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자는 영화에서 인간을 본다
<레인맨>에서 자폐증 환자인 형은 동생과의 여행으로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지만, 동생과 관객들은 그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솔직하고 직선적이며 물질적인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레이먼드의 모습은 인간성을 상실한 채 물질주의 사회에 매몰돼가는 우리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던져준다. -<뇌과학자는 영화에서 인간을 본다> 본문 중에서
영화를 좋아한다. 관심 있는 영화, 꼭 보고 싶은 영화, 화제의 영화는 가급적 개봉 첫날, 개봉 첫 주에 봐야 한다는 나름대로의 신조(이런 것도 신조 축에 든다면)를 갖고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그것이 좋아하는 영화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볼 일 다 보고, 만날 사람 다 만나고 봐도 되는 사람은, 이미 사랑이 아니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또 영화평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원래 보려고 했던 영화인데도 관객 수가 1,000만 명을 돌파한 후에 본다면 ‘입소문’에 기대에 보러 간다는 혐의를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무슨 이런 자격지심이 있단 말인가). 끝으로, 시간을 더 지체할 수가 없다. 보고 싶은 영화가 개봉하면 안 보고는 못 배긴다는 얘기다. 가장 현실적인 이유다.
SF 영화를 특히 좋아한다. 개봉 첫날, 개봉 첫 주에 본 영화의 대부분은 SF 영화다. SF에 액션과 재난까지 결합된 영화는 개봉날만 손꼽아 기다린다. '다크나이트 라이즈'를 보러 갔을 때는 영화관 앞에서 기다릴 때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보는 내내 가슴이 뛰었다.
그동안 본 영화 가운데 최고의 영화로 꼽는 영화는 '블레이드 러너'다. 이메일 계정을 처음 만들 때 아이디를 주저 없이 ‘blade'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나는 전설이다, 월드워 Z는 지금도 공중파나 유선·위성 방송에서 할 때마다 다시 본다. '인터스텔라'도 그랬다.
덕분에 영화 관련 책도 자주 산다. <영화, 이렇게 보면 두 배로 재미있다>를 통해 제임스 카메론과 폴 버호벤, 팀 버튼, 스탠리 큐브릭이 왜 거장인지, 왜 그들의 영화가 문제작인지를 알았다.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7편의 영화>는 영화를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가끔 읽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책이다. 무엇보다 '블레이드 러너'를 만나게 해주었고 '토탈 리콜'을 다시 보게 해주었다. 그리고 시오노 나나미의 <나의 인생은 영화관에서 시작되었다>는 어릴 때 주말의 영화 등을 통해 봤던 고전 영화의 추억을 들춰냈다.
◇강박과 편집증에 시달리는 영화 속 주인공들
책 <뇌과학자는 영화에서 인간을 본다>는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와 한 쌍으로 읽힌다. 저자는 <과학콘서트>의 저자 정재승 KAIST 교수. 영화를 통해 과학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 쓰인 책이니 SF 영화가 많다(이런 성찬이 또 있겠는가).
1999년 초판이 나온 <물리학자는 영화에서 과학을 본다>가 SF 영화의 과학적 옥에 티를 찾아내고, SF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과학적 공식에 집중했다면, 2012년 출간된 <뇌과학자는 영화에서 인간을 본다>는 영화에서 발견되는 뇌과학의 흔적들, 혹은 주인공과 등장인물들에 대한 뇌과학적 분석이 주를 이룬다. 전자가 후자까지 포괄하는 좀 더 광범위한 과학적 지식을 다루고 있지만, 후자는 전자보다 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다룬다.
제목처럼 뇌과학자는 영화를 통해 인간을 본다. '레인맨'의 더스틴 호프만, '이 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잭 니컬슨,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니컬러스 케이지가 연기한 영화 속 주인공은 자폐증, 혹은 강박증 환자이거나 알코올 중독자다. 내면의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뇌과학자는 그들을 통해 인간을 발견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 같은 천생 뇌과학자는 영화에서 인간을 발견한다. 영화 속에서 감독과 작가가 자신을 닮은 주인공을 통해 사건을 만들고 관계를 엮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얘기다. 생물학적인 뇌의 특징들과 신경 정신 질환에 걸린 인간 뇌의 변화들을 통해 주인공의 삶을 일해하고, 사건의 전모를 파헤치며, 그 안에서 인간 사회의 독특함을 발견하는 책이다.”
