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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Apr 03. 2016

"모두 버릴 것, 숫자만 빼고"

계산 가능한 세상을 꿈꾸다  <수학의 몽상>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 분명한 것을 알 수 있다. 매듭을 다루든, 미인이 될 수 있는 기준을 다루든, 혹은 우주의 창조와 생성을 다루든, 그것이 과학이 될 수 있으려면 수학화되어야 하고 수학적 공식으로 표시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은 수학의 손을 거치면 과학이 된다. 이게 바로 근대 과학을 지휘하는 수학의 마술이다. -<수학의 몽상> 중에서


허름한 자취방이었다. 누구 방이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한 선배가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이 책도 우리가 읽고 토론해야 한다. 논리 전개가 잘못된 곳을 찾는데 집중해주면 좋겠다.” 선배의 목소리는 사뭇 비장했다. 그 책을 보는 우리의 눈길 역시 비장했다. 


일주일 뒤 우리는 그 책을 읽고 토론을 했다.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하지 못한다. 선배는 주문대로 그 책의 허술함과 논리적 비약을 지적하는데 집중했다. 나는 그러지 못 했다. 그 선배의 지적 질도 성공했던 것 같지는 않다. 내용을 다 이해하지도 못한데다 무엇보다 뭐가 잘못된 내용인지 알 수 없었다. 책의 제목은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 지은이는 이진경이었다(‘이것이 진짜 경제학이다’의 줄임말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어찌 됐든 그는 지금도 이 이름을 쓴다. 또 이 책을 쓸 당시 그의 나이가 20대 중반이었다는 풍문도 있다). 


이진경. <사진출처=교보문고>


10년 뒤, 서점에서 책을 뒤적이다 흥미로운 제목의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책 제목보다는 책 속에 담긴 영화가 흥미로웠다. <블레이드 러너>,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 <벽>, <모던타임스>, <길버트 그레이프>, <토탈 리콜>. 그 책을 읽고 <블레이드 러너>을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 봤다. 그래, 바로 이 영화야! 지금까지 내가 최고의 영화로 꼽는 영화는 이렇게 만났다.


이미 봤던 <토탈 리콜>도 다시 봤다. 읽기 전과 읽은 뒤의 토털 리콜은 전혀 다른 영화였다. 그렇게 그 책은 얼치기 시네마 키드에게 영화는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가끔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그 책의 제목은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7편의 영화>, 지은이는 이진경이었다. 


5년 뒤, 또 한 권의 책을 만났다. 직장생활도 5년 차를 넘고 있을 때였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지만 대충 분위기는 파악한 터라 처음처럼 그렇게 재미있지 않았다. 뭔가 다른 재미를 찾아야 했고, 마땅히 재밋거리가 없던 시골 기자는 만만한 책으로 그것을 대신했다. 


<수학의 몽상>이었다. 귀만큼이나 눈도 얇았던지라 제목이나 부제에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표지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고정관념의 파괴를 통해 지적 편력을 넓혀가는 저자 이진경. 그의 사유가 수학 속으로 뻗어간다.’ 책의 저자는 이진경이었다.


책은 수학의 세계로 안내한다. 저자는 ‘모든 수학 이론이 수학적 진리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풀어내더니 ‘왜 수학을 통해 근대 과학혁명이 가능했는지’를 증명한다.

      

◇<사회구성체론>과 <필로시네마>, 그리고 <수학의 몽상>     


<사회구성체와 사회과학 방법론>으로 시작해 <필로시네마>를 거쳐 <수학의 몽상>을 통해 그를 세 번째 만나게 됐다. 고등학교 시절 미분을 지나 적분의 세계에서 길을 잃으며 수포자가 되었던 나로서는 마치 수학에 복수라도 하듯 이 책을 읽었다. 단언컨대 <수학의 몽상>을 좀 더 일찍 만났다면 수학을 즐겁게 했을 것이다.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수학자들은 모든 것을 계산하려고 한다. 모든 게 계산되고, 참인지 거짓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세계, 그게 바로 수학자들의 유토피아다. 이 유토피아의 입구에는 이런 팻말이 붙어 있다. 모든 것을 버려라. 숫자와 문자만 빼놓고.”


그렇고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수학이 아직은 도달하지 못한, 아니 인간이 아직은 도달하지 못한 경지다. 여러분이 한번 도전해볼 생각을 했다면, 여러분은 이미 수학에 매이고 부림을 받는 게 아니라 그것을 부릴 줄 아는 지혜를 깨친 것이다. 그것은 수학을 많이 아는 것과 전혀 다른 문제다. 그 경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지 아니한가! 수학의 외부.”


