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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Jul 08. 2015

글을 사랑했다, 그를 사랑했다

내가 사랑한 글쟁이 6. 고종석

"오늘 엄마가 죽었다.” 카뮈가 쓴 <이방인>의 첫 문장이다.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떠돌고 있다.” 그리고 너무도 유명한 에릭 시걸의 <러브 스토리> 마지막 문장. “Love means never having to say you’re sorry(사랑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


고종석은 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글은 소통과 설득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글이 인상적이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은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글은 선전과 선동이다. 상대방의 마음에 다가가 설득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 “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떠돌고 있다”로 시작해 “우리가 잃을 것은 쇠사슬이요, 얻을 것은 전 세계다”로 끝나는 <공산당 선언>은 그런 점에서 선전과 선동 글의 가장 좋은 사례다.


◇고종석은 절필했다, 그래도 쓰고 책도 나온다  

고종석은 절필했다. 직업적 글쓰기를 접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2012년의 일이다. “글은, 예외적인 경우가 있긴 하겠으나, 세상을 바꾸는 데 무력하다”는 것이 절필의 이유다. 그러면서 “소수의 독자들이 내 글에 호의적이긴 했지만, 내 책이 독자들에게 큰 메아리를 불러일으켜 많이 팔려나간 적은 없다”고 자평했다. 


그런데도 그의 책은 계속 나온다. <해피 패밀리>, <고종석의 영어 이야기>, <고종석의 낭만 미래>, <플루트의 골짜기>, <고종석의 문장 1,2>, <언어의 무지개>, <정치의 무늬> 등등 절필을 선언한 2012년 9월 이후 나온 단행본만 6~7권에 달한다. 1년에 2권 이상의 책이 그의 이름을 달고 나온 셈이니 절필 선언이 무색하다.  


‘고종석은 절필했다’와 ‘그래도 그의 책은 계속 나온다’는 부합하지 않지만, 전혀 생뚱맞은 일은 아니다. 고종석이라서 그렇다. 그는 스스로 “소수의 독자들이 호의적이긴 했지만 독자들에게 큰 메아리를 불러일으켜 많이 팔려나간 적은 없다”고 자평했다. 그렇지만 많은 독자들이 호의적이었고 적지 않은 메아리를 불러일으켰다(많이 팔린지는 모르겠다). 


그의 말대로 그에게 호의적인 독자들이 설사 ‘소수’였다고 할지라도 그 소수는 끈질기게 그의 책을 찾고, 그의 글의 밑줄을 그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 ‘소수’의 맨 앞에 나도 있었을 것이라고 자신한다(이런 자신감과 달리 이상하게도 그가 절필을 선언한 이후 구입한 그의 책은 <고종석의 문장>이 거의 유일하다. 묵었던 글을 엮어서 낸 책이 아니라 살아서 퍼덕거리는 그의 글에 익숙해진 탓이다. 그것에 길들여진 탓이다.)


책 표지에 실린 고종석 캐리커쳐

절필을 선언 이전에 이미 많은 글을 남겼고, 끊임없이 그의 글을 찾는 사람이 있기에, 출판사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그의 글들을 모아 책을 출간한다. 90년대, 2000년대 집중적으로 쏟아져 나왔던 그의 책들이 다시 개정판으로 계속 재출간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그는 누구보다 글을 사랑했고, 한국어를 사랑했다. 그래서 누구보다 아름답고 완벽한 문장을 꿈꿨으며, 그 꿈을 어느 정도는 실현했다.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감염된 언어>, <국어의 풍경들>, <언문세설>, <모국어의 속살>, <말들의 풍경>... 그가 본격적으로 글을 쏟아내기 시작했을 때 나온 책의 면면만 봐도 그의 글 사랑, 한국어 사랑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책의 제목은 제각각이지만 관통하는 주제는 일관됐다. 한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무엇이며, 어떤 의미이며, 무엇을 목표로 해야 하는가. 그는 그것을 말(글)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주기 위해 누구보다 분투했던 작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순수’, ‘순화’, ‘순혈주의’와 같은 말을 거부한다. ‘절대적’ 순수나 순혈주의를 강요하는 사회의 뒷모습이 얼마나 추악했는지를 우리는 역사로 기억하며, 지금도 목격한다(이를테면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동성애를 바라보는 보수교회의 태도에서처럼). 오히려 감염되고 뒤틀리고 섞이면서 살아남은, 그리하여 스스로의 두 발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야말로 건전한 사고와 건전한 사회의 밑거름이 된다. 언어도 마찬가지다. 이런 글을 보라. 


“한문투로 휘어지고 일본 문투로 굽어지고 서양 문투로 닳은 한국어 문장 속에서 풍요와 세련을 느낀다. 순수한 토박이말과 토박이 문체(그런 것이 만일 있을 수 있다면 하는 말이지만)로 이루어진 한국어 속에서라면 나는 질식할 것 같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순화’의 충동이란 흔히 ‘죽임’의 충동이란 사실이다.”


