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에서 한 발짝 물러서기
“너는 뭘 그렇게 빡빡하게 바쁘게 살어. 그렇게 살면 안 피곤해?”
얼마 전 입사동기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내가 들은 말이다. 약간 비아냥거리는 느낌의 어조. 스케줄러에 적힌 빼곡한 일정 탓에 겨우 잡은 술자리이기 때문인 듯하다.
“그냥 해치우는 거지 뭐. 요새는 좀 버겁긴 한데 해치우지 못하면 나 스스로한테 지는 기분이야. 그리고 여유라는 공백이 생기면 못 참겠어.”
허울 좋은 빈 껍데기
나는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이다. 허울만 좋은 빈껍데기. 텅 빈 속을 새로운 도전과 경험들로 채우려 한다. 채워도 채워도 속은 차오르지 않고 껍데기만 반질반질 해져간다.
난 경험과 시간에 대한 강박이 있다. 아무 경험 없이 흘려보내는 시간을 바라보면 스스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때로는 바쁜 일정 속에 적절한 쉼이 필요한 법인데, 난 몸에 좋다는 영양제를 몸에 밀어 넣거나 정신이 번쩍 드는 자양강장제를 마시며 그 쉼을 대신한다.
그러다 물을 한껏 머금은 빨래처럼 몸이 축 늘어질 때쯤 두 손 두발 다 들고, “더 이상 전진 불가”를 외치며 쉼이라는 시간을 갖는다.
왜 나는 여유라는 공백을 참지 못하는 것일까? 왜 자꾸 무언가를 해치워 나가야 속이 편한 것일까? 어디서부터 비롯된 내 강박일까?
어린 시절 넉넉하지 못한 집안 형편 탓에 많은 것들을 훗날로 유보해왔다. 같은 반 단짝이 도복을 입고 태권도장을 갈 때, 나도 멋진 발차기를 배워보고 싶었다. 흥이 많아 중학생 땐 댄스 동아리도 들어가고 싶었지만 부수적인 비용때문에 도전하지 못했고, 바쁜 아버지 덕에 멀리 가족여행을 가보지 못해서 당일치기로 가지 못하는 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야, 나중에 대학생이 되면 그때 하면 되지! “라고 날 다독이며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알아 가야 할 가장 중요한 시기에 자아실현 욕구를 거세시켰다.
어느덧 나는 대학생이 되었고, 언젠가는 처리해야 할 숙제처럼 쌓아두었던 것들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타이트한 주머니 사정 때문에 한정된 시간 내에 최대치의 모든 결과물을 뽑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날 지배했다.
여행지에 가면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두 번 다시는 안 올 것처럼 그곳에 있는 관광지는 모두 섭렵해야 직성이 풀렸다. 취업준비 중 부모님께 지원받은 한정된 영어학원비로 강남역 인근 고시원 한 평짜리 방에 몸을 뉘이며 한 달 안에 목표치를 만들어내야 한다며 날 채찍질했다.
스무 살 이후 내 삶은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휘모리장단 같았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이 길이 내 길이 맞는지 한 번에 알아차려야 했다.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에 부딪혀보며, 뒤처지지 않기 위해 이제껏 보지 못했던 세상을 빠르게 훑어야 했다.
숨이 찰 땐 천천히 걸어도 돼
인생 최대의 거짓말, 그것은 ‘지금, 여기’를 살지 않는 것이라네.
-미움받을 용기-
나는 항상 모든 것에 ‘더’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더 좋은’, ‘더 행복한’, ‘더 많이’, ‘더 빠르게’. 이 ‘더’를 충족 시기키 위해 과거의 나를 재단하며 미래의 나를 그려 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지금, 여기’를 건너뛰고 과거와 미래에만 빛을 비추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지금, 여기’의 나는 행복하지 않는데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희생해 왔다.
현재 행복하지 않은 나를 발견했을 때, 나는 달리기를 만났다. 처음엔 입사시험 체력검정에서 만점을 받지 못했던 아쉬운 마음에 달리기를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입사시험 등을 목표로 더 높은 기록을 위해 달려왔다. 그런데 이제는 누구도 더 이상 날 측정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달렸다. 몸이 흠뻑 젖었지만 숨이 차오르고 구석에 박혀있던 엔돌핀이 솟구치며 현재를 즐기는 법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나’에 집중하고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종점에 도착해있다.
달리기에 빠진 이후 난 ‘더’라는 단어를 조금-완전히 라고는 양심에 찔려 말할 수 없다-내려놓았다. ‘더’가 아닌 ‘그냥’ 해내기. 그냥 현재에 충실해 꾸준히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한 달 전보다는 아주 조금 빨라진 나를 발견했다.
이제 나의 목표는 더 빠른 페이스로 완주가 아닌 그저 완주하기다.
물론 달리기를 소홀히 하면 페이스가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으로 돌아갈 때도 있다. 하지만 더 이상 몸이 둔해져 페이스가 느려졌다고 조바심 내지 않는다.
‘그냥’ 꾸준히 현재에 집중한다. 해내다 보면 나도 모르는 어느 순간 종점에 도착해 있을 테니.
생각해보니 달리기에 빠지게 된 것은 내 인생의 최고의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