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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Feb 13. 2017

누구도 탓하지 않지만 그래서 모두가 미안한

<아무도 모른다>는 왜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가?



실화는 영화보다 더 영화스럽다. 원래는 다섯 명이었다(영화에서는 네 명만 나온다). 둘째가 어느 날 병으로 죽자 엄마는 죽은 아이를 비닐에 싸서 벽장 속에 넣어둔다. 1988년 1월, 엄마에게 또 새로운 남자가 생긴다. 엄마는 아이들을 아파트에 버려두고 집을 나간다. 7살, 3살, 2살의 어린 여동생들을 14살 장남이 보살피기 시작한다.  


비극은 엄마에게 정기적으로 오던 돈이 끊기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냉동식품과 패스트푸드, 과자로 연명하던 아이들은 그마저도 제대로 먹지 못하게 된다. 14살은 이런 상황을 헤쳐가기에 어린 나이. 배고프다는 동생들의 채근이 심해질수록 14살 장남은 방황하기 시작한다. 친구들을 집에 들이기 시작한다. 어느 날 친구들이 장난 삼아 셋째를 때렸다. 불행히도 셋째는 눈을 감는다.


장남은 엄마가 했던 것처럼 셋째를 비닐에 싸서 벽장 속에 넣는다. 하지만 악취가 나기 시작하자 장남과 친구들은 셋째를 여행 가방에 담아 공원에 버린다. 사건은 집주인을 통해 공개된다. 그해 7월, 집에 어른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집주인이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경찰이 집을 수색하자 엄마가 숨겨놓은 둘째의 시신이 발견된다. 엄마는 체포된다. 그리고 엄마의 입을 통해 셋째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아무도 모른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실화는 영화보다 더 영화스럽다.


1988년 도쿄에서 발생한 ‘스마모 어린이 방치 사건’의 전모다. 엄마는 법적으로 미혼이었고, 아이들은 출생신고도 되어있지 않았다. 학교도 가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발견되기 전까지 아이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셈이다.  


실화에 관한 정보를 접하고 영화를 봤다. 실화와 영화는 사뭇 다르다. 처음에는 그 어긋남이 불편했다. 하지만 영화에 점점 빠져들수록 그 불편함이 나의 ‘기대’와 어긋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왜 이 장면은 안 나오지? 왜 이 장면은 이렇게 처리되지? 영화를 또 다른 이야기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자 마음이 편해졌다. 비로소 영화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섬뜩한 이 사건을 다루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시선은 섬뜩하리만큼 차갑다. 집을 나간 엄마를 비난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동정하지도 않는다. 아이들을 향한 시선도 마찬가지다. 그들을 동정하거나 그들의 현실에 슬퍼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그냥 내팽개쳐진 아이들, 생명을 이어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아이들, 생존(씻고 먹고 자고 입고)을 위해 본능대로 하는 아이들의 삶에 마치 뉴스처럼 카메라를 비춘다.


히로카즈는 냉정하고 담담한 시선으로 한 가족의 불행한 이야기를 보여준다.


◇히로카즈 감독의 가장 강력한 분노 방식  


따지고 보면 히로카즈 감독은 늘 그랬다. 가족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면서도 어떤 동정이나 어떤 따스한 눈길도 보내지 않았다. 마치 “가족이니까 따뜻한 이야기가 필요해? 정말 가족이라고 그렇게 따뜻해?”라고 질문을 던지고는 무심하게 이야기를 끌고 간다. <태풍이 지나가고>에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꼬여버린 한 가족의 이야기를 무덤덤하게 보여준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는 15년 전 집을 떠난 아버지의 부고가 도착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걸어도 걸어도>는 겉으로는 평범하고 행복해 보이지만, 아들의 죽음으로 힘겨워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상실과 부재의 고통. 어쩌면 그보다 더 큰 고통은 그런 가운데서도 평범한 일상을 살아야 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겠나. 조금은 무덤덤하게, 때로는 유머스럽게, 대부분은 마치 그 사람(그런 일)이 애초부터 없었다는 듯 살아갈 수밖에. 그렇게 참고 견뎌내며 살아가지만, 끝내는 잊을 수 없는 고통. 히로카즈는 그 상실과 부재로 비롯된 ‘후천적 고통’과 ‘선천적 그리움’에 주목한다.


장남 아키라. 현실은 14세 소년이 감당하기에 너무 무거웠다.


<아무도 모른다> 역시 그렇다. 누구의 탓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래서 영화를 보는 사람은 누구라도 조금은 미안함과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아무도 비난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분노를 표출하지 않음으로써 모두의 연대 책임을 묻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히로카즈는 자기만 으로 가장 강력한 비난과 분노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손가락질하기 위해 펴 든 손이 어느새 자신의 가슴으로 향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영화,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는 그런 영화다.


by 책방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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