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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Jul 17. 2015

나는 어떻게 '누아르' 덕후가 되었나

'요넵빠'가 해리 홀레 시리즈에 보내는 헌사

토요일 오전부터 읽기 시작해 일요일 오전에 덮었다. 주말 낮밤을 고스란히 뺏어간 셈이다. 사실 책은 더 빨리 끝나가는데, 아까운 마음에 남은 몇 페이지는 일요일 오전으로 미뤘다. 그래도 그를, 이 책을 탓할 마음은 없다. 따지고 보면 늘 이런 식이었다. 그를 처음 알게 된 <스노우맨>도 그랬고, '오슬로 3부작'의 전작들이었던 <레드브레스트>, <네메시스>도, '해리 홀레 형사' 시리즈의 첫 작품인 <박쥐>를 읽을 때도 그랬다.


적게는 450페이지에서 많게는 800페이지에 달하는 그의 책은 늘 이렇게 만났다. 허겁지겁 찾아 읽다가, 나중에야 책에 순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후회하고, 그마저도 다 읽고 나면 다음 책이 빨리 번역되어 나오기를 기다리고… 일단 책을 손에 쥐면 정신없이 빠져들다가 문득 이야기가 끝나가고 책이 몇 페이지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읽는 속도를 줄인다. 그러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자칭) 한때 문학소년은 '해리빠'가 되어 갔다.


<데빌스 스타>는 1년 2개월 만에 국내에 선보인 요 네스뵈의 신작이다. 네스뵈의 '해리 홀레' 형사 시리즈는 모두 10권이다. 국내에는 이번에 <데빌스 스타>를 포함해 여섯 권이 출간됐다. 국내 독자들 대부분이 그렇듯 나도 <스노우맨>을 통해 그를 처음 접했다. 그런데 <스노우맨>은 해리 홀레 형사 시리즈의 일곱 번째 책이다. <데빌스 스타>는 다섯 번째 책이자 <레드브레스트>, <네메시스>로 이어지는 '오슬로 3부작'의 완결편이기도 하다.  


스토리는 생략하기로 하자. 어차피 축약하면 의미 전달도 어렵고, 구구절절이 얘기하면 스포일러가 될 뿐이다. 영화도 그렇지만 반전이 핵심인 스릴러, 혹은 누아르에서 스포일러는 '독(毒)'에 가깝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데빌스 스타>를 읽으며 무엇보다 집중한 것은 해리 홀레 형사다. 그의 고독과 괴팍함이 어디서부터 시작됐고 무엇으로부터 기인했는지 이제야 이해하게 됐다.


◆해리 홀레 시리즈의 최대 매력은 '해리 홀레'

<박쥐>부터 <데빌스 스타>까지 국내에 해리 홀레 시리즈는 6권이 번역, 출간됐다.

해리 홀레 형사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은 역시 '해리 홀레'다. 네스뵈는 어쩌면 자기와 닮은 캐릭터를 만들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키는 크지만(해리 홀레처럼 작가도 190센티미터가 넘는다고) 그렇게 미남형(물론 여자들이 보는 시각은 다르겠지만)도 아니다. 해리 홀레는 워커 홀릭이자 알코올 홀릭이다. 늘 제멋대로인데다 반항적이며, 모든 권위를 거부하지만 연쇄살인범을 찾는 '후각' 만큼은 거의 본능에 가깝다. 주변에 여자가 끊이지 않지만 그의 타고난 성격 때문에 늘 고독하고 외롭다.

해리 홀레는 쓰러질 듯 쓸러질 듯 넘어지지 않는다. 연쇄살인은 계속 이어지고, 밤마다 꿈속에 등장하는 과거의 악몽은 반복된다. 실력은 인정받지만 경찰서 내부에서는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연인들은 늘 그를 떠나고 싶어 한다. 혹은 떠나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를 지탱하는 것은 술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살인범을 잡기 위한 본능적인 '사냥 질주'. 냉철한 이성에 의존하면서도 본능을 더 믿는다는 점에서 그의 몸속에는 분명 사냥꾼의 DNA가 흐르고 있다. 그래서 사건 현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그는 사건에 대해 어떤 설명도 듣지 않는다. 전작에서 습관처럼 내뱉곤 했던 “무엇인가를 찾으려면, 아무것도 찾지 말라”는 그의 말에서도 사냥꾼의 냄새가 난다.


해리 홀레에 대한 묘사, 그리고 그가 내던지는 대사 한마디 한마디는 '하드보일드 누아르'의 전형이다. <데빌스 스타>에서도 전작과 마찬가지로 책을 놓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이런 대목이다. "65도 이상의 물에 피가 떨어지면 덩어리가 되죠. 끓는 물에서 달걀이 깨졌을 때처럼요. 안데르스가 물속의 덩어리를 먹더니 달걀 맛이 난다고 했을 때 전 그게 피라는 걸 알았어요.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도요."


