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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Jul 19. 2015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사람에서 우주로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뉴호라이즌스호가 명왕성 최근접 비행에 성공했다.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이 무인탐사선이 명왕성 1만 2500km까지 접근해 촬영한 영상이 아니다. 감격에 젖어 환호하는 미국 NASA 연구진들의 모습이었다. 장장 9년 6개월 동안 뉴호라이즌스호와 외로운 여행을 함께 한 사람들이다.


몸은 지구에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48억 km 거리에 있는 명왕성을 향해 총알의 20배 속도로 날아가는 무인탐사선의 동행자였다. 심지어 ‘동면 비행’을 할 때조차 뉴호라이즌스호의 신호를 놓치지 않기 위해 가슴을 졸였다. 지름 2.1m 소형차 크기의 무인탐사선만 태양계 맨 가장자리의 행성에 도착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함께였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지 않았다면 뉴호라이즌스호의 명왕성 최근접 비행은 그런저런 과학기술계 뉴스에 불과했을 것이다. 다이내믹한 뉴스와 속보가 쉼 없이 생산되는 나라에서 우주 밖 소식에까지 관심을 기울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잠깐 감동도 했던 것 같다. 그게 ‘감동’이 맞는다면 순전히 <코스모스>, 그리고 칼 세이건 덕분이다.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몇 개월 째 하드보일드 누아르 소설에 빠져 있더라. 책에서는     튀었다. 잔인한 복수와 반전이 거듭됐다. “현실은 더 잔인하지 않으냐”는 말로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이제 시체를 봐도 놀랄 것 같지 않다”고 농담처럼 말하기도 했다. 누아르 소설이라고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래도 ‘뇌 정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것도 시급히.  


▲뉴호라이즌스호의 신호를 추적하는 임무를 수행중인 연구원.   <사진 출처=NASA>

◇우주와 인간에 대한 대서사시, 그리고 웅장한 교향곡

6월 한 달 동안  시작  매일 조금 <코스모스>를 읽었다. 스스로 ‘기특한 여름나기 책읽기’로 명명했다. 50페이지를  넘긴 날도 있지만, 어떤 날은 10페이지도 읽지 못 했다. 정확히 한  다. 책을 덮은 순간 웅장한 교향곡이 끝나는 기분이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동. 책을 읽고 이런 기분 느낀 것, 참으로 오랜만이다. 솔직히 읽은 내용의 10%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책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우주는 그렇게 쉽게 이해될 문제가 아니다). 그래도 상관없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코스모스(COSMOS)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 코스모스를 정관(靜觀) 하노라면 깊은 울림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나는 그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아득히 높은 데서 어렴풋한 기억의 심연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주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코스모스를 정관한다는 것이 미지(未知) 중 미지의 세계와 마주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울림, 그 느낌, 그 감정이야말로 인간이라면 그 누구나 하게 되는 반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이렇게 끝난다. “우리는 종(種)으로서의 인류를 사랑해야 하며, 지구에게 충성해야 한다. 아니면, 그 누가 우리의 지구를 대변해 줄 수 있겠는가? 우리의 생존은 우리 자신만이 이룩한 업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인류를 여기에 있게 한 코스모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코스모스 방영 당시 칼 세이건.

익히 알려져 있듯 ‘코스모스’는 전 세계적으로 수 억 명의 시청자를 끌어모은 대표적인 TV 교양 프로그램이다. 책 <코스모스>는 1980년 출간됐다. 이후 인류의 우주탐사는 화성과 목성, 토성을 거쳐 명왕성까지 다다르는 수준으로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이 책은 여전히 한국의 과학자들이 청소년에게 권하는 과학 도서 1위, 추천 인문교양서 1위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이 우주, 별, 지구, 인간, 생명, 사회, 역사, 환경, 사상, 철학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지식을 총망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과학을 소재로 한 교양서로는 드물게 한 편의 서사시를 읽은 듯한 감동을 주는 것도 ‘장기 집권’의 비결이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문장과 서사적인 묘사. 이 책이 그토록 사랑받는 또 다른 치명적인 매력이다. 영화 <콘택트>의 원작자이기도 한 칼 세이건의 방대한 지식과 글솜씨도 놀랍지만 우리 말로 번역한 홍승수 교수의 번역도 더 없이 매끄럽다.




◇<코스모스>는 과학 책이 아니다, 인문교양서이자 거대한 서사시다

이 책은 대표적인 과학 필독서다. 그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과학 책이 아니다. 우주와 인간에 대한 대서사시다. 생명과 사회, 지구, 학문, 과학적 사고에 대한 철학서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상과 사고, 사상을 찬양한다. 만약 우리나라의 그 암울했던 ‘금서(禁書)의 시대’에 출간됐다면 이 책도 불온서적에 포함됐을지 모른다(인류 역사상 위대한 경제학, 역사학, 철학서 다수가 금서였던 것을 감안하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89년 보이저 2호가 찍은 해왕성. <사진 출처=NASA>


칼 세이건에 따르면 기원전 6세기 에게해를 중심으로 한 이오니아에서 인류 최초의 ‘불순한 사고와 사상들’이 태동하기 시작한다. 모든 것이 원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간과 동물이 원래는 아주 단순한 형태에서 발생했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질병은 악마나 신이 만든 것이 아니며,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고 믿는 사람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히포크라테스, 엠페도클레스, 데모크리토스, 아낙사고라스, 피타고라스 등이 그 주인공이다. 그들은 혼돈(Chaos)에서 질서(Cosmos)를 발견했다.


