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 푸는 수학 <수학의 언어로 세상을 본다면> ㅣ 과학서평
수포자(수학 포기자)였다. 확률과 통계, 인수분해와 고차방정식까지는 그럭저럭 따라갔던 것 같다. 미분부터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하더니 적분에서 급기야 길을 잃었다. 지수와 로그, 기하와 벡터 단락은 아예 손길조차 닿지 않았다.
어문계열에 진학한 문과생이 수학을 접할 기회는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어찌어찌 작은 신문사에 입사했다. 오래전 이별한 수학은 그렇게 나의 기억에서, 삶에서 멀어졌다. 불편하지 않았다. 그때 우연히 만난 책이 바로 <축구공 위의 수학자>였다. 그 책은 세월이 너무 흘러 기억조차 희미한 옛 연인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나 영화, 혹은 음식과도 같았다. 달콤하고 강렬했다. (그 책의 저자인 서울대 교수는 얼마 전 성폭행으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의 배신감, 충격과 분노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나는 그의 신간이 나오면 가장 먼저 달려가 책을 사는 애독자였다.)
◇ 수포자라서 더 재미있는 수학
‘수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필즈상 수상자이자 ‘패셔니스트 수학자’로 불리는 세드릭 빌라니가 지난 2014년 방한했다. 그는 한국 방문의 기대감을 이런 글로 표현했다.
"2014년 호랑이를 닮은 한국에서 열릴 세계수학자대회를 기다린다. 수천 명의 수학자가 늙은 호랑이에게 존경을 표할 것이다. 수염에 미분 연산 수술을 시행하고, 날카로운 발톱의 곡선을 측정할 것이며, 양자 잠재력의 우물에서 호랑이를 꺼내 줄 것이다. 호랑이와 함께 수염을 털어가며 신성한 끈 이론 담배를 피울 것이다. 며칠 동안 힘센 호랑이는 꼬리 끝에서 코끝까지 수학자로 변신할 것이다."
또 다른 필즈상 수상자 마이클 아티야는 이런 글로 수학(자)을 찬미했다. “밝은 대낮에 수학자는 개울가의 돌을 하나씩 뒤집어보듯 정확성을 기하며 그가 만든 수식과 그 증명을 확인한다. 별 사이를 두둥실 떠다니며 천상의 기적에 감동한다. 수학자는 바로 거기에서 영감을 얻는다. 꿈이 없다면, 예술도, 수학도, 삶도 없다.”
아름다웠다. 문장은 유려하고 비유는 화려하면서도 적확했다. 수포자 출신의 문과생이 「축구공 위의 수학자」 이후 수학(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수학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수학자들이 이런 아름다운 글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아름다운 공식’으로 불리는 오일러의 공식에서는 어떤 아름다움도 느끼지 못하지만, 수학자들의 삶과 글은 나를 가끔 유혹한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수학 관련(혹은 수학자들이 쓴) 책을 산다. 절반도 읽지 못할 때가 있고, 완독에 성공해도 내용의 10분의 1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문득 이런 후회가 밀려올 때가 있다. ‘어려운 수학 공식 대신 이런 책을 먼저 접했다면….’ 물론 늘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그래도 수포자가 되었을 거야.’
오구리 히로시의 <수학의 언어로 세상을 본다면>도 마찬가지다. 읽는 내내 질문과 대답을 반복했다. 어려운 공식 대신 이런 책을 먼저 접했더라면.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조금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수포자이기 때문에 이런 책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거라고.
◇ 미분과 적분과의 거리 1800년
이 책에는 수많은 공식이 등장한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분명히 배웠을 테지만, 지금은 전혀 기억할 수 없는 그런 공식들이다. 하지만 이제는 해(解)를 구할 필요가 없다. 답을 증명할 필요도 없다. ‘1+1=2’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수학자가 골머리를 앓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지만, 이 책을 읽을 때는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어려운 공식이 나오면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여주면 된다. 수포자의 특권이다. 대신 이 책에서 공식을 통해 들려주려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 된다. 언젠가 말했듯 공식의 답을 구하고 과학적 원리를 파악하는 것은 그들의 일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주는 거다. 수학이나 과학 관련 서적을 접할 때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다.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들이다.
