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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Sep 11. 2015

상실의 슬픔, 치유의 독백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

                                                                                                                                                                      

"당신은 왜 그날 밤 치일 줄 뻔히 알면서 한신 전차 철로 위를 터벅터벅 걸어갔을까요?"

   
유미코는 끊임없이 묻는다. 남편은 왜 그 시간에 철로 위를 혼자 걸었을까. 왜 달려오는 전차를 피하지 않았을까. 왜 유서 한 장 남기지 않았을까. 일주일 전까지 도둑 맞은 자전거를 못내 아쉬워하며 ‘나도 자전거를 훔치겠다’고 말하던 남편이었다. 자살할 이유라고는 (유미코가 아는 한) 전혀 없었다. 새 남편은 유미코가 전 남편의 자살을 궁금해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혼이 빠져나가면 죽고 싶어지는 법이야.”
   
“저는 아내와 젖먹이를 버리고 멋대로 죽어버린 당신에게 이렇게 아무도 모르게 말을 걸고는 합니다.... 당신은 선로 한가운데를 전차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고 합니다. 느슨한 커브여서 사람의 모습이 조명등 안으로 들어왔을 때는 이미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거리였답니다. 경적 소리에도, 엄청난 브레이크 소리에도 돌아보지 않고 당신은 치이는 순간까지 똑바로 걷고 있었다고 합니다.”
                                                                                                                                                                            

철로를 걷던 남편이 죽는다.  자살이었다. 남편이 자살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사진은 영화 <환상의 빛>.


"당신은 왜 자살했나요?"
   
<환상의 빛>은 20세기 일본 순문학을 대표하는 미야모토 테루의 소설이다.  미야모토 테루가 글을 쓰게 된 이력이 재미있다. 비를 피하려고 잠시 들른 서점에서 읽은 유명 작가의 단편소설이 너무 재미있어서 카피라이터를 그만두고 전업작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고. 책 <환상의 빛>에는 <밤 벚꽃>, <박쥐>, <침대차> 등 네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환상의 빛>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수많은 국제 영화제 수상 경력을 자랑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첫 연출작이기도 하다. 베네치아, 밴쿠버, 시카고 국제 영화제 등에서 상을 받고 국내에서도 일부 시네필(영화광)들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소설은 자살한 남편을 떠나보내고 혼자 남게 된 한 여인의 이야기다. 그녀의 독백의 글이다.이야기는 잔잔하다 못해 단순하다. 별다른 사건과 반전도 없다. 이십 대의 유미코는 어느 날 남편이 전차에 치여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자살이었다. 남편의 사체에서는 약물도, 알코올도 검출되지 않았다. 자살할 만한 단서나 근거는 단 하나도 없었다. 

여자관계도 없고, 돈 문제도 없었고, 첫아이가 태어난 지 세 달밖에 안 됐다. 남편은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전차 선로 위를 혼자 걷다가 죽었다. 유미코는 재혼한다. 작은 어촌에서 나름대로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문득문득 전 남편의 부재를 떠올린다. 대답 없는(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독백처럼 계속 던진다. “당신은 왜 자살했나요?”
   
“저의 마음속에 있는 또 하나의 마음에, 비 그친 선로 위를 터벅터벅 걷고 있는 당신의 뒷모습이 이제 또렷이 비쳤습니다. 하늘색 와이셔츠 위에 회색 블레이저 코트를 입고 약간 등을 구부린 특유의 모습으로 혼자 묵묵히 이슥한 밤의 선로 위를 걷고 있는 당신의 뒤를 쫓으면서 저는 열심히 그 마음속을 알려고 기를 썼습니다.”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 한  <환상의 빛>의 한 장면.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까지는 아니어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한두 번씩은 경험한다. 대게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그렇다. 행복하지는 않아도 불행한 것도 아니고, 관계가 관성화된 면은 있어도 여전히 사랑의 부유물들이 남아 있는데도 어느 날 ‘그(녀)’가 떠났다. 

우리는 묻는다. ‘왜 그(녀)는 날 떠난 것일까?’. 어떻게 그렇게 사랑했던 나를 남겨두고 떠날 수 있단 말인가. 답 없는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묻고 또 묻는다. 결론은 늘 같다. 아무런 해답도 찾을 수 없다는 것. 설사 적당한(비교적 그럴듯한) 이유를 찾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다. 그(녀)는 떠났고, 나는 살아야 한다. 그(녀)도 그렇게 어디선가 살아갈 것이다.

"당신은 그저 죽고 싶었을 뿐이야"

유미코는 어느 날 해변에서 한 남자를 발견한다. 직감적으로 ‘자살’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남자의 뒤를 따라간다. “길에는 저와 그 남자밖에 없었습니다. 털 장갑을 낀 손으로 머리에 감고 있던 머플러를 누르면서 저는 흠뻑 젖은 채 뒤를 쫓아갔습니다. 그때 아주 시커멓던 하늘도 바다도 파도의 물보라도 파도가 넘실거리는 소리도 얼음 같은 눈 조작도 싸악 사라지고 저는 이슥한 밤에 흠뻑 젖은 선로 위의 당신과 둘이서 걷고 있었습니다.”
 

