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방아저씨 Oct 07. 2017

"당신이 맞다면 출발하겠습니다"

우주경쟁과 인종차별의 최전선을 그린 논픽션 <히든 피겨스> ㅣ 과학서평



1969년 7월 17일 뉴욕타임스는 이례적인 정정기사를 하나 싣는다. “계속된 조사와 실험은 17세기 뉴턴의 연구 성과를 확인해 주었다. 이제는 대기에서처럼 진공상태에서도 로켓이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당시의 잘못을 사과한다.” 1920년 1월 13일 자 사설에 관한 정정기사였다. 49년 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로버트 고다드는 ‘우주로켓의 아버지’로 불린다. 액체추진 로켓 개념을 제시하고, 최초로 실험에 성공했던 인물이다. 1919년 고다드는 ‘극단 고도에 도달하는 기술’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액체추진 로켓에 필요한 거의 모든 수학적 공식과 방법을 제시했다. 그의 결론은 이랬다. “엔진의 추력을 충분히 높여준다면 로켓으로 달까지 갈 수 있다.” 


고다드의 주장은 곧바로 반박과 비난에 직면한다. 심지어 뉴욕타임스는 1920년 1월 13일 자 사설을 통해 “고등학생이 배우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도 모르는 것 같다”라며 고다드를 조롱했다. 7월 17일 자 정정기사는 49년 전 이런 조롱에 대한 사과였다. 그날은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를 달까지 보낸 아폴로 11호가 성공적으로 발사된 날이었다.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 모형


◇ “우주에서 2등은 모든 것의 2 


우주에 먼저 깃발을 꽂은 나라는 소련이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60년 전인 1957년 10월 4일 농구공 크기의 인공 구조물이 우주로 날아올랐다.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였다. 지름 58cm, 무게 83.6kg의 스푸트니크 1호는 96분마다 지구를 한 바퀴씩 돌며 신호를 보냈다. 다른 기능은 없었다. 하지만 효과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냉전의 한 축이었던 서방 세계는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물론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나라는 미국이었다.  


“캐서린 고블은 1957년 10월 하늘에 깜빡이던 빛의 점을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녀는 가을밤답지 않게 따뜻한 공기 속에 서서 수평선을 낮게 지나가는 빛의 점을 보았다. 미국 전역에서 시민들은 공포와 경이감 속에 하늘을 올려다보며, 러시아에서 쏜 저 83kg짜리 금속 구체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기 집 뒷마당도 들여다볼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들은 인공위성의 삐삐 소리를 들으려고 라디오 다이얼을 돌렸다. 그 소리는 딴 세상의 귀뚜라미가 내는 소리 같았다(책 본문 중에서).” 


스푸트니크 1호는 96분에 한 번씩 머리 위로 지나갔다. 미국인들은 “지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나라가 어떻게 소비에트 연방 같은 촌뜨기 나라에 일격을 당할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미국 전역에 공포가 퍼졌다. 스푸트니크 1호가 미사일에 수소폭탄을 실어서 날릴 표적을 찾아 미국 구석구석을 탐색하고 있다고 믿었다. 두려움보다 더 큰 것은 굴욕감이었다. 당시 한 상원 의원은 이렇게 한탄했다. “우주에서 1등은 모든 것에서 1등이라는 뜻이다. 우주에서 2등은 모든 것의 2등이다.”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되자 미국인은 소련이 하늘에서 자신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고 믿었다. 사진은 영화 <히든 피겨스>의 한 장면. 


◇ “그분이 맞다고 하면 출발하겠습니다” 


마고 리 셰털리의 논픽션 「히든 피겨스(Hidden Figures)」는 이 시기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영웅들’에 관한 이야기다. 흑인 여성 최초로 NASA에서 근무하며 관리직에 오른 도로시 본, 역시 흑인 여성 최초로 NASA에서 공학자로 인정받은 메리 잭슨, 인간을 우주로 보내기 위한 NASA 프로젝트의 핵심 일원이었던 캐서린 존슨이 주인공이다. 