“내가 감염된 인간이듯, 내 한국어는 감염된 언어다. 우리는 모두 감염자다. 그리고 모든 언어는 감염된 언어다. 이런 사실을 깨닫는 것은 우리가 민족어에 대해서, 그리고 민족어 문학에 대해서 관찰자의 거리를 가지고 차분히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감염된 언어> 중에서” 


◇글을 사랑하고, '사랑'을 사랑했다 

고종석의 책들. 절필 선언 이후로는 그의 책을 거의 사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사랑’을 사랑했다. 오죽했으면 사랑과 관련된 단어에 대해 자신만의 해석을 붙인 책까지 출간했을까.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개정판에는 이러한 문장을 서문에 추가했다. “그것이 때로 독(毒)일지라도, 덧없는 상호구속적 코뮤니즘일지라도,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한국어에 등장하는 사랑과 관련된 단어들에 대해 그가 붙인 주석은, 고종석식 사랑의 해석이기도 하다. 이런 글들도 보라. 


“그녀:개인적으로, 나는 그녀라는 말의 쓰임을 막을 수는 없다고 믿는다. 나도 글 속에서 그녀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물론 내가 입말을 하면서 그녀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라는 말을 입말에서 사용하지 않듯이 그녀라는 말도 나는 입말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입말에서는 남녀를 아우르는 3인칭 단수 대명사로 그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한다.” 


“눈 맞추다:사랑은 눈에서 시작된다. 눈 맞춤은 모든 사랑의 정지整地 작업이다. 눈 맞춤이 있은 뒤에야 입맞춤이 있을 수 있다. 눈이 맞은 뒤에야 배도 맞는다.”“껴안다:그렇지만 동사 안다나 보듬다는 덩치가 큰 쪽을 주어로 삼고 덩치가 작은 쪽을 목적어로 삼는다. 껴안다에는 그런 제약이 없다. 덩치가 작은 쪽이 덩치가 큰 쪽을 껴안을 수도 있다. 말하자면 껴안다는 안다나 보듬다 보다 더 민주주의적인 동사다(이상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중에서).


그는 기자였다. 기자이면서 전업 작가로, 이제는 절필 작가로 산다. 책만 계속 나오는 게 아니다. 그는 절필한 이후 오히려 더 말이 많아졌다. 그리고 더 날카로워졌다. 트위터에서 그는 끊임없이 사회적 이슈를 논평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의 칼날을 겨눈다. 하루에 100개 이상의 글을 올린 적도 있다니, 이 정도 수준이면 거의 중독에 가깝다. 


140자로 한정된 틀 안에서 생각을 글로 표현하다 보니 그의 글도 감염되고 뒤틀린다. 축약되고 생략된 트위터 용어들을 주저 없이 사용한다. 그렇게 ‘감염된 언어’로 오염된 사회를 조금이라도 깎고 다듬을 수 있다면 그의 감염된 언어에 나는 기꺼이 박수를 보낼 것이다. 단 하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의 절필 선언을 철회해달라는 것. 이미 입증했듯 크게 의미도 없거니와 동시대에 그가 쓴 글을 읽을 수 있는 것만큼 큰 즐거움은 없을 테니까. 


그는 글을 사랑했고 한국어를 사랑했다. 무엇보다 '사랑'을 사랑했다. 나는 이런 그의 글을 사랑했다. 


그는 글을 사랑했고, '사랑'을 사랑했다. <사진 출처=yes24> 

◇그가 전하는 책읽기 글쓰기 노하우 


1. 첫 문장, 마지막 문장에 신경을 써야 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주 간결한데, 저는 이 첫 문장에 반해서 <이방인>을 읽었습니다. 꼭 길게 늘어놓을 필요도 없습니다. 인상 깊은 글을 쓰고 싶다면, 다른 사람에게 인상을 주고 싶다면 첫 문장이나 마지막 문장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보석 같은 문장을 중간에 넣어놓으면 별 소용이 없습니다. 


2. 좋은 글 베끼지[筆寫] 말고, 좋은 글을 읽어라 

흔히 좋다는 글을 많이 베끼고 그러잖습니까? 저는 그게 글쓰기에 별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해본 적이 없으니까 모르겠습니다. 혹시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는데, 그것보다는 그 시간에 자기 글을 쓰고, 무엇보다도 좋은 글을 많이 읽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3. 책은 재미로 읽자

책을 꼭 읽어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어요. 재미 말고는. 책 읽는 게 재미없다면, 책 읽을 필요가 없지요. 책은 재미있고 유익해야 한다는 말이 있지만, 재미가 먼저죠. 재미없는 책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자신을 정신적으로 고문하는 건데요. 


4. 시집을 읽어라

“모국어의 정수는 산문보다는 시에 있죠. 산문을 잘 쓰기 위해서는 시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인은 언어 감수성이 산문가보다 뛰어나고 어휘 선택에 훨씬 더 많은 공을 들입니다. 시를 읽다 보면 한국어가 정말로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5. 글쓰기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쓰면 는다

“대부분의 글 쓰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글이 나아집니다. 특히 산문가들의 경우에 그렇습니다. 소설이나 에세이를 쓰는 사람들의 경우 말입니다. 그렇다는 건 글쓰기가 재능에 달린 게 아니라 많은 부분이, 압도적 부분이 훈련에 달려 있다는 걸 뜻하는 것입니다. 재능도 필요하지만, 노력이 훨씬 더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by 책방아저씨 https://www.facebook.com/booksboo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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