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의 인류학자'가 만났던 조금 다른 그들
“어떤 사람은 발달장애나 질병의 습격을 받으면 겁에 질리지만, 어떤 사람은 창조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려고 애쓴다. 이로 인해 특정 궤도나 행동양식이 파괴되면 새로운 길과 방식을 만들어 뜻밖의 발전과 진화를 이룰 수 있도록 신경계가 억지로 움직인다. 나는 지금까지 만난 대부분의 환자들에게서 이러한 질병의 이면을 접했다.” -<화성의 인류학자> 본문 중에서
화가 조너선 I는 어느 날 교통사고로 색맹이 된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뒤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식탁 위의 음식은 마치 시멘트를 부어 놓은 것처럼 무채색이었다. 토마토 주스는 검은색이었고 마요네즈와 케첩, 잼을 구분할 수도 없었다. 아내의 몸과 자신의 몸이 소름 끼치는 회색으로 보였다. 그렇게 정겹던 살색이 쥐색으로 바뀐 것이다. 부부관계도 불가능했다. I는 자신의 두 눈에 비친 세상을 '납으로 빚은 세상'이라고 표현했다.
모범생이자 매력적인 소년이었던 그레그는 1968년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고, 학교에서 자퇴했으며, 집에서 나와 이스트 빌리지의 마약 문화에 합류했다. 헤어진 지 4년 만에 부모가 만난 아들 그레그의 모습은 충격 자체였다. 뇌종양이 그의 기억과 자의식을 모두 삼켜버린 것이다. 그의 기억은 히피의 삶을 살았던 1960년대에 멈췄다. 그는 화석 같았고, 이 시대 마지막 히피처럼 보였다.
템플 그랜딘은 생후 6개월부터 어머니의 품에 안기면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10개월부터는 ‘덫에 갇힌 짐승’처럼 어머니를 할퀴었다. 정상적인 삶은 불가능했다. 두세 살 무렵 그녀의 귀는 고장 난 마이크가 되었고 다른 감각기관들도 조절 기능을 잃었다. 충동이 해결되지 않으면 맹렬하게 분노를 터뜨렸고,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템플은 세 살 때 신경과에서 자폐증 진단을 받는다.
◇자연과 인간 의지가 충돌한 7명의 이야기
미국의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가 쓴 <화성의 인류학자>는 이처럼 자연과 인간의 의지가 뜻밖의 충돌을 빚은 7명의 이야기다. 책에는 △교통사고로 어느 날 갑자기 색맹이 된 화가 I 씨와△기억과 자의식을 잃어버린 영원한 히피 청년 그레그를 비롯해 △병원 복도를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투렛 증후군 외과의사 베넷 △수술을 받고 50년 만에 시력을 되찾은 버질 △옛 기억에만 사로잡혀 사는 화가 프랑코 △그림에 천부적 재능을 보이는 자폐증 환자 소년 스티븐 △자폐증 판정을 받았던 동물학자 템플 그랜딘 등 7명이 등장한다.
이들은 투렛 증후군에서부터 자폐증, 기억상실, 전색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신경병의 습격을 받은 사람들이다. 전통적인 의학계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종의 ‘임상적 사례’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름의 세계관을 구축한 독특한 인간이기도 하다. 신경정신학 분야의 칼 세이건으로 불리는 올리버 색스는 의사 가운을 벗고 병원 밖에서 그들을 만나고 관찰했다.
“나는 하얀 가운을 벗고 병원을 등진 채 지난 25년 동안 환자들의 실생활을 관찰했다. 한편으로는 희귀 생명체를 대하는 박물학자의 심정으로, 또 한편으로는 현장에 나선 인류학자의 심정으로, 가장 중요하게는 의사의 입장에서 머나먼 변경으로 여기저기 왕진을 나섰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환자들은 어떤 문제를 만났든 자신이 처한 상황을 딛고, 심지어 자신이 처한 상황의 도움을 받으며 삶을 향해 나아갔다. 또 이들은 인간 특유의 놀라운 복원력과 적응력을 통해 180도 달라진 환경을 극복하고 생존했다. 결국 이 책은 신경병으로 인해 변화한 사람들의 기록물인 셈이다. 또 대안의 존재방식, 새로운 생활 모습, 전혀 다른 인간으로 변화한 사람들의 기록이다.
◇흑백세계를 만난 색맹·동물과 대화하는 자폐증 환자
색맹이 된 화가 I 씨는 화가의 생명인 색채 감각을 모두 잃고 절망에 빠졌지만 완전히 주저앉지는 않았다. 절망에 빠져 있던 그는 사고를 당한 지 2년째부터 밤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부신 한낮보다 흐린 날이나 어스름 무렵 사물이 더욱 뚜렷하게 보이게 된 것이다. 그는 흑백으로 설계된 듯한 새로운 세상을 발견했다. 그리고 어느 날 일출을 보며 불현듯 깨닫는다. 울긋불긋한 일출을 이런 식으로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 상에 많지 않다는 사실을.
