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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Jul 31. 2015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나는가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서 말하는 여행의 매력 9

2012년 회사를 그만둔 나는 센 강 위에 있었다(맞다. 또 자랑질이다). 보통 회사를 그만두거나 옮기게 되면 가장 먼저 여행을 떠난다. 대부분 그런다. 이런저런 거창한 이유를 대지만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이라는 게 가장 솔직할 것 같다. 

3월이었지만 파리의 바람은 찼고, 강바람은 더 찼다. 도시는 더없이 평화로웠다. 그리고 아름다웠다(파리니까). 꼼짝도 않고 자리에 앉아 강변을 바라봤다. 몸만 배에 맡긴 것이 아니라 시선도 배에 맡겼다. 

일행이 물었다. “무슨 생각했어?” 이때 왜 좀 더 폼나는 대사가 생각나지 않았을까? 기껏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지금 생각해도 진부하고 유치하고 오글거리는 이 한마디. “어,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건 결국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 그랬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라면, 그대로 시간이 멈춰도 괜찮을 것 같았다. 

파리를 거쳐 프라하로, 다시 미국으로 3주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지만 물론 변한 것은 없었다. 여행에서 본 것, 경험한 것도 특별히 생각나는 것도 없었다. 다만, 자주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게 좋았다. 그렇다고 또 여행을 갈 수는 없는 노릇(현실이 허락해주지 않았다). 

해질녘 센 강. <사진=책방아저씨>

여행 대신 책을 꺼냈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선물로 받고 책꽂이에 방치해뒀던 책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자주,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독서는 여행과 닮았다.  문득 깨달았다. ‘아, 여행과 독서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구나.’ 책의 앞 부분에서 만난 알랭 드 보통의 이런 글이 더없이 반가웠다. “우리는 지속적인 만족을 기대하지만, 어떤 장소에 대하여 느끼는, 또는 그 안에서 느끼는 행복은 사실 짧다.” 

알랭 드 보통은 다양한 곳을 여행한다. 여행지보다 흥미로운 것은 그곳으로의 여행을 이끈 안내자들이다. 귀스타브 플로베르를 통해 암스테르담을, 빈센트 반 고흐를 통해 프로방스를, 알렉산더 폰 훔볼트를 통해 마드리드를 여행한다. 그래서 이 책은 여행 안내서라기보다 예술 안내서로 읽힌다. 

출발, 동기, 풍경, 예술, 귀환은 이 책의 큰 다섯 가지 주제인 동시에 여행을 구성하는 큰 요소다. 알랭 드 보통은 이 큰 주제 밑에 기대, 장소, 이국적인 것, 호기심, 시골과 도시, 숭고함, 미술, 아름다움의 소유, 습관 등 우리가 여행에서(만) 마주칠 수 있는 아홉 가지 이야기로 우리를 여행과 예술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것은 여행의 기술이자, 우리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일 것이다. 다음은 알랭 드 보통이 말하는 여행의 아홉 가지 치명적 매력이다 <출처=여행의 기술>. 

에드워드 호퍼의 <293호 열차 C칸>.

1. 기대에 대하여 


어떤 장소로부터 돌아오자마자 기억에서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이 바로 앞으로 다가올 시간을 생각하며 보낸 과거의 많은 시간, 즉 우리가 있던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보낸 과거의 많은 시간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자면 어떤 곳에 대한 기억과 그곳에 대한 기대에는 모두 순수함이 있다. 

2. 여행을 위한 장소들에 대하여 

우리는 몇 시간 뒤에 우리에게 아무런 기억이 없는 장소, 아무도 우리 이름을 모르는 장소에 착륙할 것이다. 오후 3시. 권태와 절망이 위협적으로 몰려오는 시간에 늘 어딘가로. (…) 이륙하는 비행기가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 기분의 갈라진 틈들을 메우는 것은 즐거운 일 아닌가. 

어쩌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 차를 몰고 가야 할 곳은 외로운 휴게소인지도 모른다.  