왜 이오니아였을까? 중국이나 인도, 메소포타미아가 아니라 이오니아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과 과학적 사고가 꽃을 피우게 됐을까. 답은 하나다. ‘다양성’이다. 이오니아는 섬마다 환경과 정치 체제가 달랐다. 모든 섬들을 하나로 지배할 만한 강력한 중앙권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유로운 탐구가 가능했다. 이런 천혜의 환경에서 “신들이 세상을 만든 것이 아니고, 자연 속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물리적 힘의 결과로 만들어졌다”는 발상의 대전환이 이루어졌다.


칼 세이건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이오니아의 위대한 유산을 다시 한 번 발견한다. 네덜란드는 왕이나 황제의 통치가 아니라 국민에 의한 통치가 그 어느 나라보다 잘 이루어졌던 공화국이었다. 당시 네덜란드에는 스피노자, 데카르트, 존 로크, 렘브란트 등 위대한 철학자, 과학자, 수학자, 예술가들로 넘쳐 났다. 온갖 검열로 사상의 자유를 억압받던 당시의 유럽 지성인들에게 네덜란드는 글자 그대로 안식처인 동시에 이상향이었던 것이다.

 

▲명왕성과 카론, 지구를 비교한 이미지(왼쪽)과 뉴호라이즌스호가 촬영한 명왕성. <사진 출처=NASA>


그렇다면 20세기의 이오니아는? 미국에서 태어난 칼 세이건은 이 부분에서 말을 아끼지만 그것이 미국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다.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수많은 철학자, 사상가, 과학자가 미국으로 향했다. 지금도 미국은 수많은 인종으로 넘쳐 난다. 흑인에 대통령에 당선되고, 동성애 결혼 합헌을 축하하며 백악관에서도 보라색 조명으로 벽면을 채우는 나라다. 미국이 태양계의 모든 행성을 탐사한데 이어 가장 멀리 있는 명왕성까지 탐사선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이런 다양성 때문이다.


<코스모스>가 인문교양 필독서인 이유는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엄청난 과학적 지식과 우주에 대한 탐구만이 아니라 (사실 이런 책은 <코스모스> 이전에도, 이후에도 있었다) 인류가 사고의 지평을 우주까지 확장시킨 그 힘이 무엇인지를 과학적·역사적으로 추적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그토록 자유로운 사고, 자유로운 상상,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이 거대하고도 심오한 우주와 생명, 인간을 어떻게 탐구하겠는가.



◇자유로운 사상을 억압하는 곳이라면 이 책은 금서(禁書)

그래서 읽는 내내 씁쓸하기도 했다. 우리나라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기술 입국’을 모토로 이 정도의 발전을 이뤘지만, 여전히 ‘이 정도’에 머물러 있는 이유를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다양한 사상과 사고를 억압하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환경에서 과학기술의 발전은 한계가 뚜렷할 수밖에 없다.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달성하려면 ‘창조경제’가 아니라 자유롭고 다양한 환경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체제 구축이 먼저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직도 멀었다. 동성애 결혼 합법화에 반대하며 기독교인들이 ‘굿판’의 춤을 벌이고, 애국심이 사라졌다며 과학자들에게 ‘정신 무장’을 강조하는 사회에서 자유로운 상상과 탐구는 꽃피우기 어렵다. 다만 그런 사람들 가운데 <코스모스>를 읽은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다. 만약 그들 상당수가 이 책을 읽었다면 이런 불온서적이 어떻게 필독서가 되었느냐고, 당장 금서로 지정해야 한다고 굿판을 벌였을 것이다. 아는 게 힘이지만,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다.

 

▲보이저호에 실린 지구의 위치와 정보 등이 담긴 레코드판. <사진 출처=NASA>


어찌 됐든 우주를 향한 인류의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뉴호라이즌스호도 영영 지구로 돌아오지 못한다. 30년 전에 목성 탐사를 위해 발사된 보이저 1, 2호와 같은 운명이다. 지금도 태양계 바깥 어딘가를 날아가고 있는 그 탐사선들처럼 돌아오지 않는 항해를 계속하게 된다. 이 탐사선들은 어딘가 있을지 모를 성간 문명권으로 보낸 우리의 전령이기도 하다. 실제 보이저호에는 지구의 위치와 정보 등이 담긴 레코드 판이 실려 있다. 이 레코드판은 우주 공간에서 10억 년 동안 건재할 것으로 추정된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그렇게 계속 날아갈 것이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단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지금까지의 여행보다 훨씬 외롭고 고독한 여행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탐사선에 실제로 사람이 탑승하게 될 것이다. 설사 귀환을 보장하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할 것이다. 의무감이나 도전 정신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본능이다.


“돌이켜 보건대 인류는 별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잠시 지구라 불리는 세계에 몸을 담고 살고 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원초적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감히 그 기나긴 여정의 첫발을 내딛고자 하는 것이다 (중략) 인류는 대폭발의 아득히 먼 후손이다. 우리는 코스모스에서 나왔다. 그리고 코스모스를 알고자, 더불어 코스모스를 변화시키고자 태어난 존재이다.”


누군가 딱 한 권의 과학책을 추천해달라고 하면 주저 없이 <코스모스>를 권할 것이다.


by책방아저씨 www.facebook.com/booksbooster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칼 세이건은 1996년 12월, 62세의 일기로 백혈병으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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