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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방아저씨 Sep 22. 2015

노래로 폭발했던 그들의 분노

영화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


영화로 되살린 갱스터 힙합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

언제부터인가 TV 음악프로를 잘 보지 않는다. 라디오 음악프로 역시 마찬가지로 잘 듣지 않는다. 한때 빼놓지 않고 봤던 음악프로는 ‘이소라의 프러포즈’가 마지막이었고, 요즘 챙겨 보려고 하는 음악프로는 ‘유희열의 스케치북’이지만 첫 초대가수의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잠이 든다. 분명 내 몸속에 음악적인 유전자는 남들에 비해 현격한 ‘열성’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스마트폰에 저장된 ‘애청곡’만 줄구장창 반복해 듣는다.      


(블로그 친구 중에 인디밴드의 광팬 ‘아줌마’가 한 분 계신데 정말 부러울 따름이다. 전국비둘기연합, 줄리아 드림, 로만티카 등등 이름조차 낯선 뮤지션들의 공연을 꼬박꼬박 챙기는 정성과 열정이 놀랍기만 하다.  그분은 급기야 모 인터넷 매체에 ‘인디덕후 인썸니아’라는 제목으로 아줌마의 인디밴드 관람기를 연재하기 시작했는데  그분에게는 비밀이지만 빼놓지 않고 챙겨 읽고 있는 중이다.) 

     

영화 속 주인공인 전설의 갱스터 힙합 그룹 N.W.A 


사정이 이러니 공연장이라는 곳을 가본지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몇 해전 부산국제영화제 때 봤던 공연이 마지막이었던가?. 윤미래와 타이거 JK, 이문세 등이 나왔지만 그나마 억수같이 내리는 비로 공연 중간에 나왔던 기억이 난다. 이 얘기 전해 들은 한 후배가 “왜 나와요? 라이브 공연할 때 비 오면 짱인데”라는 말을 들으며 나의 ‘열성’ 음악 유전자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변명하자면 10월에 젖은 몸은 너무 추웠다.   

  

◇죽어있는 ‘음악 세포’가 살아나다     


이런 나에게도 죽어있는 음악 세포가 가끔 살아나는 경우가 있는데 음악 영화를 볼 때가 그렇다. 지난 여름 봤던 영화 <러브 앤 머시>에서 비치 보이스와 천재 뮤지션 브라이언 윌슨이 그랬고, 올해 초 봤던 <위플래시>에서 재즈 드러머 주인공 앤드류가 광기 어린 공연을 선보일 때 그랬다. 작년에 <비긴 어게인>을 볼 때는 이 영화에 쏟아진 찬사와 비난에 관계없이 영화 내내 울려 퍼지던 노래로 가슴이 따뜻해지기도 했다. 

    

영화관에서만 살아나는 음악 세포란 단세포임이 분명 할 테고, 세포 분열 현상도 거의 목격되지 않으니 우성·열성을 따지기조차 겸연쩍다. 귀로 ‘듣는’ 음악이 아니라 영상으로 ‘보이는’ 음악에 반응하는 것이 분명할 테지만, 그나마 조금이라도 ‘반응’한다는 것에 만족한다. 듣는 것이든 보는 것이든 반응(느끼고 감동하고, 혹은 실망하고)할 줄 아는 것, 그게 중요하다. 그런 작은 반응조차 언젠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더 없이 슬프다.  


특별한 잘못이 없어도, 뮤지션이 도서도  '흑인'이기 때문에 늘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오랜만에 죽어있는 음악 세포를 깨우는 영화를 만났다. <위플래시>와 <러브 앤 머시>가 열정적으로 깨운 영화라면, 이번에 본 <스트레이트 아웃 오브 컴턴>은 공격적으로 음악 세포를 깨운 영화다(왜 나는 꼭 이런 영화를 개봉초에 보지 못하고 이렇게 끝물에서야 겨우 보고 뒤늦게 숨은 진주라도 혼자 발견한 양 호들갑을 떠는 것일까?).      


힙합의 ‘ㅎ’자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힙합이란 장르가 원래 그런 모양이다. 방어할 틈도 주지 않는다. 처음부터 음악은 폭력과 욕설과 마약과 섹스와 뒤섞여 무방비 상태의 관객을 덮친다. 147분 동안 그렇게 끝까지 밀어붙이더니 스피커가 꺼지듯 영화는 막을 내린다. 멤버들을 둘러싼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교차하지만 감독은 이런 에피소드에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한 멤버가 동생을 잃고 슬퍼하는 장면이 거의 유일한 감정이입일 뿐이다. 그조차 “우리는 형제”라는 다른 멤버들의 격려로 서둘러 수습하고 원래 하던 얘기로 되돌아간다.  