그들은 ‘인간 컴퓨터(실제 그들은 계산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컴퓨터로 불렸다)’였다. 책의 앞부분은 우주개발보다 랭글리연구소의 항공역학 분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실험과 제작, 실제 비행은 주로 남성의 몫이었다. 세 명의 흑인 여성을 비롯해 많은 ‘여성 컴퓨터’들이 항공역학에 필요한 계산에 주력했다. 비행기 날개 위와 날개 아래의 압력 차이, 비행할 때 공기의 흐름과 마찰, 열을 수학적으로 계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가 터진 거다. 소련이 한 발 앞서 인공위성을 발사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뉴욕타임스는 달 착륙에 성공한 1969년이 아니라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된 1957년에 정정기사와 사과문을 실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미국은 우주에 큰 관심이 없었다. 당시 미국의 분위기를 책은 이렇게 묘사했다. 


“우주는 비행기를 연구하는 랭글리(NASA의 전신인 NACA 산하의 비행연구소)에서 오랫동안 ‘금기어’였다. 하원 의회는 머리 씨름꾼들에게 공상 과학과 유인 우주 비행이라는 몽상에 세금을 쏟지 말라고 경고했다. 동력 비행에 관한 한 세계 최고를 자부하는 랭글리 과학기술 도서관에도 우주 비행에 대한 책은 거의 없었다.”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 우주선의 비행과 낙하, 귀환 과정은 모두 사람의 손으로 계산해야 했다. 계산하고 수학적 공식을 푸는 그들을 '컴퓨터(computer)'라고 불렀다.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 발사 이후 미국은 분주해지기 시작한다. 인류 최초의 우주인(유리 가가린)도 소련의 몫이었다. 미국인의 패배감과 공포감은 갈수록 높아졌다. 미국인을 우주로 보내기 위한 머큐리와 제미니 프로젝트, 달에 먼저 깃발을 꽂기 위한 아폴로 프로젝트가 차례로 진행된다. 세 명의 흑인 여성도 직·간접적으로 그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그들이 처리해야 할 계산은 더 어렵고 복잡해졌다. 우주로 날아간 우주선이 다시 지구로 돌아와 안전하게 떨어질 수 있는 공식을 풀어야 했다. 


특히 이 가운데 캐서린 존슨은 달 착륙선이 달 표면을 떠나 궤도 비행 중인 사령선과 도킹할 수 있는 정확한 시간을 찾아내기도 했다. 1962년 미국인 최초로 우주 궤도 비행에 성공한 존 글렌은 우주선에 오르기 직전 이렇게 말한다. “그 여자분에게 숫자를 점검시켜줘요. 그분이 맞다고 하면 출발하겠습니다.” 


◇ 세 개의 적과 동시에 싸워야 했던 그들 


세 명의 주인공, 그리고 책에 등장하지 않는 흑인 여성들은 당시 세 개의 적과 싸워야 했다. 다시 말해 세 개의 대결 구도가 책을 관통한다. 미국 vs 소련, 백인 vs 흑인, 남성 vs 여성. 


(사진 위부터) 캐서린 존슨, 매리 잭슨, 도로시 본.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되면서 냉전의 무대는 우주까지 확장되었다. 소련이 우주에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언제든 핵무기를 떨어뜨릴 수 있는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미국인은 없었다. 소련과의 경쟁이 첫 번째 대결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우주 도시’라는 별명이 붙은 버지니아주의 햄프턴은 인종차별이 어느 지역보다 심했다. 식당과 버스, 도서관은 흑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적이었다. 인종 차별 극복이 두 번째 대결이었다. 무엇보다 우주공학, 기계공학 분야는 ‘남성의 세계’였다. 컴퓨터는 대부분 여성이었지만, 관리자의 대부분은 남성이었다. 성차별을 이겨내는 것이 세 번째 대결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60년대가 가기 전에 달에 발을 내디딜 것”이라고 선언하기 전에,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마틴 루터 킹의 연설이 울려 퍼지기 전에 그들은 흑인이기도 한 여성 수학자, 여성이기도 한 흑인 수학자의 길을 개척했다. 그들에게 버지니아주의 햄프턴은 미·소 냉전과 흑백 인종갈등의 최전선인 동시에 자신들의 꿈을 이룬 우주의 중심이었다. 책은 그들의 이야기다. 