최초 사건이 시작되는 대목에서 나오는 신고자의 진술이다.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신고자는 이렇게 공포에 떨며 말하고, 독자는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며 읽고 있는데 현장에 간 해리 홀레 형사는 이런 한 마디를 던지고 문을 나선다. "저녁 맛있게 드십시오."


상관과의 대화에서도 해리 홀레의 성격과 매력을 엿볼 수 있다. "지금 사실을 말하는 게 확실한가, 해리?" "지금 사실을 알고 싶으신 게 확실합니까?"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에게 건네는 이런 한 마디. "당신은 나 없이도 아주 괜찮을 거야. 문제는 나와 함께여도 괜찮냐는 거지." 



◆긴장감 끌어올리는 하드보일드한 묘사와 대화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국내외 책들. <사진 출처=비채>

해리 홀레의 대사는 아니지만 이런 대사와 묘사들은 책 속 곳곳에 뿌려져 있다. 사람의 머리에 총알을 관통시키고, 손가락을 자르고, 피해자의 눈 속에 다이아몬드를 박아 넣는 숨 막히고 긴장되는 장면보다 어쩌면 이런 대사 하나, 묘사 하나 때문에 책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자에게 가장 강력한 최음제는 사랑에 빠진 남자야."

"남자에게 가장 강력한 최음제는 사랑에 빠지지 않은 여자니까." 

"피아노가 완벽하게 조율되면 소리가 좋지 않습니다. 완벽한 게 잘못된 건 아니지만 온기랄까, 진정성 같은 게 사라지죠."


강을 건너게 해줄 뱃사공이 없어서 강둑을 떠돌며 안식을 얻지 못하는 영혼 같았다. 나도 그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다. 내가 아끼던 것들에게 발목이 잡혔던 경험. 난생처음으로 내가 도움받을 차례가 됐는데 거절당했던 경험.


어쩌면 네스뵈는 자신과 비슷한 캐릭터를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모든 작가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작가가 그럴 것이다). 1960년생인 그의 이력도 독특하다. 그는 노르웨이 비즈니스 스쿨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그리고 친구들과 밴드 '디 데레(Di Derre)'를 결성해 활동을 시작했다. 밴드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어느 날, 그는 음악 활동과 모든 일을 접고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난다. 그리고 반 년 후 <박쥐>로 작가가 되어 혜성처럼 노르웨이 문단에 등단해 각종 권위 있는 상을 휩쓴다.

요 네스뵈. <사진 출처=연합뉴스>

더 많이 알게 되면 더 좋아지게 되는 법이다. 가급적 국내에 출간된 것이라도 순서대로 읽었으면 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만약 전편에 대한 아무런 지식 없이 <데빌스 스타>를 접하는 독자라면 도대체 왜 이 작자는 이렇게 생겨먹었는지, 왜 그렇게 동료 형사의 죽음에 집착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해리 홀레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론 첫 번째 작품인 <박쥐>부터 읽은 것이 좋다. <데빌스 스타> 역시 <박쥐>부터는 아니더라도 오슬로 3부작의 전 편을 읽고 읽는 것이 좋다. 물론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다. 등장인물과 일부 사건은 연결되지만 어차피 각 시리즈는 독립적인 사건과 스토리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10권이 국내에 완간되면 처음부터 다시 천천히 읽어볼 생각이다. 북유럽만큼은 덜 춥겠지만 서늘하고 밤이 긴 겨울이면 더 좋을 것이다. 한여름이라도 좋을 것 같다(그때는 지금보다 더 한가하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책보다 훨씬 덜 잔인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데빌스 스타>를 읽는 지난 주말 내내 비가 내렸다. 책 읽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주문한 책을 기다리면서 피에르 르메트르의 ‘카미유’ 형사 시리즈를 읽었던 것은 해리 홀레를 다시 만나기 위한 일종의 개인적인 사전 의식이었다. 책을 덮고 레네 코베르뵐과 아그네테 프리스가 같이 쓴 ‘니나보르’ 시리즈 3권을 무작정 주문한 것은 다음 만남을 기약해야 하는 아쉬움의 표현이다.


‘해리빠’가 된 (자칭) 문학소년은 이렇게 ‘하드보일드 누아르’ 소설의 덕후가 됐다.  

p.s: 이 글을 쓴 후 <바퀴벌레>가 출간되어 모두 일곱 권으로 늘었다.

 

by 책방아저씨

https://www.facebook.com/booksbooster  

가장 최근에 국내 출간된 <데빌스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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