책은 레인맨을 통해 자폐증을, 아이다호에서 기면 발작을, 사이빌에서 다중인격을, 하얀 전쟁을 통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강박증을 이야기한다. '메멘토'를 통해 잃어버린 기억을, '인셉션'을 통해 꿈의 조작이 가능한지를 분석한다.
자폐증 환자에게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점은 무의식적으로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증세이다.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주인공 레이먼드 역시 몸을 앞뒤로 흔든다. 한번 들은 말을 계속 따라 하고, 특정한 말을 되풀이한다. '머큐리'에서의 사이먼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영화 속 주인공들의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좀처럼 더러운 것을 참지 못하는 결벽증, 뭐든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강박증, 사랑하는 사람까지 잊어버린 기억상실증,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이런 증상들은 왜 생기는 것일까?
◇과학적 분석보다 인간관계의 본질
“무엇보다도 자폐증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찾아낸 가장 중요한 수확이라면, 자폐증이 기질적인 이상이 없는 단순한 마음의 병이 아니라, 뇌가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 질환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는 점이다.”
책은 이런 과학적 해답도 제시한다. 하지만 저자가 눈여겨보는 대목은 이런 과학적 분석보다는 인간과 인간관계의 본질이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흔히들 자폐증을 심맹이라고 부른다. 맹인이 눈을 뜨지 못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자폐증 환자는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해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레인맨'에서 자폐증 환자인 형은 동생과의 여행으로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지만, 동생과 관객들은 그를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솔직하고 직선적이며 물질적인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레이먼드의 모습은 인간성을 상실한 채 물질주의 사회에 매몰돼가는 우리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던져준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잭 니컬슨이 연기한 멜빈의 강박증을 치료한 것도 현대 의학이나 첨단 과학이 아니다. 멜빈은 사이먼의 개를 돌보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따뜻한 면을 발견한다. 또 더러움에 대한 공포와 혐오 역시 개와 생활하면서 극복한다. 물론 멜빈의 가장 중요한 치료자는 캐럴이다. 그녀는 멜빈의 감정을 존중하고 받아들일 뿐 아니라(거의 유일하게) 멜빈 스스로 사랑의 감정에 눈 뜨도록 돕는다. 저자는 이렇게 진단한다.
“강박증까지는 아니더라도, 현대인들이라면 누구나 강박적인 행동을 한두 번씩 경험하게 된다. 위험 요소가 항상 도사리고 있는 복잡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느 정도의 ‘강박적 행동’은 생존 습관일 수 있다. 강박적이지 않더라도 불안하거나 두렵지 않은 세상이 온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숨겨진 인간의 욕망
저자가 영화에서 주목하는 또 하나의 대목은 숨겨진 인간의 욕망이다. 영화 '가타카'를 통해 보여준 휴먼 게놈 프로젝트는 더 건강하게, 더 오래 살려는 인간의 욕망과 닿아 있다. 한 알만 먹으면 몇 시간 동안 날씬하게 만들어주는 알약을 개발하면서 겪는 해프닝을 그린 코미디 영화 '너티 프로세서'는 날씬해지려는 현대인의 욕망이 담겨 있다. '에일리언'에서 등장하는 동면 캡슐과 '화성침공'에서의 신체 이식 역시 마찬가지다. 과학기술은 그런 인간의 욕망에 과연 어떻게 화답할 것인가?
뇌과학자는 영화에서 인간을 본다. 어디 뇌과학자뿐이겠는가. “정신 질환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나 생각이나 행동 측면에서 병적인 구석이 있다. 이상하게 집착하고, 한없이 일을 미루기도 하고, 쉽게 기억을 잃어버리기도 하며, 한동안 우울에 깊이 빠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어두운 영화관을 찾는지도 모른다. 영화 속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나’이기도 하며, 영화는 곧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면 다시 본래의 나로 돌아와야 하지만 2시간 동안만큼은 행복하다. 그 행복을 찾아 오늘도 나는 또 영화관을 찾는다. 우리는 가끔 현실에서 상처를 받고, 영화에서 치유의 방법을 얻는다.
by 책방아저씨 https://www.facebook.com/booksboo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