파리 기차에서 마주친 책 읽는 여인.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닮았다. <사진=책방아저씨>

3. 이국적인 것에 대하여 


매혹적인 사람이 이국적인 땅에 가게 되면 자신의 나라에서 가지고 있는 매력에 그 사람이 있는 장소가 주는 매력이 보태 진다. 자신에게 없는 부분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 것이 사랑이라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을 사랑할 때는 우리 자신의 문화에는 빠져 있는 가치들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도 따라갈 것이다.  


4. 호기심에 대하여 


우리의 호기심은 세계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을 포괄하다가, 마침내 어느 지점에서는 어떤 것에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 오묘한 경지에 일 수도 있다. 뭉뚱그려진 커다란 질문들은 언뜻 보기에는 남의 관심을 끌 수 없을 것 같은 작은 질문들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산속에서 파리에 대해 궁금해하기도 하고, 16세기 궁전의 벽에 그려진 특정한 벽화에 대해 궁금해하기도 한다. 

유럽여행에서 만난 거리의 악사들. <사진=책방아저씨>

5. 시골과 도시에 대하여 


그럼에도 도시의 ‘떠들썩한 세상’의 차량들 한가운데서 마음이 헛헛해지거나 수심에 잠기게 될 때, 우리 역시 자연을 여행할 때 만났던 이미지들, 냇가의 나무들이나 호숫가에 펼쳐진 수선화들에 의지하며, 그 덕분에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의 힘들을 약간은 무디게 할 수 있다. 

6. 숭고함에 대하여 

만일 세상이 불공정하거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설 때, 숭고한 장소들은 일이 그렇게 풀리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바다를 놓고 산을 깎은 힘들의 장난감이다. 숭고한 장소들은 우리를 부드럽게 다독여 한계를 인정하게 한다. 

인간의 삶도 똑같이 압도적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훌륭한 태도로, 가장 예의를 갖추어 우리를 넘어서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은 아마 자연의 광대한 공간일 것이다. 그런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면, 우리 삶을 힘겹게 만드는 사건들, 필연적으로 우리를 먼지로 돌려보낼 그 크고 헤아릴 수 없는 사건들을 좀 더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얻을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에서 마주치는 자연의 위대함, 숭고함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사진=책방아저씨>

7. 미술에 대하여 


나는 반 고흐의 작품에 묘사된 풍경을 살피기 전에는 프로방스에 별로 감탄하지 않았다. (…) 우리가 감탄했던 그림이 시야에 사라진다고 해서 그 그림에서 묘사한 장소에 대한 관심도 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움의 감상은 예술에서 현실 세계로 옮겨질 수 있다. (…) 휘슬러 이전에는 아무도 런던의 안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반 고흐 이전에는 아무도 프로방스의 사이프러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8. 아름다움의 소유에 대하여 

아름다움을 만나면 우리는 그것을 붙들고, 소유하고, 삶 속에서 거기에 무게를 부여하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데 된다. “왔노라, 보았노라, 의미가 있었노라”라고 외치고 싶어 진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우리가 결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 곳에서만 자주 나타나거나, 계절과 빛과 날씨가 보기 드물게 조화를 이룬 결과로 나타나곤 한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소요할 것인가? 카메라가 하나의 방법이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아름답다는 인상과 더불어 그 근원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일었다. 러스킨의 말에 따르면, 예술만이 제대로 충족시킬 수 있는 욕망이었다. 나는 ‘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9. 습관에 대하여 

그렇다면 여행을 하는 심리란 무엇인가? 수용성에 그 제일의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면,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새로운 장소에 다가가게 된다. 어떤 것이 재미있고 어떤 것이 재미없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게 된다. 

드 메스트르는 창문으로 가서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는 그 아름다움을 보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런 흔하지만 아름다운 광경을 감상하지 못하는 것에 좌절감을 느낀다. (…) 사람들이 그것을 보지 않는 이유는 전에 그렇게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우주가 따분하다고 생각하는 습관에 빠져 있다. 실제로 그들의 우주는 그들의 기대에 적당히 맞추어져 있다.  


by 

책방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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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사진 출처=연합뉴스>
책 <여행의 기술> 구 버전과 최신 버전 표지. 호불호가 갈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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