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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Mar 24. 2016

책이 책을 낳는다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


과학적 이론으로 철저하게 무장된 사람은 그리 부럽지 않다. 아예 비교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종의 피해의식일 수도 있겠다. 정작 부러운 사람은 과학적 이론에 인문학적 사고까지 갖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무조건 호기심이 발동한다. 어떻게 공부했을까? 이 사람의 뇌는 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소양을 갖췄을까? 당사자들은 너무 쉽게 답한다. 


"본질은 같으니까요." 


과학자들이 쓴 인문학 서적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엄밀하게 말하면 '인문학적으로 쓴 과학서적'이다. 어떤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한다. 인문학자들이 쓴 과학서적도 종종 목격한다. 그런데 불공평하게도 이런 책 역시 ‘인문적으로 쓴 과학서적'이다('과학적으로 쓴 인문서'가 있기는 할 텐데 딱히 기억나는 책이 없다). 


이래저래 과학서적인데 '인문학<과학'의 부등식 때문인지, '인문학>과학'의 부등식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어찌 됐든 '인문학≠과학'은 분명하지만 많은 이들이 과학에서 인문을, 인문에서 과학을 찾으려 하니 차라리 '인문학=과학'이라는 등식에 동의하고 넘어가는 게 마음 편할 수도 있겠다.     


◇과학책을 쉽게 접하기 어렵다면    


과학서적에도 고전이 있다. 필독서도 있다. 그런데 이런 책의 상당수는 과학을 전공으로 하거나 업(業)으로 삼는 사람들조차 몇 명이나 제대로 읽었을까 의문이 들 정도다. 어떤 책은 두께에 일단 기가 질린다. 다윈의 <종의 기원>은 내용에 관계없이 일단 600쪽이 훌쩍 넘는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는 무려 700쪽에 달한다. 두께는 이런 책의 절반에 불과하지만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그나마 조금 쉽다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도 녹록지 않다. 


다윈. 그의 책을 직접 읽고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진 말자. 직접 완독하지 못할 때, 그 책을 접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은 남들이 읽고 쓴 책을 보는 것이다. 무지하다고, 게으르다고 탓해도 어쩔 수 없다. 이를테면 '간접 독서'인 셈인데 직접 읽기에 견줄 바는 못되지만, 아예 외면하거나 안 읽는 것보다는 분명 쓸모 있다.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 역시 이런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반가운 사실은 저자가 섭렵한 과학서적이 고전이라는 틀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 이를테면 소개된 책들은 이런 종류들이다. <원자폭탄, 그 빗나간 열정의 역사>, <속담으로 배우는 과학교과서>, <엠바고에 걸린 과학>, <최초의 3분>. <원더풀 사이언스>, <파인만의 과학이란 무엇인가>.  


저자 역시 <종의 기원>이나 <코스모스>, <총, 균, 쇠>, <이기적 유전자>와 같은 책은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막상 읽고 나니 너무 시시했던가. 그런데 서문부터 이런 기대는 보기 좋게 어긋났다. 


"그 무렵 나는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시리즈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다룬 180여 명 가운데 과학자는 칼 포퍼, 리처드 파인만, 스티븐 제이 굴드, 제인 구달, 칼 세이건, 찰스 다윈, 토머스 쿤(하략) 등이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책을 읽었다는 것"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게 아니다. 읽고 나니 시시했던 것도 아니다. 이미 읽은데다 다른 책을 통해 이미 그 사람들의 얘기를 썼기 때문이란다. 또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1981년 한국어로 번역 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사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책을 읽었다는 점이다. 중학생인 나는 <코스모스>를 몇 달에 걸쳐 독파했다. 지금 생각하면 <코스모스> 읽기는 '나의 첫 과학책'으로 기초를 다진 내가 본격적인 과학책의 세계로 빠져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였다." 


TV 다큐멘터리로 방영됐던 <코스모스>. 


인문학도를 자처하지만, 저자의 과학적 소양은 이 정도면 인정해줘야 할 것 같다. 전문성도 갖췄다는 얘기다. 과학고전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갈릴레이, 찰스 다윈에서 리처드 파인만, 올리버 색스, 나탈리 앤지어에 이르는 과학고전을 문학적이고 인문학적인 소양을 바탕으로 새로운 '과학 읽기'를 시도한다.      


인문학자가 본 과학자(혹은 과학)는 과학자가 본 과학자와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세이건은 탁월한 교사였다. 그는 속도 조절에 능숙했다. 학생들이 자신을 따라올 때와 그러지 못할 때를 쉽게 알아챘다. 정적만이 감도는 대학원 강의에선 이런 말을 했다. 


"아무도 머릿속에 푸리에 변환들을 갖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여러분은 질문하고 익혀야 한다." 그런데 세이건의 성품이 그리 온화하지만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시계를 차지 않았고, 약속에 대해 몹시 변덕스러웠다고 한다. 경의를 표하는데 익숙지 않았으며, 젊었을 적엔 모든 사람의 아이디어를 멋대로 도용하는 버릇도 있었다. 


저자는 갈릴레이를 소개하며 그의 과학적 업적 못지않게 학문관에 주목한다. 갈릴레이가 제자에게 한 수 가르치는 방식으로 그의 학문관을 피력하는 장면은 갈릴레이 생애의 클라이맥스다. 


"학문을 수행하는 일이야말로 각별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고 나는 생각하네. 학문이 취급하는 상품은 회의(懷疑)를 통해 획득된 지식이지. 그런데 실제로 모든 인구의 대다수는 제후며 영주, 성직자들이 만들어낸 미신과 낡은 주문의 현란한 운무 속에 갇혀 있는 거야. 저들의 간계를 은폐해 주는 운무 말일세."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에드워드 윌슨의 <생며의 미래>.  


◇“(읽은) 책이 (읽을) 책을 낳는다 


종횡무진 과학책을 섭렵한 저자의 결론은 이렇다. "우수한 과학책일수록 인문적이었다." 


결국 '과학적으로 쓴 인문서'는 도처에 깔려있던 셈이다. 발견하지 못했거나, 읽었는데도 미처 그런 책인 줄 몰랐던 것에 불과하다. 소설가 고종석도 "이 책은 자연과학 책에 대한 입문서이자 인문서(人文書)다. 자연과학의 세계를 엿보거나 탐험하고 싶으면, 우선 이 책을 읽어라. 그러고 나면 막막함이 사라지고 이제 어떤 책들을 읽어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 있다"며 추천의 글을 올렸다.


과학자와 과학책들을 소개하면서도 저자는 스스로 인문학자임을 잊지 않는다. 그래서 책 속의 이런 대목은 이 책이 '인문적 과학책 읽기' 관련 서적이라기보다 그냥 '책 읽기' 관련 도서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독서는 계기가 중요하다. 책에, 독서에 처음 빠져드는 것부터 그렇다.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어떤 계기가 있어야 한다. 읽을 책을 고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손에 잡히는 대로 읽는 무작정한 마구잡이식 책 읽기는 흔치 않은 일이다. 하다못해 베스트셀러라는 손쉬운 계기라도 붙잡아야 한다. '(읽은) 책이 (읽을) 책을 낳는다'라는 독서 속설에 기대는 게 매우 바람직하긴 하다."


저자의 말을 인용하자면 '(읽은) 과학책이 (읽을) 과학 책을 낳는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두껍다고, 어렵다고 외면했던 책들을 다시 불러 모아야겠다. 누군가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다던가. 세상은 넓고 읽을 책도 많다. 과학책도 그렇다.


by 책방아저씨 https://facebook.com/booksbooster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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