N.W.A의 노래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음반 판매에서도 대성공을 거둔다.


힙합을 알지 못하는데 흑인 힙합 그룹 ‘N.W.A’를 알리 없다. 영화는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활동한 N.W.A의 탄생과 멤버들의 삶(그리고 어떤 멤버의 죽음)을 닮은 영화다. 미국 LA 남쪽의 컴턴이라는 도시에서 뒷골목을 배회하던 갱스터와 음악을 좋아하고 랩을 좋아하던 보잘 것 없는 흑인 몇 명이 의기 투합해 힙합 그룹을 결성한다. 목표도 목적도 없었다. 왜 그룹을 결성했냐고 물으면 마치 그들의 대화 방식처럼 “그냥! 왜 그게 뭐가 문제야. 그런 거나 물어볼 거면 여기서 꺼져!”라고 말할 것 같다.


◇현실을 그린 노래, 그들의 노래를 그린 영화     


그렇게 멤버가 결성된다. 거리에서 마약을 팔던 이지-E와 MC 렌, 클럽에서 DJ를 하던 닥터 드레와 옐라, 시도 때도 없이 랩 가사를 적는 아이스 큐브. 그들의 노래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반항적이고 폭력적인 가사는 FBI까지 나서 경고를 할 정도다. 왜 그들은 그토록 반항적이고 폭력적인 노래를 부른 것일까? 기자회견장에서 한 기자가 묻자 멤버들은 이렇게 답한다. “그게 현실이니까!”      


그렇다. 다른 이유는 없다. 멤버들이 원래부터 사회적인 문제의식과 저항의 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현실을 그대로를 적나라하게 옮기다 보니 그렇게 됐을 뿐이다. N.W.A가 노래했던 그 현실은 흑인이 대통령이 된 지금도 계속된다. 나는 힙합을 모르지만 분명 지금도 힙합은 계속 인기를 누리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게 현실이니까!’


영화에서는 L.A폭동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멤버들이 현실 그대로를 노래로 만들려고 했던 것처럼, 감독은 그 멤버들의 삶 그대로를 영화로 만들려고 했던 것 같다. 세상을 떠난 이지-E를 제외한 나머지 실제 멤버들이 자문역을 자처하며 모두 제작에 참여했다. 아이스 큐브 역할은 그의 실제 아들이 배역을 맡았다. 다섯 명의 멤버 가운데 유일하게 실제 인물의 자문을 받을 수 없었던 이지-E 역의 제이슨 미첼은 “나를 코치해줄 이지-E가 세상에 없다는 것은 축복이자 저주였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은 N.W.A의 음악세계를 그대로 복원하고 싶었다. 배우들은 랩부터 디제잉, 무대 인사, 무대 스타일까지 모두 배워 음악을 녹음했고 무대에 올랐다. 제이슨 미첼의 말을 인용하자면 ‘내가 힙합을 모르고 특히 N.W.A를 모르는 것은 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축복이자 저주였다.’ 내가 스크린에서 보고 들은 것은 배우들의 연기가 아니라 실제 멤버들의 공연이었다. 내가 만약 그들을 알았다면 그렇게 사실감 있게 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축복이다. 아무리 완벽에 가까워도 그것은 어찌됐든 연기였다. 결국 나는 완벽하게 복원된 N.W.A를 보고 들었을 뿐이다. 그것은 저주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나는 음악을 잘 모른다. 힙합은 더 모른다. 그래도 이 영화를 보는데 지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147분 동안 카메라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노래와 랩과 비트에 귀와 몸을 맡기면 된다. 영화관 객석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지만, 영화관은 공연장이 됐다. 이처럼 맹렬하게 앞으로 돌진하는 음악 영화는 본 적이 없다. 그들이 노래로 전달한 폭력과 욕설, 마약과 섹스에는 공감할 수 없지만 그들이 그 노래를 통해 전하고가 했던 메시지에는 동의한다. 그리고 또 하나 분명한 사실. 이 영화 때문에 음악 영화를 더 사랑하게 될 것 같다.


by 책방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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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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