소련의 스푸트니크 1호 발사 이후 미국의 우주개발 발걸음은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영화 <히든 피겨스>의 한 장면.


원작이 있는 영화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일치한다. “원작을 뛰어넘은 영화는 없다.” 「히든 피겨스」는 그렇지 못했다. “원작이 영화보다 못하다”라는 평가가 대세였다. 하지만 원작이 있는 영화, 영화화된 원작을 대할 때 둘을 분리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책 「히든 피겨스」가 영화보다 더 재미있고 감동적이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러나 책과 영화라는 장르의 차이를 인정한다면, 인류 우주 도전사의 긴박했던 순간과 시대상을 조금 더 가까이 마주하고 싶다면, 기꺼이 일독을 권한다. 


숨을 고르며 읽다가 마침내 책을 덮는 순간, ‘원작을 뛰어넘는 영화는 없다’라는 불변의 진리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 영화는 영화로, 원작은 원작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by 책방아저씨


논픽션 <히든 피겨스> 책 표지. 
히든 피겨스

미셸 오바마 극찬 ★★★★★20세기폭스 영화 [히든 피겨스] 원작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 아마존 항공/우주 분야 베스트 1위! 미셸 오바마 극찬!! 개봉 이전부터 백악관의 선택을 받은 영화 [히든 피겨스] 원작 1950년대와 1960년대, 노예 해방이 이루어지고 백여 년이 흐른 뒤지만 미국 사회에서는 여전히 흑백 차별이 성행하고 있었다. 흑인 여성이 버스의 백인 칸에 앉았다가 승차를 거부당했고, 백인 식당은 흑인에게 음식을 서빙하지 않았으며, 흑인 입학을 명령받은 학교는 자진 폐교하여 아예 학생을 받지 않기도 했다. 남녀 차별은 말할 것도 없다. 그 암흑의 시기에 흑인이자 여성으로서 자신들의 재능을 빛내 인류를 달에 보낸 인물들이 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닌 수십 혹은 수백 명이다. 그 숫자가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것은 그들이 그야말로 ‘히든 피겨스’ - 가려진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기계가 아닌 인간을 칭하던 시절, 인류가 우주를 꿈꾸기 시작하던 그 시절에 흑인이자 여성으로서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자신들의 재능을 꽃피운 그녀들의 이야기는 한계를 극복하고 그 이상을 향해 나아간 도전과 용기, 감동 그 자체이다.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융성한 항공업 부흥 속에서 넘쳐나는 수학자 수요를 채우기 위해 열린 채용의 문은 흑인이자 여성인 그녀들까지도 인류 최고의 지성 집단으로 끌어들인다.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움켜잡은 그녀들이 어떻게 최고의 지성 집단 속에서조차 만연하던 편견과 차별의 벽을 딛고 그 안에 융화되어 가며, 보이지 않는 벽을 깨고 차근차근 자신의 영역을 넓혀 갔는지를 보는 즐거움은 한 인간에 대한 존경과 동시에 읽는 이의 마음에 열정의 불씨를 일깨운다. 시간이 흐르고 사회의 벽은 예전보다 더 좁고 얕아졌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는 여러 편견과 한계와 싸우는 현대의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은 최고의 선물이 될 것이다.

book.daum.net

 
매거진의 이전글 심슨의 무죄는 수학적 오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