문제는 늘 수학이었다. 지금은 더 그렇다. 수학으로 들어가는 대학의 수준이 달라진다. 다른 이공계 대학원이 미달되더라도 수학 전공은 늘 만원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대기업에서도 수학 전공자를 선호한다. 우리나라에서 세계수학자대회가 열리고 수학 관련 교양서적도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이렇게 풍부한 지식과 심오한 철학을 바탕으로 수학을 얘기한 책을 아직 만나보지 못 했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등장시킨 메피스토와 갤큘러스의 대화 장면이 다소 거북하지만 과연 누가 이런 시도를 했겠는가? 심지어 컴퓨터로 통제되는 완벽한 감옥 ‘CAP:computer aided prison’를 탈출하기 위해 등장시킨 외판 사원 ‘8077333’과 배우 지망생 ‘5066266’, 아마추어 수학자 ‘2088308’이 나누는 가상의 대화는 다소 유치하지만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사진 왼쪽부터)갈릴레이, 케플러, 뉴턴,  라이프니츠. 


저자는 모든 수학 이론이 수학적 진리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풀어내더니 왜 수학을 통해 근대 과학혁명이 가능했는지를 증명한다. 운동의 변화에서 규칙과 공식을 찾아내기 위해 미적분법이 생기고, 그것을 통해 위대한 발견과 법칙이 만들어졌다는 사실도 입증한다. 그랬다. 17세기에 나타난 서구의 근대 과학혁명은 자연을 수학화하는 것, 다시 말해 자연과 세계에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계산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을 꿈꾸었다. 


갈릴레이는 지상에서 벌어지는 사물의 운동 법칙을 수학화했고, 케플러는 천상에서 벌어지는 행성의 운동을 수학화하려 했다. 뉴턴과 라이프니츠는 순간 운동을 계산하고 그 운동의 결과를 모아서 다시 계산할 수 있는 수학적 방법인 미적분학을 창안했다. “특히 뉴턴은 미적분학의 방법을 이용해 갈릴레이가 발견한 지상의 운동 법칙과 케플러가 발견한 천상의 운동 법칙을 하나의 법칙으로 통합할 수 있었다. 이른바 만유인력의 법칙이 그것이다.”     


모든 것이 계산 가능한 세계를 꿈꾸다   


근대 과학은 실험이 아니라 수식을 통해서 완성되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심지어 근대 과학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실험은 거짓이라고 단언한다. 베이컨 이래 서양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가장 강조해왔던 것이 실험과학이다. 실제 근대 과학혁명의 분기점을 이루는 갈릴레이는 실험을 통해 자유낙하 법칙이나 물체의 운동 법칙을 찾아냈다. 케플러는 집요한 관찰을 통해 천체의 운동 법칙을 발견했다.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걸 보고서 천체의 운동 법칙을 발견했다. 


하지만 모두 신화에 불과하다. 이들을 근대 과학혁명의 선구자로 만든 것은 실험이 아니라 운동이나 원리를 수학적인 공식으로 표현하려는 태도였다. ‘자연의 수학화’. 수학화하고 계산할 수 있게 만드는 것, 이것이 근대 과학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 분명한 것을 알 수 있다. 매듭을 다루든, 미인이 될 수 있는 기준을 다루든, 혹은 우주의 창조와 생성을 다루든, 그것이 과학이 될 수 있으려면 수학화되어야 하고 수학적 공식으로 표시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것은 수학의 손을 거치면 과학이 된다. 이게 바로 근대 과학을 지휘하는 수학의 마술이다.” 


근대과학은 ‘실험’이 아니라 ‘수식’을 통해서 완성된 것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2005년 <철학과 굴뚝청소부>를 내놓으며 본격적인 철학자의 길을 걸었지만 낯설었다. 뭐랄까, 여전히 차가웠고 여전히 가슴보다는 머리로 읽어야 했다. 그래서 지난해 출간된 <삶을 위한 철학 수업>을 읽는데 상당히 망설였던 기억이 난다. 지쳐 있었고 피곤했다. 현학적인 그의 글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했지만, 그의 글을 좇아가기에는 힘에 부쳤다. 제목에 ‘삶’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지만 그래도 ‘앎’이 강조될 것 같았다. 그럴 여력이 별로 없었다. 적어도 그때는 앎보다는 삶이 더 절실했다. 


기우였다.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것이 변한다. 그 역시 변해 있었다. 현란한 기교와 풍부한 지식을 드러내기보다는 보듬고 껴안으려는 흔적이 엿보였다(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런 대목은 특히 반가웠다. 


“자유로운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것, 그것은 단지 한 줌의 용기다. 옳다고 주어지는 것이 정말 옳은지 다시 생각하고, 자신이 정말 긍정할 수 있는 좋은 삶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하는 것은 이 한 줌의 용기로 시작한다.” 


나는 그를 모른다. 25년 넘게 지켜본 독자로서 이런 말은 할 수 있겠다.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이진경은 <사회구성체와 사회과학 방법론>의 빛과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다고. 오랜만에 듣는 용기, 자유‘와 같은 단어들이 반가웠다. 그런 단어들을 다른 사람도 아닌 이진경을 통해 듣는다는 게 좋았다. 스스로 자유로운 삶을 위해서는 약간의 용기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약간의 용기를 내면 이렇게 달라진다. 그렇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 그것은 ‘한 줌의 용기’다.   


by 책방아저씨  https://www.facebook.com/booksboo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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