그는 이후 채색을 포기하고 흑백의 그림에 도전한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집착, 즉 색이라는 대상에 대한 집착도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색과 절연했다”고 선언했다. 올빼미족이 되어 오직 밤에만 다른 도시, 다른 지방을 탐험하기도 했다. 밤이 이슥해지도록 밤거리를 배회하며 사물과 풍경을 관찰하고 간이식당에도 들어갔다. 그는 더 이상 색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색맹이라는 장애가 그에게 새로운 예술세계를 선물한 것이다. “나는 밤이 좋아요. 나는 점점 올빼미족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밤은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뇌손상으로 마지막 히피로 남은(기억하는) 그레그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어떤 ‘사실’을 기억하는 데에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1960년대 노력을 완벽하게 외웠다. 새로운 노래도 쉽게 배웠다. 올리버 색스 박사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그레이드 풀 데드 공연에 그레그를 데려간다. 그는 1960년대 노래가 나오자 열광했다. 공연이 끝나고 매디슨 스퀘어 가든을 빠져나오며 그레그가 말했다.
“너무 대단했어요.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그레그는 전날 자기가 공연에 갔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 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의 뇌는 특별한 ‘사실’에 여전히 반응하고(심지어 열광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자폐증 진단을 받은 템플은 동물학 교수로, 저술가로, 가축 시설 디자이너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다. 그녀의 감각기관은 여전히 고장 나거나 통제불능인 상태였다. 사랑과 음악을 이해하지 못했다. 대신 템플은 과학과 기술의 언어를 누구보다 빠르게 이해할 수 있었고 특히 동물의 감정을 잘 파악했다. 가축 시설을 설계할 때 연필 한 번 들지 않고 머릿속으로만 디자인을 완성할 수 있을 정도다. 무엇보다 사람들과 달리 동물들과 있을 때는 마음의 편안함을 느꼈다. “마음이 편해져요. 소들이랑 있으면 인지 능력이 필요 없어요. 어떤 기분인지 느껴지거든요.”
동물의 기분과 몸짓은 본능적으로 즉각 알아차리면서 인간의 관습과 신호, 행동방식은 이해하지 못해 애를 먹는다. 그녀는 이런 자신을 “화성의 인류학자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녀는 뇌신경이 일반인과 다른 만큼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이해할 뿐이다. 대신 템플은 엄청난 지적 능력과 도덕성을 보유했다. 또 자폐증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남들이 갖지 못한 특수한 재능을 발휘한다. 그야말로 ‘화성의 인류학자’가 된 것이다.
◇치료하려 하지 말고 어떻게 관계 맺을지 고민하라
이들을 통해 알 수 있듯 결함, 장애, 질병은 역설적인 역할을 한다. 평상시에는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상상조차 못 했던 잠재적인 능력, 성장, 진화, 삶의 형태가 이로 인해 발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책의 주제는 질병의 역설적인 측면과 숨겨져 있는 창의력이다.
“어떤 사람은 발달장애나 질병의 습격을 받으면 겁에 질리지만 어떤 사람은 창조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려고 애쓴다. 이로 인해 특정 궤도나 행동양식이 파괴되면 새로운 길과 방식을 만들어 뜻밖의 발전과 진화를 이룰 수 있도록 신경계가 억지로 움직인다. 나는 지금까지 만난 대부분의 환자들에게서 이러한 질병의 이면을 접했다.”
저자의 말처럼 뇌 신경병 환자들은 일반인과 너무나 다른 사고방식과 지능, 정서를 지녔다. 하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일반인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재능이 있고, 오히려 그것이 그들을 특별하게 만든다. 투렛 증후군에 시달리면서도 존경받는 외과의사로 활동 중인 베넷 박사는 심지어 훌륭한 비행기 조종사이기도 하다. 동료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투렛 증후군?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는 좋은 사람이고, 아주 훌륭한 조종사인데.”
자폐아 소년 스티븐 역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데도 원근법을 비롯한 각종 기법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한 번 본 복잡한 건축물과 자연경관도 그 자리에서 그려낸다. 안마사 버질은 50년 만에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했지만 그 환한 세계에서 내내 불행하다가 다시 실명을 하고 행복해졌다. 그에게는 환한 세계가 벗어날 수 없는 고문이고 어둠이 선물과도 같았다. 버질은 빛으로 이루어진 어리둥절한 세계를 떠나 본래 자리로 돌아갔다. 거의 50년 동안 집과 같았던 곳, 바로 실명의 세계였다.
과학은 뇌신경이라는 산의 정상을 하나하나 정복하고 있다. 뇌신경 손상으로 발생한 질병도 과거보다는 덜 잔인한 방법(안구와 눈꺼풀 사이로 얼음송곳을 넣어 전두엽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과 같은)으로 하나씩 정복 중이다.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7명은 자신들을 ‘치료’하려 하지 말고, 자신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고민하라고 우리에게 말한다.
책을 덮으면 저자가 본문에 앞서 소개한 두 개의 문장을 다시 찾게 된다. 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우주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신기한 정도가 아니라 상상의 한계를 뛰어넘을 만큼 신기하다(J. B. S 홀데인)", "환자에게 어떤 병에 걸렸느냐고 묻기보다는 병에게 어떤 사람을 덮쳤느냐고 물어야 한다(윌리엄 오슬러)."
by 책방아저씨 https://facebook.com/booksbooster
※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로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올리버 색스는 '의학계의 시인'으로 불렸다. 2015년 8월 암으로 눈을 감는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을까? 6개월 전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두렵지만 감사하는 마음이 가장 큽니다. 무엇보다도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의식 있는 존재, 생각하는 동물로서 살아왔습니다. 그 사실 자체가 내게는 크나큰 특권이자 모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