑대에게 겨누며 말했다.




“한낱 여자한테 빠져서 자기 스승도 몰라보다니…”




늑대는 어느새 너무 많은 상처로 검은 털이 붉게 보이기까지 했다. 운강은 늑대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발걸음 하나하나 무겁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생각했다. 




‘어차피 저 늑대는 기력을 다 한 것 같다. 하지만 이 노인네는 혼자 처리하기 힘들겠지…’




그는 늑대를 향해 겨누던 활을 내리고 허리띠에 달려 있던 폭탄 하나를 뜯은 후 생각했다.




‘셋… 둘… 하나…!’ 




그러고는 그 폭탄을 진당을 향해 던졌다.



그리고 그가 팔을 휘두름과 동시에 늑대는 운강을 향해 재빠르게 달려들었고 진당은 늑대를 향해 서 있던 중 예상치 못한 공격받아 급하게 바람을 불러내 폭발을 밀어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공격이었기에 결국, 나가떨어진 그는 나무에 목을 들이받으며 잠시 정신을 잃었다. 




 잠시 후 정신을 되찾은 진당이 눈을 겨우 떴을 때, 그의 눈앞에는 운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반나체의 긴 머리 남성이 보였다.



그 남성은 근육질의 온몸에 상처가 가득하고 입에서도 피가 계속 터져 나오고 있었다.



운강은 목에 깊은 상처를 입은 채 피를 토하고 있었고, 남성은 머리카락에 가려져 얼굴이 다 보이진 않았으나 입술을 깨물고 있는 것은 보였다.



진당은 그자가 바로 왕의 까마귀였던 자 그리고 늑대인 상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운강은 그의 무릎에 경련하는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래도… 나만큼은 너에게 좋은 애비였길… 바란다.”




상오가 뭐라 대답할 틈도 없이 운강은 그렇게 눈을 감았고, 그는 운강을 안을 힘도 없어 그 자리에서 흐느꼈다.



상오의 주변으로 꽃처럼 만개한 시체와 핏자국들은 한 사람의 업적이라고 보기엔 믿기지 않을 광경이었다.



심한 피로감을 느끼며 진당은 지팡이에 의존한 채 가까스로 일어나서는 나무에 몸을 기댄 채 물었다. 




“앞으로 어찌할 생각인가 자네?”




상오는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모두 죽어 마땅하다…”




진당은 그의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늘만큼은 진당도 그 말에 크게 부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상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물어가는 달을 한참을 바라보고는 진당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늑대에서도 보여졌던 슬픔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진당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갑작스레 목구멍을 밀고 올라오는 피를 토하느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상오는 그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수풀 속으로 천천히 사라졌다. 




 진당은 미끄러지듯 그 자리에 다시 내려앉았다. 나라가 뒤집어졌고 왕의 핏줄은 끊겼다.



충신이고자 했던 그의 의지는 어느새 반역자의 꼬리표를 달게 되었고, 그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미치거나 죽어 버렸다.



그는 더 이상 고구려에 있을 수 없을 거로 생각하며 걸음을 뗐다.



하지만 다섯 발자국도 가지 못해 그는 머리에 피가 마르는 피로감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 * *




 진당이 눈을 떴을 때 마주한 이는 처음 보는 분주하게 집안일하는 중이었던 등이 굽은 노파였다.



그가 기척을 내며 일어나려 하자, 노파는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며 입을 열었다. 




“정신이 좀 드우?”




진당은 그 노파가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벽을 보며 말을 하는 걸 봤다. 




“여기가 어딥니까?”




“…고구려지, 어디겠수?”




진당에게 말하며 뒤돌은 노파의 눈은 새하얗게 병들어 있었다. 




“왜. 눈먼 노인네가 어찌 그대를 데려왔나 궁금하우?”




진당이 얼떨떨해하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노파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 말고 눈 멀쩡한 우리 바깥양반이 새벽에 일어나선 가 볼 곳이 있다며 소를 데리고 나갑디다. 꿈에서 누가 말해줬다나…”




진당은 깨질 듯한 두통이 몰려와 머리를 감싸며 노파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 없는 초가집에 어울리지 않는 비단과 귀중품들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저 궁에서 나온 하인이 대뜸 귀인이 둘 올 거라고 여따 두고 간 물건들인데, 가질라면 가져가라우. 이 늙은이들은 괜한 일에 휩싸일 기운도 없으니.”




“…괜한 일이라 하심은..?”




“아유. 척 보면 알어~ 거 오밤중에 남녀가 여 들려서 가져가기로 했다는디, 그게 어디 평범한 일이갔수?” 




막근이구나… 진당은 생각에 잠기다가 이내 두통으로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을 느껴 이마를 감싸 쥐었다. 노파는 더듬거리며 차를 따라 진당에게 전해주었다.



그는 진당의 침상 옆에 마련된 의자에 익숙하게 앉아서는 벽을 보고 말을 이었다. 




“이 사람아. 며칠 동안 잠들었는지 몰라서 그러나 본데.”




노파는 잠시 말을 고르는 듯 쉬었다가 내뱉기 불편한 뒷얘기처럼 말했다.




“그 짝을 업어온 그 다이튿날엔가? 새 왕께서 또 돌아가셨수.”




진당은 한껏 놀라 노파를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일으켜 휘청거리며 방문을 나섰다.



노파의 집은 수도 중심부와는 거리가 멀었으나, 멀리 보이는 장 내에 모두가 상복을 입고 있는 것은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심난해져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해 마지 않던 나라가 자기 손에서 무너져 내린 것 같았다.



소리죽여 울고 있는 진당에게 다가온 노파는 말없이 아까 전해줬던 차를 굳이 다시 건네주었다. 




“어여 이 차 마시고, 기운 차리시우.”




진당은 노파에게서 건네받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신기하게도 그 차를 마신 직후, 그는 두통이 말끔히 나았다.




“이게… 무슨 약입니까?”




노파는 그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미소를 띄우며 마루에 앉았다.




“그대는 타고난 삶이 바람이구먼.”




“무슨 말씀이십니까?”




“끌끌… 두고 보면 알어. 여튼 멀리 못 나가니까, 알아서 잘 가시라우.”




말을 마친 노파는 미소를 머금고 방으로 들어갔다.



진당은 말문이 막혀 노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집 한쪽에 묶여 있는 말 한 필을 발견했다.



그는 일어서서 궁 쪽을 한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바람 같은 삶이라…’




그는 이내 결심한 듯 말이 묶여 있는 고삐를 풀고 올라탔다. 




“아니, 벌써 떠나는 게요?”




뗄감을 한껏 이고 있는 노인이 집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보살펴주신 점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진당은 예를 갖춘 후 고삐를 당겨 노부부의 집을 나섰다.



노인은 무어라 더 말하려 했지만 할 말을 끝낸 진당이 무심히 길을 떠나자 이고 있던 지게를 내려놓았다.



안에서는 노파의 목소리가 들렸다. 




“왔수?”




“임자. 말해줬소?”




방 안에서 들리는 노파의 목소리에 노인이 물었다. 노인의 물음에 노파는 노인이 가져온 장작을 지게에서 내리며 무심히 답했다. 




“무얼?”




“아, 왜. 그 당나귀 탄 어린 여자아이가 찾으러 왔었다고.”




방으로 엉거주춤 들어온 노인에게 노파는 차를 건네며 말했다. 




“말 안혔지.”




“왜?”




노인의 물음에 노파는 잠시 미소를 띄우곤 속삭이듯 말했다.




“어차피 만나. 그렇게 해야 맞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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