유미코는 어느날, 문득 남편의 자살을 이해한다. 


그 순간, 그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유미코는 남편의 자살을 비로소 이해한다.
   
“그것은 아무리 힘껏 껴안아도 돌아다봐 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뭘 물어도 무슨 말을 해도 절대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피를 나눈 자의 애원하는 소리에도 절대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 뒷모습이었습니다. 아아, 당신은 그냥 죽고 싶었을 뿐이었구나, 이유 같은 것은 전혀 없어, 당신은 그저 죽고 싶었을 뿐이야.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저는 뒤를 쫓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순식간에 멀어져 갔습니다.”
   
아내 유미코가 궁금해하는 것은 ‘왜 남편이 자살했는가’이지만, 정말로 그녀가 찾고 싶었던 것은 ‘자신이 살아야 하는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남편이 왜 자살했는지 이유를 알아도 사실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다. 죽은 남편이 돌아오는 것도, 혼자 남게 된 유미코가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환상의 빛>에서 말하고자 하는 정작 중요한 것은 ‘왜 남편이 자살했느냐’가 아니라 ‘그럼에도 살아(가)야 한다’는 쓸쓸한 삶의 과제다. 더 이상 답장도 할 수 없고, 대답도 할 수 없는 남편에게 끊임없이 독백으로 말하고 묻는 유미코의 행위는 그래서 남편이 자살한 이유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아이와 혼자 세상에 남겨진 본인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는 과정이다.


바다 한쪽이 빛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남편도 그날 밤 레일에서 그 빛을 봤을지도 모른다.


"당신도 그 빛을 보았나요?"
   
“체력이라든가 정신력이라든가 하는 그런 표면적인 게 아닌 좀 더 깊은 곳에 있는 중요한 혼을 빼앗아가는 병을, 사람은 자신 안에 키우고 있는 게 아닐까, 절실하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의 마음에는 이 소소기 바다의 그 한순간의 잔물결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것으로 비칠지도 모릅니다. 봄도 한창이어서 짙은 초록으로 변한, 거칠어지기도 하고 잔잔해지기도 하는 소소기 바다의 모습을 저는 넋을 잃고 바라봅니다.”

<환상의 빛>은 끝내 남편이 자살한 이유를 밝히지 않는다. 유미코도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어느 순간 이해한다. “자 보세요. 또 빛나기 시작합니다. 바람과 해님이 섞이며 갑자기 저렇게 바다 한쪽이 빛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쩌면 당신도 그날 밤 레일 저편에서 저것과 비슷한 빛을 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 혹은 스스로의 불행조차 깨닫지 못하고 살아갈 때가 있다. 분명한 것은 그 불행조차 우리의 삶의 일부분이라는 것. 유미코는 문득 그것을 깨닫는다. “당신의 뒷모습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떠올랐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는 불행이라는 것의 정체가 비쳤습니다. 아아, 이것이 불행이라는 것이구나. 저는 당신의 뒷모습을 보면서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오래전 도저히 내가 이해할 수 없어 분노와 고통을 쏟아낼 때 누군가 말했다. “나도 살아야 하니까.” 그때는 그 말이 그렇게 이기적으로 들렸는데 지금은 조금 이해할 것도 같다. 비록 대답 없는 독백이지만 살아서 누군가에게 말을 걸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러니 설사 ‘바다 한쪽에서 빛나는 빛’을 봤더라도 살아야 한다. 유미코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다.

“아아, 역시 이렇게 당신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기분이 좋네요. 이야기를 시작하면 가끔 몸 어딘가에서 찡하니 뜨거운 아픔이 일어 기분이 좋습니다.”

by 책방아저씨 
https://www.facebook.com/booksbooster     


환상의 빛

불가피하게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하여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데뷔작 중 한 편으로 평가받는 「환상의 빛」의 원작 단편집『환상의 빛』. 표제작인 「환상의 빛」을 포함해 총 네 편의 중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모두 상실과 이별에 얽힌 추억들을 다룬 작품들로 우리가 살면서 불가피하게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로써 삶의 의미를 묻고 인간 존재의 나약함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다. 이 책은 특히 서간 문학의 참맛을 알려주는 작품이다. 아내가 죽은 남편에게 부치는 편지 형식을 띤 이 작품은 왕복 서한이 아니라는 점에서 온전한 의미의 서간 문학은 아닐지도 모른다. 수취인 또한 이미 이 세상에 없는 남편이라는 점은 그러한 면모를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하지만 수취인 부재의 편지라는 형식은 발신인의 간절한 질문에 대답해줄 수 없는 주체가 부재한다는 이 소설의 정조인 애절함과 안타까움, 쓸쓸함을 더 한층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치로 작용한다. 그리고 삶과 죽음의 경계란 생각보다 멀지 않으며 죽음은 삶의 외곽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을 수 있다는 이 책의 주제로 볼 때 이 수취인 부재의 편지 형식은 단순히 특정한 개인을 향한 발신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존재를 향한 편지라는 함의를 띤다고도 할 수 있다. 김혜리 씨의 추천의 글대로 이 소설은 ‘기도’에 가까우며 그 기도가 향하는 대상은 어떤 절대자를 향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book.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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