기원전 3세기 포에니 전쟁 당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격한다. 로마는 카르타고의 예봉을 분산시키기 위해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은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를 공격한다. 시라쿠사를 포위한 로마군을 맞이한 것은 당대 최고의 수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가 발명한 수많은 무기였다. 탄착점을 조정할 수 있는 투석기,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한 크레인 앞에서 로마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내가 결국 수학책을 덮게 만든 적분은 이때 탄생했다. 면적과 체적을 측정하기 위해 아르키메데스는 기원전 3세기 적분을 발견했다. 이후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17세기에 미분법을 고안해 낸다. 미분과 적분과 사이에는 1,800년이라는 시간이 존재했으니 내가 미분과 적분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맸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저자인 오구리 히로시 캘리포니아공대 교수의 이런 설명에 나는 매우 동감한다.
“역사적으로 적분이 먼저 발견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적분은 면적이나 체적 등 눈에 보이는 양을 계산하는 데 직접 관계가 있다. 반면, 미분의 경우에는 무한 소수나 극한 등의 개념을 확실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략) 미분을 공부하기 전에 먼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적분의 의미를 확실히 익힌 뒤에 그 역으로 미분을 공부하는 편이 알기 쉽지 않았을까?”
◇ O.J. 심슨은 어떻게 무죄가 되었나?
1994년 미국에서 발생한 O.J. 심슨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였던 심슨의 전 부인이 친구와 함께 시체로 발견되었다. 모든 증거는 O.J. 심슨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심슨의 양말에서 전 부인의 피가 발견됐다. 범행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장갑 한 짝에는 심슨과 피해자 두 명의 피가 검출되었다. 사건 현장 주변의 발자국과 심슨의 발 사이즈는 일치했다. 무엇보다 심슨은 전 부인을 상습적으로 폭행해 고발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사건은 심슨의 무죄로 종결되었다. 변호인단은 “부인을 폭행하는 남편 중 부인을 실제로 죽인 사람은 2,500명 중 한 명뿐”이라는 미연방 조사국의 범죄통계를 제시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것은 엉터리 확률이었다. 부인을 폭행하는 남편 중 부인을 실제로 죽인 사람은 2,500명 중의 한 명뿐이었지만, 가정 내 폭력을 당하다 살해된 여성 45명 중 남편이 범인인 경우는 무려 40명에 달했다. 기준을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확률은 0.004%와 88%로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무죄와 유죄가 엇갈리기도 한다.
모든 과학이 그렇듯 수학 역시 인간의 필요에 의해 탄생했다. 수확물을 분배하고 이자를 계산하고 날짜를 세고 지구의 크기를 구하기 위해 수학이 만들었다. 저자는 자신의 딸이 수학을 단순히 복잡한 공식으로만 기억하지 않고 수천 년에 걸친 인간 지성의 정수가 담겨 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기를 소망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수포자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을 것이다.
그 의도는 성공한 것 같다. 도박에서 절대 지지 않는 법과 인터넷 암호체계의 원리, 은행 예금을 2배로 만드는 방법, 우리가 장수할 확률을 대폭 높일 방법 등을 알려주는데 누가 싫다고 하겠는가. 수학이 우리의 실생활을 크게 바꾼 사례도 생생하게 들려준다. 이를 통해 일상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수학이 얼마나 실생활의 강력한 도구로 사용되는지 보여준다.
수포자의 삶을 후회한 적은 없다. 다만 이러한 수학의 넓으면서도 깊고, 강력하면서도 아름다운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 아쉽고 안타까울 뿐이다. 어쩌겠나. 이렇게 재미있는 수학 관련 책이 나오면 부지런히 찾아 읽으며 그런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by 책방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